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7화 이레 (2)
사람의 감정은 원래 이렇게 이상한 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호성을 내질렀을지 몰라도, 다음 순간에는 침묵하는 게 사람의 감정이다. 이는 수천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형장에서 사라져갈 때 수도 없이 반복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정말로 별 볼 일 없어진 범한이 여전히 민간에서 적잖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동안 범한이 보여준 행동 때문이었다. 그건 범한이 한 일들을 일일이 꺼내 계산해 전체적인 역량을 도출해 볼 필요도 없었다. 또한 과거에 진평평이 감찰원 8처를 이용해 범한을 위해 한 수많은 일들을 일일이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수십 년 전 경국의 정예 기마병을 이끌고 낡은 조정과 강산을 누비며 무수히 넓은 강토를 확보한 황제 폐하 이후 범한은 경국에서 유일하게 우상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략 봐도 그럴만한 건 범한 하나 뿐이었다.
만약 범한이 강남에 있었다면, 그는 민간의 지지를 더 많이 얻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범한이 가장 오랫동안 무언가를 한 곳이 강남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임완아가 세운 항주회는 몇 년 동안 민중을 살피는 데 피 같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항주회는 일찌감치 명씨 가문을 대체하는 것은 물론 강남의 빈곤한 백성들과 선비들에게는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범한은 경도에 있었다. 하여 황성 근처에 사는 백성들은 범한에게 기울어 있기는 해도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은 결국에는 범한과 황제 폐하 두 사람 간의 전쟁인 거였다. 그것도 어서방에서의 그 전쟁처럼 말이다.
* * *
이레가 지난 후에도 모든 게 그대로니 천하가 태평할 리 없었다. 범한의 집에서는 여전히 가을바람이 씽씽 불고 간간히 비도 뿌렸다. 하지만 범한이 살신 처럼 궁정에서 파견한 감시자들을 깨끗이 해치워버리는 게 일이자 그들도 하는 수 없이 감시망을 더 넓고 성글게 짤 수밖에 없었다.
황권이 지닌 위엄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높은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에 못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양쪽에서 밀려드는 공격에 궁정 감시도 결국에는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찬바람이 쌩쌩도는 모습으로 차분하게 문 앞에 서서 주변 동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완아가 그날 한 말이 떠올라 눈동자에 평소와 다른 감정을 잠시 반짝였다.
심사가 뒤틀려 공개적으로 반항하고 있는 범한에게 황제 아버지가 제대로 대응하려 했다면, 실은 더 많은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사용하지 않은 걸까? 그리고 이번에 궁정의 감시자들이 바깥쪽으로 이동한 건, 황제 폐하가 개구쟁이 아들의 수단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일까, 아니면 암암리에 다른 명을 내렸기 때문일까? 저 감시자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 텐데…….
범한은 이해가 좀 안 되기도 했거니와 굳이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대신 어쩌면 황궁에 있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아직 온정이 남아 있거나, 또 기대하는 게 있어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온정과 기대란 것에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범한은 가을비 속에서 일찌감치 마음을 싸늘하게 식혀 놓은 터였다.
범한이 뒤로 돌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소를 나르는 마차가 저택 옆쪽 골목에서 돌아 측문으로 들어갔다. 물론 마차는 측문 밖에서 엄격한 조사를 받았고, 배추 속이며 무 하나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조사를 거쳐야만 했다.
조사를 맡은 건 모두 신분을 밝힌 관원들이었다. 이들은 범씨 가문 저택 주변에 흩어져 있는 궁정 감시자와는 다른 사람들이라 범한은 이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금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이들 관원이 아닌 저 감시자들만 조심하면 되어서였다.
채소를 날라다 주는 마차에 아무 이상이 없자 관원들이 손을 흔들어 마차를 저택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측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주방에서 여종들이 나와 주방 근처까지 온 마차에서 채소며 과일을 가져갔다.
황명은 명확했다. 범씨 가문 저택 내 사람은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에서도 들어가려면 어렵게 하라는 거였다. 그러므로 마차도 등시구 검소사에서 직접 파견 보낸 거라는 건 애당초 조정의 감시를 받고 이동했다는 뜻이니, 자연스레 범씨 가문 저택에서나 감찰원 관원이 본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마차에 타고 있던 마부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때에 아무도 모르게 주방을 지나 후원으로 갔다. 그런 후 마중 나온 저택 내 늙은 종을 따라 곧장 조용한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로 들어선 마부는 범한 말고도 여인이 한 명 더 있자 그녀가 원장 대인의 부인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이에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삿갓을 벗고 꿇어앉아 인사부터 했다.
“원장 대인을 뵈옵니다.”
마부가 삿갓을 벗자 임완아가 깜짝 놀라 입을 가리고 말했다.
“정말 닮았군요.”
그러자 마부는 난처해 감히 대꾸는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요 며칠 저택 밖 감시가 삼엄합니다. 하여 모두들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자는 우리 계년조의 간장입니다. 과거 북제에서 나를 정말로 크게 도와주었지요.”
범한이 온화하게 아내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범한을 빼닮은 감찰원 관원은 줄곧 계년조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봉쇄된 지 이레가 지난 후 계년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접선을 하기 위해 온 게 간장이란 건 범한으로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섣불리 행동 않는 게 제일 잘한 것이네.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거든.”
범한이 부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는 범한이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최고로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도 쉼 없이 주입한 신조였다. 그래서 자기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기에 왕계년도 그렇게 한 거였고, 고달도 그렇게 한 거였다.
“바깥 감시망이 조금 느슨해졌으니 오늘은 한 번 나가봐야겠군.”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인, 너무 위험합니다.”
간장이 진지하게 간언했다. 그는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저택 안까지 들어왔으니, 무슨 말이든 자신이 직접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 되겠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중요한 말이라 반드시 매 사람의 귓가에 대고 직접 말해줘야 해서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기면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어서였다. 이에 범한은 문득 왕계년이 지금 곁에 있다면 뭐든 많은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왕 씨 정도의 능력이면 감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범씨 가문 저택으로 숨어드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채소를 운반한 마차는 검소사 것인데, 어찌 들어왔는가?”
문득 이 문제가 마음에 걸리자 범한이 살짝 굳은 눈빛으로 걱정을 드러냈다.
“대진이 검소사로 돌아왔습니다.”
관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범한도 웃기 시작했다. 대 태감이 성지를 낭독하는 수령 태감 자리에 돌아오자 그의 조카도 재깍 검소사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거였다. 감찰원은 과거 대씨 가문의 두 사람을 혼내주면서 몇몇 구실거리를 남겨두었는데, 이번에 그걸 이용한 덕에 일이 수월하게 풀린 거였다.
* * *
가을날의 경도 하늘을 맑고 넓고 광활했다. 하지만 납덩이처럼 축 처진 구름이 빗물을 뿌리자 주변 경치가 흐릿해지면서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범씨 가문 저택이 황궁에 이레 동안 강력히 맞서자, 특히나 작은 범 대인이 연속 이레 동안 저택 밖 감시자들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소탕하자 궁정에서 보낸 대부분의 감시자들도 결국에는 마음이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이는 모두 그들이 동료들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흘러가는 꼴을 보니,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의 사생아를 잡아다 하옥해 동료들의 복수를 해줄 리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씨 가문 저택 밖 감시망이 부지불식간에 느슨해지고. 누군가에게 이용될만한 구멍이 생긴 거였다. 그리고 그 덕에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던 검소사 마차가 그 구멍을 뚫고 나간 거였다.
* * *
경도 어느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허름한 골목에는 크지 않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 어느 골목 끝에는 작은 집이 아늑하게 들어서 있었다. 바깥쪽 거리에서 먹을 것을 사라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지만,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이 작은 집이 무슨 용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가 얼굴에 묻은 위장용 화장을 닦아낼 무렵, 범한이 작은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곳에는 범한에게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고 그들 얼굴에서는 기쁨, 그리고 기쁨 후의 암담함이 차례대로 보였다. 이에 범한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살짝 감동하고 말았다.
이곳은 계년조의 가장 은밀한 비밀 가옥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감찰원 관원들은 일찌감치 범한에게 충성하고 있는 부하였다. 이들 계년조 구성원은 경도에서 이상기류가 흐르자, 특히나 감찰원 내부에서 미묘한 징조가 나타나자 조용하고 차분하게 자신들의 위치에서 떠났다. 그리고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이 작은 비밀 가옥으로 돌아와 범한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이 집은 여러 해 전 계년조에 범한과 왕계년이란 젊은이와 늙은이만 있을 때 왕계년이 소액의 은전을 들여 사둔 곳이었다.
계년조 구성원은 범한에게는 눈과 수족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천하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조력자들에게 찾아가서 이들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범한은 어떻게든 충성스러운 그의 눈과 수족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범한이 그리 많이 신경을 쓰고, 정력을 쏟아붓고, 또 직접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이 작은 집에 남아 있던 계년조 구성원들은 서로 과하게 안부 인사를 묻지도, 과하게 근황을 묻지도, 과하게 분노와 비애를 표출하지도 않았다. 일단 차분하게 범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자신들이 파악한 감찰원 내부 상황부터 최단 시간 안에 보고했다. 이레가 지나는 동안 감찰원 밖을 지키고 서 있는 추밀원 군측 인사와 군사들은 이미 많은 수가 철수 하고 없었다. 그리고 황명의 압박과 언빙운의 동조로 감찰원 내부를 청소하고 물갈이를 하는 작업이 지극히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단히 중요하고 민감한 정보들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에 있는 계년조 구성원들은 애당초 유능한 관리였던지라 이레 동안 저택에 감금되어 있는 범한을 대신해 깊이 파고 들어가 적지 않은 정보들을 알아내고야 만 거였다.
범한은 조용히 경청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평평 사후 자신이 원장 자리에서 파직되고, 황제 폐하가 감찰원의 물갈이 및 보충 작업을 실시하리란 건 모두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언빙운이 폐하를 돕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군왕의 위엄까지 더해졌으니, 머리 없는 용이 된 감찰원에서는 그 누구도 현 추세를 강제로 되돌릴 수 없었다.
“비록 이 집을 언빙운이 모르고 있기는 하나, 그가 그동안 대인을 지근거리에서 따라 저희로서는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계년조 구성원 중 하나가 범한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경도 내부에 새로운 집합 장소를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원이 대놓고 언빙운이라고 말한 건 분명 그를 향해 더는 존경심이 일지 않아서일 것이다. 언빙운은 계년조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범한의 수족으로 또 감찰원의 고위 관리로 있으면서 계년조로부터 변함없는 존경을 받아오던 터였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감찰원에 한 행동 때문에 감찰원 관원들은 모두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언빙운은 범한의 측근이었지만, 범한은 그를 단 한 번도 온전히 신뢰한 적 없었다. 왜냐하면 모략에 뛰어난 작은 언 공자는…… 독립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범한이 잠시 침묵 하다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하지만 계년조 부하의 말에 의견을 표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집합 장소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범한은 아직 언빙운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가 감찰원에 남아 있다가 화병이 나 죽지는 않을까 은근히 걱정까지 해주고 있었다. 둘째, 오늘 만남 후 계년조 구성원들은 경도에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그러니 왕계년이 은자 120냥을 들여 산 이 작은 집은 곧 황폐해질 터이니,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