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화 준비하는 중 (1)
지난 번 태학에 온 건 몇 달 전 일이었다.
그날은 봄비가 나부끼고 있었고, 범한이 태학에 간 건 경도 부윤 손경수 일로 호 대학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때 범한은 엄청난 공을 세우고 경도로 돌아온 터였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광채를 제대로 뿜어내며 문하 중서의 압박에 멋지고 오만하게 저항해 하 대학사의 의지를 꺾고 인생 2회 차의 정점에 올라섰었다. 이에 비가 그쳐 검은 우산을 내리자 범한을 알아본 태학 학생들 때문에 작은 소란이 일었었다.
하지만 오늘 가을비는 처량하기도 하거니와, 그는 경묘에서 도망쳐 온 터였다. 그리고 얼굴은 약간 창백해져 있고 팔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우산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에 옷이 젖어 범한은 얼핏 보기에도 좀 낭패에 빠진 사람 같았다. 이제 범한은 관직과 작위마저 모두 잃어 그야말로 할 일 없는 평민이었다. 더군다나 온 경도가 알다시피, 황제 폐하는 얼마 전까지 위풍당당하던 이 젊은이를 가택 연금시켜 놓고 그 누구를 만나지도 또 도움을 받지도 못하도록 해 놓은 터였다.
고작 수개월 지났을 뿐이건만. 범한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우산을 받쳐 들고는 무슨 이야기들을 할지 모를 태학 학생들 곁을 지나 태학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비 내리는 태학은 유난히 아름답고 고즈넉했다. 키 큰 고목들은 돌길 양측에서 오래된 가지들을 뻗어 빗속을 뛰어가는 선비들을 위해 잠시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이동하는 내내 본 나무들은 단풍이 들기보다는 아직 봄날의 파릇파릇함을 더 머금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 시간을 알리는 학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음을 맑게 만들어주는 소리였다.
이에 범한은 경묘 고행자들이 쫓아오고 있다는 걱정은 더는 하지 않았다. 수백 명의 태학 학생들에게 에워싸여 발각되기 힘든 건 차치하고, 태학이 본디 신성하고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기꺼이 자기희생을 하는 고행자들은 태학 학생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살하듯 살인을 자행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범한은 우산을 받쳐 들고 한참을 걸은 후에야 비교적 조용한 교습소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런 후 습관처럼 긴 복도를 돌아 작은 원(院)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세워진 벽 뒤로 간 후에야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태학에 마련된 범한의 숙소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범한이 뽑아 올린 몇몇 교수와 재능이 출중한 학생들이 서적의 편수(編修)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장묵한 선생이 범한에게 준 마차 한가득 들어 있던 서적도 바로 이곳에서 정리된 후 서산 지방(紙坊: 제지 공장)으로 보내져 출간되고, 최종적으로 범씨 가문의 담박서국에서 판매되었다.
서적 정리 작업은 몇 년간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에 담박 서국 역시 계속해서 밑지고 있었지만 범한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경도 반란 때 손빈아의 규방에서 서가를 보고 느꼈다시피, 그는 이게 의미가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당연히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범한은 차분하게 서서 건물 내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다행히도 황제 폐하는 자신은 민초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자신을 몇 년 동안 따른 태학 교수와 학생들은 연루시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서적 정리와 편수 작업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범한은 가슴팍에서 한 구석이 따뜻해져 와 방 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후 태학 교수들이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이 익숙한 방에서 떠났다. 범한은 태학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숲과 작은 언덕을 비스듬히 뚫고 나가 얕은 호수를 따라 또 다른 익숙한 정원으로 왔다.
이 정원에 있는 방들은 과거 서무 대학사가 수업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황명으로 경도로 돌아온 호 대학사가 이곳으로 밀고 들어와 버렸다. 이에 서무가 노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곳은 자연스레 호 대학사 전용으로 바뀌었다. 지난 번 범한이 호 대학사에게 도움을 구했던 일도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범한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깜짝 놀란 기색의 관원과 교수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로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알아서 서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줄곧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있던 호 대학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코에 걸치고 있던 수정 안경을 재빨리 벗고 신속히 엄숙한 표정을 내지었다. 경국 문관의 수령은 마음이 불편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내 신분이 있는데 대체 누가 연통도 넣지 않고 이렇게 곧장 쳐들어온 거지?’
하지만 호 대학사는 너무나도 의외의 얼굴을 보게 되어 어안이 벙벙해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대학사가 얼굴에 씁쓸한 기색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범한은 사실 호 대학사가 방 안에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동이성에서 한동안 바삐 지내다 보니, 조회와 문하 중서 회의가 열리는 시간을 잊고 있어 호 대학사가 태학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범한은 오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이왕 태학까지 온 거 자연스레 호 대학사를 찾아오게 된 거였다.
오늘 조정에서 범한과 사적으로 접촉을 하고도 황제 폐하에게 분노를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관원은 대략 이 호 대학사밖에 없었다.
“오늘 일이 좀 생겨 마음이 안 좋습니다. 하여 이야기를 좀 나누고자 대학사를 찾아뵈었습니다.”
범한이 말을 하면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우산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 호 대학사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손가락질을 했다. 그제야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 범한은 웃으며 우산을 문 뒤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 후 제멋대로 책상 위에 있는 따뜻한 찻잔을 집어 들고는 두어 모금 마셔 경묘에서 빗물에 젖은 몸을 덥혔다.
“어쩌다 이리 불쌍한 꼴이 되셨습니까?”
축축하게 젖은 범한이 차를 빼앗아 마시는 모습에 호 대학사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웃음을 바로 거두어 들였다. 오늘 그리고 바로 지금 자신이 한 농담이 다른 뜻으로 비춰질 수도 있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범한이 자연스레 그 말을 받아쳤다.
“지금은 일개 민초일 뿐입니다. 하여 대학사님의 따끈한 차를 마시게 되었으니, 당연히 이 순간을 귀히 여겨야겠지요.”
범한의 말에 조용하던 방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더는 대꾸를 않고 각자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특히나 호 대학사는 범한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해 부득이하게 신중을 기했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심사숙고했다.
한참 후 범한을 지켜보고 있던 호 대학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으로 오늘 이렇게 나와 돌아다니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범한이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짓고는 살짝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황궁에서 저를 구금하란 명이 내려올까요?”
호 대학사가 웃기 시작하자 범한이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없는 거면 제가 왜 나와 돌아다닐 수 없단 말입니까? 특히나 황제 폐하께서 저의 모든 직책을 빼앗기는 하셨으나 그래도 희한하게도 품계도 등급도 없는 태학 교수 자리는 남겨주셨습니다. 하여 오늘 제가 태학까지 온 건 황제 폐하의 뜻을 세심하게 살피고, 이 민초에게는 원망 따위 없다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이것 자체가 원망 섞인 말이었다. 그래서 만약 일반 관원이 호 대학사 면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호 대학사는 분명 즉각 엄히 훈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 앞에서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늘 이 대화의 분위기와 지난 번 봄비가 내리던 날 나누었던 대화는 완전히 다른 거였다. 필경 그때의 범한은 거침없이 말하기는 했어도 그건 황제 폐하께 윤허를 받은 기탄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호 대학사도 맞장구를 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던 거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범한에게 허락했던 걸 모두 거둬들인 상태였다. 이에 호 대학사는 유난히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 대학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범한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대인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하나 어제 입궁했을 때 황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며 범씨 가문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요. 그때 폐하께서는 딱 하나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범한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궁금해 죽겠다는 속마음과는 달리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안지 그 아이는 다 좋은데, 성정이 좀 직설적이고 고집스럽고 사나워서…….”
호 대학사가 범한을 쓱 보고는 그의 손에서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살짝 몸을 굽힌 상태에서 옆에 놓인 작은 화로로 다가가 찻잔에 차를 채워 넣었다.
호 대학사가 범한을 등진 채 곧고 담담한 어조로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직설적이고 고집스럽고 사납다고 말씀하신 건, 황제 폐하께서 대인을 이해하고 계시고 또 자상하게 살피고 계시다는 뜻이지요. 아무리 큰 단점도 이 표현으로 씻어 낼 수 있는 것이고요. 성정이란 단어를 쓰셨는데, 그건 기질과는 다른 것으로…… 하여 황제 폐하의 고충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고충이라고? 범한이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지극히 냉담하면서도 멋져 보였다. 물론 범한은 호 대학사가 담담히 늘어놓은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황궁에 있는 그 남자가 자신의 사생아에게 기대감 3할, 용인 3할 정도의 감정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4할에 안에 분노와 두려움은 각각 얼마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건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거였다.
호 대학사가 몸을 돌리고 찻잔을 범한 앞에 놔주었다. 그리고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직설적이고 고집스럽고 사나운 성정을 지닌 사람이라니. 이는 황제 폐하께서 대인과 같은 진실한 성정을 지닌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뜻이에요. 요 며칠 동안 저지른 잘못의 경우, 황제 폐하께서는 용서해주실 수 없어서 그런 건 아니랍니다. 하나 지금 가장 관건은 대인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야 해요. 더군다나 황제 폐하께서 대인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시도록 해야 합니다.”
범한은 잠자코 의자에 앉았다. 호 대학사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잘못 짚고 있었다. 이건 단지 두 사람이 예전처럼 대놓고 화제를 꺼낼 수 없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호 대학사의 말에 반박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대신 무의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천천히 말할 뿐이었다.
“제가 뭘 잘못 한 거죠?”
“뭔지 잘 아실 텐데요.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실 필요가 있습니다.”
호 대학사가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짝 초조해하며 말을 이어 갔다.
“최근 십여 일 동안 대인께서 한 일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운신도 못하게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을 일입니다. 흑기가 각 주군을 경유한 일을 두고 문하 중서에 대인의 죄를 고하는 상주문이 눈발처럼 날리고 있어요.”
“거기 계신 관원들께서 아직 모르시나 본데,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죄를 물으셨습니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언제 죄를 물으셨다고 그럽니까?”
호 대학사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이에 그가 매일 바르는 피부 보호제로는 그의 이마에 생긴 깊은 주름을 감추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호 대학사가 살짝 실망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만약 경국 법률에 따라 제대로 죄를 묻는다면, 대인께서 제아무리 형을 감면받을 수 있는 신분이라 할지라도 머리가 여러 번 떨어져 나가셨을 걸요? 또한 그 정도로 벌충이 될까요?”
호 대학사는 앞에서 잠자코 앉아 있는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속에서 화가 욱하고 밀려 올라와 소리를 죽여 꾸짖었다.
“설마 모르신다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너그러이 봐주셨어요. 만약 대인이 이렇게 계속 조정의 권위에 도전하고 황제 폐하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면…….”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범한이 호 대학사의 말허리를 좀 무뚝뚝하게 잘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