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화 비 내리는 경묘에서 (2)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여 옷에 달린 모자로 가랑비를 가리고는 황궁을 말없이 바라본 후 자리를 떴다. 이곳은 원래 경비가 삼엄해 거리에 행인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하늘을 저주하고 욕하는 소리는 들려왔다. 분명 지긋지긋하게 내리던 가을비가 고작 이틀 간 쉬었다가 다시 내리자 경도 사람들도 불만이 컸던 거였다.
하지만 불만스러웠던 것도 익숙해지면 둔감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 가을비는 크게 내리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군말 없이 저택을 향해 걸어갔고, 그 모습은 마치 억지로 감옥으로 들어가는 죄수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건 모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걸어가면서 황궁에 계신 저분과 자신을 두고 전 방위적으로 비교를 해보았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베옷의 고행자들을 떠올렸다.
진평평이 경도로 돌아오고 감옥에 갇히고, 또 범한이 사형장에 난입하고. 베옷을 입고 삿갓을 쓴 고행자들이 갑자기 황궁, 감찰원, 사형장에 나타나고. 이들 고행자의 실력은 대단하기는 했지만 범한을 겁먹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무언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더군다나 그 고행자들 때문에 범한은 허공을 떠돈다는, 하지만 자신은 실존하는 걸 알고 있는 그것이, 즉 신묘가 떠올랐다.
경국은 줄곧 신묘에 대해 경원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래서 경묘는 북제의 천일도처럼 관료 사회와 민생에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특히나 강대한 황제 폐하가 등장한 후 경국인의 삶에서 경묘의 지위는 급전직하 한 것은 물론 철저히 부속품화 장식품화 되었다. 이에 천하에 흩어져 있으면서 그 수도 얼마 되지 않는 경묘 고행자는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였다.
그런 잊힌 사람들이 왜 지금 경도에 나타난 걸까? 그것도 황제 폐하 곁에 말이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이미 경묘를 완전히 통제하고 계시다는 뜻인까? 하지만 경묘 대제사의 죽음은 수상쩍었고, 2 제사인 삼석 대사의 죽음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대동산에 있는 경묘 제사의 대부분은 황제 폐하의 분노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왜 경묘 고행자들이 철저하게 황제 폐하에게 기울은 거지?
설마 과거 진평평이 한 말이 맞단 말인가? 진평평이 조심스레 추측한 것처럼…… 과거에 황제 폐하가 정말로 신묘의 의지와 접촉한 적 있는 것일까? 그래서 고행자들이 과거 원한 따위는 잊고 황제 폐하 곁에 서서 그가 빛날 수 있도록 돕는 건가?
비는 더 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지간 연(緣)이란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부슬비를 맞으며 생각에 젖어 있던 범한이 정신을 차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묘였다.
온통 거무튀튀한 가운데 은근히 푸른 처마가 보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아 흙먼지가 일지 않는 황량하고 고요한 거리. 이곳에 네모난 긴 담벼락에 둘러싸인 그리고 안에 원형의 탑이 차분하게 서 있는 경묘가 있었다.
범한은 청정하고 수려한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심경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경묘는 그가 황제 폐하와 처음으로 스친 곳이고, 닭다리를 뜯는 낭자를 만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저 처마 밑에 그려져 있는 괴상한 벽화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봤었다. 하지만 범한이 제대로 알고 싶었던 것 중 밝혀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이에 범한은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했지만, 그의 무의식은 어느새 계단을 올라가 거의 닫혀 있는 법이 없는 경묘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범한은 천천히 경묘 안을 걸었다. 그러자 요 며칠간 그를 감쌌던 피곤함과 원한이 기묘하게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게 경묘 자체가 지닌 신묘한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조용한 공간에 와 있다 보니 생각하는 게 귀찮아져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경묘 뒤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범한의 형체가 순간 멈칫했다. 뒤쪽에 있는 낮은 건물 문 앞에서 베옷을 입고 삿갓을 쓴 고행자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범한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행자가 범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찬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합장을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을 향해 탄식했다.
“하늘의 뜻이라면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법. 범 공자, 우리는 줄곧 당신을 찾고 있었지요. 한데 이리 직접 오시다니,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들켰지만 범한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고행자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들이? 왜 나를 찾았는가?”
고행자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방울을 가볍게 울렸다. 그러자 맑고 예리한 방울 소리가 가는 빗속으로 재빨리 파고들어 온 경묘로 퍼져나갔다. 범한이 처음 경묘에 왔을 때처럼, 이 사당에서는 향이 피워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각 주군에서 온 여행객들을 빼면 이곳을 굳이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에 오늘도 경묘는 여전히 고요하고 차분해, 맑은 방울 소리로는 다른 어떤 이상한 움직임을 야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건…… 십여 명의 고행자를 불러들이기에는 충분했다.
같은 양식의 베옷을 입고 비슷한 모양의 낡은 삿갓을 쓴 고행자들이 경묘 내 사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원형의 탑 아래쪽에서 범한을 정중앙에 놓고 몰려들었다.
범한이 천천히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체내 두 개의 길에서 운행을 멈춘 적이 없는 정기를 천천히 흐르도록 했다. 그리고 앞서 말을 한 고행자를 냉담하게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 사당은 줄곧 조용했네. 하여 자네들은 천하나 떠돌며 도나 전파할 것이지, 무엇 하러 돌아와 이곳의 고요함을 깨뜨리려는 것인가?”
“범 공자는 마음이 인자하고 후덕하며, 하늘의 덕을 깊이 깨달은 분입니다. 하여 강남에서 항주회를 열고, 천하의 재화를 모아 강 제방 공사에 사용하셨지요. 공자님의 어진 명성에 대해 익히 들었고, 또한 공자님의 은덕을 익히 보아온 지라 언젠가는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말을 마친 고행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범한을 계속 범 대인이 아닌 범 공자라 불렀다. 그건 황제 폐하가 범한을 삭탈관직한 걸 온 경도가 알고 있어서였다.
“일방적으로 내 칭찬을 하러 온 건 아닐 테지.”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이맛살을 아주 살짝 찌푸렸다. 그냥 순간 마음이 동해 신묘 구경을 하러 들어왔을 뿐인데, 이 괴상한 자들과 맞닥뜨리다니. 설마 아까 그 고행자의 말처럼 어딘가 모르는 곳에 정말로 하늘의 뜻이란 게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괴상한 고행자들은 정말로 범한을 칭송하기 위해 몰려든 거였다. 이에 삿갓을 벗고 정중앙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는 진심을 담아 범한의 복을 빌어 주었다. 범한은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놀란 상태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과 복을 빌어 주는 소리가 한데 엉켜 분위기가 정말 괴상해져서였다.
고행자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다. 그래서 거칠어진 양 발은 빗물 속에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일제히 축축한 땅에 꿇어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청개구리가 몰려든 것처럼 웃겼다. 하지만 그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과 그들이 한 말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 강력한 기운은 이 고행자 십여 명의 실과 세가 조화롭게 통일되어 형성된 거였고, 순수하고 바른 느낌 때문에 감히 얕볼 수 없었다.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간절함이 담긴 말이 빗속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빗물을 맞아 반들반들 한 십여 개의 대머리는 정말 봐주기 힘들었다.
“저희가 천하 창생을 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범 공자께서는 부디 입궁해 사죄하여, 황제 폐하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지요.”
순간 이들 고행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게 된 범한이 낯빛이 살짝 하얗게 질려버렸다. 경국 황제와 범한이라는 군신이자 부자 관계에 있는 이들이 서로 틀어져 이레 동안 신경전을 펼치며 어느 한쪽도 물러서겠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천하 창생을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잘못을 인정해야 했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경국에서 빛나야 할 우두머리는 딱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이 고행자들이 봤을 때 그건 당연히 위대한 경국 황제였다.
고행자들은 현시점에서 경국의 최대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거였다. 이들이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 대신해 범한을 설득하기로 결정한 거였다. 이들 마음속에서, 더 나아가 천하 만민의 마음속에서는 범한이 황제 폐하의 빛 속으로 되돌아가야 경국과 천하가 아름다운 장래를 맞이할 거라 보는 거였다.
“내가 싫다면?”
범한이 이들 생면부지 고행자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현장에는 순간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고, 부슬비만 고행자들의 대머리 위로 쉼 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처마 위에 고인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경묘 청석판 위로도 빗물이 떨어졌다. 한참 후 십여 개의 굵고 가는, 또 크고 작은, 하지만 굳세기 그지없는 깨끗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면 천하 창생을 위해 부디 편히 쉬시지요.”
빗속에서 이 말을 들은 범한은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장된 웃음은 아니었다. 모자 밖으로 반쯤 드러난 얼굴에서는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고 그 안에는 황당함과 무시하는 태도가 살짝 섞여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그의 진심이 투영된 반응이었다. 비 내리는 경묘에서 이들 고행자들과 맞닥뜨린 것도 모자라 이들이 너무나도 괴이한 기질을 드러내보였기 때문이다.
신묘는 뭘까? 천하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었지만, 지금 하늘에 떠 있다는 신묘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은 소은의 임종을 지켜본 범한뿐이었다. 환생을 한 후 범한은 이 질문에 대해 여러 차례 답을 구했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들춰보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서 신묘를 받드는 제사(祭祀)는 고행자 내지는 수도자였다. 범한은 이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들 중 제일 유명한 이는 바로 북제 국사이자 천일도 장문인 고하 대사였다. 하지만 고하 대사도 본인이 신묘의 의지를 받들어 창생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고행자들이 너무나도 진지한 모습으로 천하 창생을 위해서라며 지극히 결연하게 말하자 범한은 절로 냉소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편히 쉬어야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말이네.”
범한이 입가의 웃음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고행자들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물었다.
“세상에 정말로 신이 계시다면, 그분의 눈에 비친 중생은 분명 평등할 것이야. 그런데 그대들은 왜 나에게만 그러는가? 설마 신묘를 받드는 고행자들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쥐새끼 떼라 그러는가?”
범한이 날린 조소는 이들 고행자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차분하게 범한 옆에 꿇어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절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하나로 합친 순수한 기운으로 둥그런 공간 안에 범한을 견고하게 가둬놓은 상태였다.
“나에게 입궁해 사죄하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네. 다만 나에게는 해명이 필요할 뿐. 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