소설리스트

경여년-997화 (997/1,108)

997화 황궁 안에 있는 범씨 집안 아가씨 (1)

황제 폐하가 손을 휘저어 범씨 저택 밖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을 전부 철수시켰다. 이것이 봉건시대에서 황제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었다. 황제인 그는 자신의 성격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들 부자 사이의 전쟁 때문에 범씨 저택 밖을 지키는 부하들과 신하들이 죽는다고 해도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이후에도 어서방 안은 조용해지지 않았다. 호 대학사가 황궁을 나간 뒤 황제 폐하는 범약약과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이건 최근 며칠 동안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경제가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검은색 바둑돌을 가볍게 들어 살짝 번들거리는 바둑판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범건이 집 안에 있을 때 네게 바둑 두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범약약은 오늘이 입궁해서 황궁 안에서 지낸 지 꼬박 8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지금 범씨 집안에서 온갖 고생 끝에 가까스로 방법을 마련해 궁 안에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보내 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 휘황찬란한 황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색감의 옷들이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범씨 집안 아가씨가 황궁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인질이라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신분인데다가 황제 폐하도 그녀를 박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 군주가 황궁 밖에서 뇌물을 주며 안팎으로 힘을 쓰고 있고 황궁 안에서도 도와주려 하는 귀빈들이 있어서 먹고 입고 생활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공손히 경제 앞에 앉아 있는 그녀가 양손을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바둑은 너무 복잡해서…….”

황제 폐하가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재미있다는 말투로 물었다.

“안지가 경도로 올라오기 전에 너는 이미 경도에서 재녀로 유명하지 않았느냐?”

범약약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가당치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여색을 좋아하고 말을 지어내길 좋아하는 남자들이 제멋대로 꾸며낸 말일 뿐입니다. 시를 잘 쓰지도 그림을 잘 그리지도 못하는 제가 어찌 재녀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범약약은 입궁해서 8일 동안 빙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절망과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지냈지만, 겉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이 돼서 침착하게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이처럼 침착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타고난 성격이 진중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끊임없이 자신도 모르게 범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은연중에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경국의 황제 폐하이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일 뿐 괴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범약약이 이렇게 느끼는 데는 황제 폐하가 그녀 앞에서는 유달리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가 지은 시를 본 적이 있다. 여자가 지은 시치고는 잘 지었더구나. 물론 안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야. 네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황제 폐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모름지기 재녀라면 밖에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내면에 누구보다도 굳건한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너는 뛰어난 의술 실력으로 짐의 목숨을 구했으니 재녀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모두 폐하의 복이 하늘에 닿을 만큼 많아 그런 것이지 제가 한 일은…….”

범약약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며 대답하자 황제 폐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물론 네가 아니었어도 죽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몸 안에 그렇게 많은 쇠 구슬이 있었다면 분명 엄청 불편했을 거다.”

그때 요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어서방 안에 들어와서는 황제 폐하의 옆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묘에서 사람이 한 명 죽었고, 그들은 지금 전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고? 뭘 기다린다는 말이냐? 죄를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황제 폐하가 광택이 없는 검은색 바둑돌을 든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짐은 이번에는 그들을 용서할 것이다. 다만 만일 앞으로 다시 경거망동하게 행동한다면 대동산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게 할 것이니 그리 알라 전하라.”

요 태감이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 다시 말했다.

“작은 범 대인께서 경묘를 떠난 뒤 태학으로 가서 호 대학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말에 황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하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경묘 쪽에서…… 그림자도 이미 돌아왔겠지.”

요 태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일에 대해 발언을 할 권한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생각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는 절대 삿갓을 쓴 고행자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을 거였다. 범한이 어떤 사람인가? 범한은 절대 일반 사람들과 같을 수 없었다. 그는 황제 폐하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이자 가장 아끼는 사생아 아들이었다. 그러니 설사 폐하께서 범한을 죽이려 하신다고 해도 아랫사람이 함부로 판단해 행동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까지도 작은 범 대인이 무슨 방법으로 범씨 저택을 몰래 빠져나갔으며, 또 어떻게 경묘에 들어갔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은 범 대인께서 이후로 어디로 갔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짝 허리를 굽힌 요 태감이 황제 폐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경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다른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손을 저어 요 태감을 어서방에서 내쫓았다. 요 태감과 황제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범약약은 줄곧 옆에서 조용히 들었다.

요 태감이 범약약이 듣는 걸 피하지 않는 이유는 황궁에 있는 태감과 궁녀들에게 범약약의 존재가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의 곁에는 항상 수려한 외모에 어떤 일에도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범약약이 있었다. 어서방에서 회의를 하든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든 황제 폐하는 그녀가 옆에서 듣는 걸 피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주제에 오른 사람은 그녀의 친 오라버니인 범한이었다. 그래서 범약약은 듣기가 싫은 것인지, 아니면 황제에게 자신의 조금의 표정 변화도 싶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그녀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 폐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범한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저택에서 나와 뭘 했는지 궁정은 아무런 흔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감찰원 6처 그림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경묘에서 십여 명의 고행자들이 두 사람과 큰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었다.

대머리 고행자가 떠오른 경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지더니 눈동자에서 혐오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는 열광적인 경묘 고행자들이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범한을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경제에게는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이어서 감찰원 6처의 진정한 수장인 그림자를 떠올린 황제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평평은 황제를 수십 년 동안 극진히 섬기면서도 아주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황제는 진평평의 충성심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세세한 부분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 주변에 항상 그림자가 떠돌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경제는 그림자가 어디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림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의 눈앞에 서슬이 퍼런빛이 번쩍였다. 바로 몇 년 전 현공 사당에서 흰색 옷을 입은 검객이 휘두른 검광이었다. 실제로 번쩍이는 검광에 눈이 시린 듯 눈을 잔뜩 찌푸린 황제는 속으로 사고검의 아우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가 되었다.

범한이 오늘 저택에서 나와 뭘 하려 했는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황제는 범한이 오늘 경도 어딘가에서 자신이 가장 믿는 부하들에게 연락하는 동시에 서량로, 동이성, 강남에 중요한 정보를 보내리라는 걸 알았다.

이건 아주 단순한 일이었고,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용상의 위엄에 굴하지 않고 범한이 계속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범한이 보내려 하는 정보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알아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한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이 강산 위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강산은 경제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 * *

사실 경제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아들이 경도 안에 갇힌 상태에서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그에게 맞서는 사람이 당시의 섭경미라면 그녀는 강산의 백성들을 위해서, 경국의 존속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서 움직일 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먼 길을 간 섭경미는 이제 더는 경국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와 섭경미 사이에 낳은 아들은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경제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가 무척 궁금했다.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경제는 다음 세대의 발악을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악취미를 가진 것일까? 사실 그는 지금까지도 범한이 깊은 내막까지 알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봤을 때 자신의 아들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궁 안에서 위풍당당하게 앉아 스스로 반성한 범한이 자기 일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만일 그때가 온다면 황제는 범한에게 온화한 말투로 모든 걸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범한이 따랐던 늙은 검은 개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애로운 사람이 아니었으며, 감히 이씨 황족 모두를 죽이려 했고, 이전에 너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범한에게 네 성은 비록 범씨이지만, 진짜 성은 이씨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말 황제가 바라는 대로 상황이 순순히 흘러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섭경미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황제 폐하는 그 방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짐은 나가 보아야겠다.”

황제 폐하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이처럼 침착하면서도 분명한 말투로 나가겠다고 말한 건 호 대학사가 아까 입궁해서 한 말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을 처리하는 일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가벼웠기에 지금처럼 깊은 밤 중에 나갈 생각도 할 수 있는 거였다.

어서방에는 두 사람 밖에는 없었고, 황제가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도 범약약이었다. 범약약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재빨리 일어나 모피와 금색 비단으로 만든 얇은 외투를 집어서는 조심히 황제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부축하며 천천히 어서방 나무 문 옆으로 걸어갔다.

어서방 나무 문이 열리자 이미 십여 명의 태감과 궁녀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요 태감이 몸을 잔뜩 낮춘 채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왔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가 나가겠다고 말한 순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감들이 준비를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완벽하게 모든 걸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문지방 밖에서 자신이 앉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황제 폐하는 자신의 몸 상태를 고려한 요 태감에게 칭찬하기는커녕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리고는 문밖에서 겁에 질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를 본체만체하며 범약약의 부축을 받아 어두운 황궁을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