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화 신묘와 명분, 사람의 그림자 (1)
범한이 옷에 달린 비 가림용 모자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흩뿌려지는 빗물이 매끈한 검은 머리카락 위로 떨어져 천천히 흐르도록 내버려 두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 그대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네만, 그래도 이렇게나 광적인 부류일 줄이야. 하나 자네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의미를 나도 알기는 하지. 천하통일 때문이 아닌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불안과 전쟁의 불씨 속에서 백성들을 안락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대체 뭘 믿고 그 남자가 그대들의 바람을 완벽히 이뤄줄 거라, 신묘의 뜻을 집행해 줄 거라 믿는 것인가?”
범한이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러자 주변에 뭉쳐 있는 기운이 생물처럼 범한을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기운은 조금도 막힘없이 대단히 매끄럽게 움직였고, 범한이 이용할만한 틈 같은 것도 없었다. 범한이 눈썹을 살짝 씰룩였다. 고행자들이 연합해 실과 세를 하나로 합쳐 이리 강력한 힘으로 재탄생 시키다니, 정말 의외의 일이 일어난 거였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무뚝뚝해 보여도 속으로는 미쳐 있는 고행자들을 황제 폐하께서 경도로 들인 것일 수도.
이들 고행자의 포위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범한은 경묘로 발을 내딛는 순간 바로 대응에 나섰어야 했다. 이에 범한은 이미 기회도 잃고 견고한 포위망 속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고행자들의 역량을 얕잡아 본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큰 원인은 이들과 대화를 좀 해보고 싶어서였다. 대화를 통해 너무나도 알고 싶었던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경묘의 고행자들이 왜 경국 황제를 돕는 건지, 그동안 조정과 황궁에서 경묘를 쥐어짰는데 고행자들은 그걸 왜 없었던 일 취급하는지, 그리고…… 황제 폐하와 허공을 떠돈다는 신묘가 대체 무슨 관계인지에 대해 묻고 싶었던 거였다.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고행자들이 책상다리로 자세를 바꾸었다. 범한은 여전히 그들에게 둘러싸여 한가운데에 있었다. 고행자들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해 마치 외부 사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어쩌면 이들은 범한이 자신들에게 설득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강산을 통일한 경국이 다시 혼란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에 범한 앞에서 어떤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어느 고행자가 양손을 합장하는 소리였다. 눈썹에 곧 떨어질 듯 빗물이 맺혀 있는 고행자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 페하계서는 천계(天啓)를 받은 분이십니다. 하여 우리는 황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이로써 만민에게 복을 주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천계라고? 언제부터 말인가?”
범한이 뒷짐을 지고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늙은 수행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물었다. 범한이 보기에도 이들 고행자들의 나이가 적지 않아 보여서였다.
“수십 년 전이지요.”
범한 옆 뒤쪽 방향에서 소리가 울려왔다. 모호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대들에게 신묘의 뜻을 전달해준 사자가 있었는가?”
범한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고행자가 깔끔하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찜찜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신묘에서 인간 세상으로 순시하러 나오는 자가 있다는 건 이 대륙에서 최대 비밀 중 하나였다. 만약 범한이 오죽 곁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또한 소은과 진평평을 통해 그 비밀을 알게 되지 않았다면, 범한도 아까와 같은 질문은 던질 수 없었다. 그런데…… 고행자들은 범한의 입에서 사자란 단어가 나왔는데도 전혀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치 일찌감치 범한이 신묘의 비밀들을 알고 있다고 예측한 듯했다. 그래서 전혀 놀라지 않는 고행자들 때문에 오히려 범한이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 대제사가 죽고, 삼석도 죽고, 대동산에서 그대들의 동료도…… 모두 죽지 않았는가.”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악독한 조롱의 말투까지 가을비로 덮어버리지는 못했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대들은 왜 죽지 않았지?”
“황제 폐하께서 저희를 필요로 하셨기 때문이지요.”
“자네들 말을 들어보니, 자네들은 우리 청루에 있는 아가씨들과 비슷하군.”
* * *
비에 싸여 분위기가 묘한 경묘에서 범한은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주변에 앉아 그를 포위하고 있던 고행자들이 하나 씩 나서서 대답을 해주었다. 차분하고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대답을 했다. 이에 현장에 십여 명이 있었지만 마치 한 사람이 대답을 한 것만 같았다.
범한의 마음은 점점 차분해졌다. 이제 보니, 이 괴이한 고행자들은 장기간 힘든 수련으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경지까지 올라서 있던 거였다. 하지만 정작 범한을 오싹하게 만든 건, 신묘 사자에 관련한 정보였다.
신묘 사자가 최근에 한 차례 인간 세상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건 당연히 경력 5년에 있던 일이었다. 이 사자는 남쪽에서 해안선을 타고 올라왔으며, 그 사이 야수처럼 인류 사회의 풍속과 습속을 막연하게 익혔다.
하지만 그는 경국 남쪽에서 인간의 습속을 익히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건 어쩌면 그가 생명에 대해 습관적으로 냉담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이거나, 또 어쩌면 자신의 존재에 관한 소식을 가리기 위해 한 행동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형부 13관아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도 이 신비한 사자의 옷자락 근처에도 가지 못했었다.
당시 경국 조정에서는 그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해 절정의 무공 실력을 지닌 흉악범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에 훗날 형부에서는 감찰원에 도움을 청했고, 언빙운은 중요한 사안이라 여겨 범한에게 호위(虎衛)를 빌려 달라 부탁했었다.
하지만 감찰원이 나서기도 전에 신묘 사자는 이미 경도의 범씨 가문 저택 근처까지 와 버렸다. 그리고 저택 옆으로 난 골목 내 국수 노점 옆에서 오죽에게 저지당했다.
무명옷을 입은 종사끼리의 싸움에서 신묘 사자는 죽어 버렸다. 그리고 오죽은 중상을 입은 후 자취를 감추고 대동산에서 수년 동안 상처를 치료했다. 당시 신묘 사자의 유해는 불태워졌는데, 그 장소가 바로…… 경묘였다.
범한의 눈빛이 빗물 장막을 뚫고 경묘 뒤쪽에 자리 잡은 황량한 평지로 향했다. 범한의 눈빛은 살짝 싸늘했다. 그때 황제 폐하와 대제사가 불구덩이 안에 있는 신묘 사자를 지켜보고 있는 광경이 떠올라 순간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경묘 대제사는 경국 남쪽의 습지 지역과 황무지를 돌며 도를 전파하다가 신묘 사자가 경도로 오기 얼마 전에 경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사자가 불에 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병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게 우연이라고?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범한은 믿지 않았다. 오죽 아저씨가 다친 일, 신묘 사자가 세상에 내려온 일과 관련해 범한은 모두 시일이 한참 지난 후 알게 되었고, 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조사한 끝에 희미하게나마 여기까지 알아낸 거였다. 그런데 적어도 그 일로 증명된 건 있었다. 바로 황제 폐하가 경묘 대제사를 통해 신묘에서 온 사자와 모종의 협의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경력 5년, 황제 폐하는 신묘 사자와 오죽을 동시에 없애버리기 위해 자신의 사생아를 미끼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또한 범한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대제사를…… 반드시 죽여야 했던 거였다.
범한이 시선을 거둬들이고 앞에 있는 고행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천계(天啓)란 단어가 떠올랐다. 천계란 신묘 사자가 전달해주는 의지를 뜻했다. 그렇다면 그 사자는 분명 22년 전에 경국에 왔던 자와 동일인인 거였다.
지금 보니, 그 사자는 오죽 아저씨를 경도로부터 떨어뜨려 놨을 뿐만 아니라 실체가 없는 신묘를 대표해 황제와 모종의 협력까지 한 거였다.
황제와 신묘가 협력했다고?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협력은 섭경미를 죽이는 거였고, 두 번째 협력은 하마터면 오죽 아저씨를 죽이는 거였으니……. 그렇다면 딱 하나 빼고 모든 게 명확해졌다. 명의상으로만 인간세상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묘가 왜 인간계에서 이와 같은 선택을 하느냐는 거였다.
지금 경묘에서 범한을 에워싸고 있는 고행자들은 나이가 지긋이 먹은 노인들이었다. 20년 전, 그들은 이미 신묘의 의지를 안 거였다. 그래서 미친 듯이 기쁜 나머지 경국 황제가 이룰 업적을 위해 누구보다 충성심을 보이며 합류한 걸 테고 말이다. 그리고 20년 동안 민간을 떠돌며 ‘반드시 선을 행하라’는 교화의 말을 전파하며, 주먹밥 한 덩어리와 물 한 바가지로 버티는 고행을 하면서도 나름 안락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분명 황제 폐하를 위한 밀정 노릇도 했겠지.
이제 동이성도 정복하고, 내란은 평정했고, 진평평은 죽고 없었다. 그러니 비바람은 순하고, 민심도 순하니 절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경국의 국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므로 범한만 빼면, 경국 황제의 천하통일의 발걸음을 잡고 늘어지는 이는 없는 거였다. 이에 고행자들이 경도로 돌아와 그 빛나는 순간을 맞을 준비를 한 거였다.
그래서 고행자들이 그 위대한 일을 위해 범한에게 사사로운 복수심은 잊고, 또 천하 공공의 의(義)를 위해 개인의 슬픔 따위는 잊으라고 설득한 거였다.
* * *
범한은 빗물 속에서 고독하게 서 있었다. 비록 가랑비이기는 했지만, 빗물에 그의 옷은 점점 축축하게 젖어만 갔다. 이들 고행자들은 20년 전 그들이 한 행동과 경국 역사 뒤에 숨은 비밀을 범한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모두 성심을 다해 범한을 설득하고 싶어서였다. 신묘의 의지로 민심을 순하게 만들고, 대세를 따르게 함으로써 범한에게 황제 폐하와 척을 지지 말라고 설득한 거였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는 하늘이 선택한 명군이고, 세상의 공동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전부 허튼소리뿐이군.”
범한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힘겹게 간청하고 있는 주변 고행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단지 황제 폐하의 신하일 뿐……. 아니지. 지금은 일개 민초일 뿐이군. 천하 사람들이 봤을 때 나는 천하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늘. 그런데도 그대들은 나에게 입궁하라 압박하고, 또 흙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고만 하니, 너무 과하게 나오는 거 아니오?”
그러자 고행자들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들은 동료의 눈에서 신중함과 결심을 보았다. 당연히 범한의 말을 믿고 있지 않는 거였다. 이에 그중 한 사람이 범한에게 간청했다.
“공자님이……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