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4화 삭탈관직 (1)
범한에게 그것은 위험 신호였다. 황제 폐하가 감찰원 청소를 시작했다는 위험 신호였다. 그래서 범한도 행동에 나선 거였다. 그런데 그는 가치 없는 권세를 이용하지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부하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범씨 가문 저택의 높은 문지방을 직접 밟고 나가 등에 있던 싸늘한 장검을 뽑아 들고 한밤중에 동네 한 바퀴 산책하듯 열네 명을 제거해 버렸다.
저택 정문에는 등불이 높이 달려 있었고, 성 남쪽에 길게 뻗은 거리에는 횃불이 켜져 있어 마치 대낮 같이 밝았다. 몇몇 관원이 거리와 골목 곳곳에서 끌고 나온 피 묻은 시체를 바라보다가 오싹한 기분에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작은 범 대인이 상식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 아님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왜 작은 범 대인은 황제 폐하께 진노를 사 감옥으로 잡혀 들어갈 위험까지 무릅쓴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나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살인을 한 거지? 이 두 가지는 관원들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었다.
그렇다. 관원들도 알다시피, 마차 안에 쌓여 있는 시체들은 모두 황궁 및 자신들의 관아에서 파견한 유능한 염탐꾼이었고, 이들이 감시한 대상은 범씨 가문 저택에 있는 작은 공작 어르신이었다. 그러니 작은 공작 어르신이 분노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이리 잔혹하고 폭력적인 살인이라니!
궁정에서 감찰원까지, 또 형부까지……. 경부 조정의 각부 관아는 어쩌면 염탐꾼을 보내 자신들이 필요한 소식과 정보를 듣는 데 이미 익숙해졌을 수 있었다. 특히나 두 명의 두려운 존재가 경도 각 왕공대부와 대신의 저택에 얼마나 많은 밀정을 심어 뒀는지는 알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더욱이 감찰원은 이런 일에 있어서는 노련하지 않던가. 소문으로는 1처에서는 6품 이상이 되는 모든 경도 관원의 저택에 첩자를 심어둘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첩자에 관한 건 경도 관료 사회에서는 비밀 축에도 안 들었고, 관원들은 이미 이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관원들은 무언가 수상쩍은 일로 저택 내부에서 황궁 또는 감찰원 소속의 간자를 발견해도 모른 척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계속 모른 척 하기 힘들면 일단 잘 대우해주다가 나중에 그들에게 몇 마디 일러주고는 대단히 공손하게 저택 밖으로 내보내 상대방의 관아로 돌려보내는 게 전부였다.
관원들은 밀정과 첩자들이 황제 폐하의 눈임을, 조정의 위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관원도 오늘 작은 범 대인처럼 냉혹하고 미친 듯이 첩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형부 부시랑이 난감한 기색의 손경수를 쓱 보고는 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을 건넸다.
“손 대인, 오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작은 공작 어르신께 가서 좀 여쭤주시지요.”
거리에서 살인을 한 건 이미 경국 법률에서 정한 죽을죄에 속했다. 그래서 범한이 제아무리 존귀한 신분에 형을 감면받을 자격을 지녀 사형은 면할지라도, 어느 정도 고생은 하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가 오늘 죽인 사람들은 조정에 소속되어 몰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불빛이 훤히 비추는 가운데 범한이 피 묻은 손을 씻고, 관원들 앞에서 피 묻은 옷을 갈아입었어도, 냉담하고 차분한 낯빛을 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그를 잡으러 달려들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관원 중 이 일을 관장할 수 있는 건 경도 부윤 손경수 뿐이었다. 더군다나 모두 알다시피, 손 부윤과 작은 공작 어르신은 친근한 사이였다. 몇 달 전 작은 공작 어르신은 손경수의 앞길을 위해 문하 중서의 하 대학사와 크게 싸워 그의 기를 팍 죽여 놓기까지 했다. 이에 모든 관원들의 시선이 손경수의 얼굴로 향했다.
손경수는 쓴 약을 먹기라도 한 듯 입이 썼다. 그는 동료들이 무얼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요 며칠 동료들보다 더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감찰원에서 큰일이 터지고, 진 노원장이 처참하게 능지처참을 당하는 날 작은 범 대인이 홀로 말을 타고 사형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그는 너무 놀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작은 범 대인이 이제 조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이대로 가라앉을지, 아니면 황제 폐하께 엄중 처벌을 당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만약 범한이 무너져 내려 권세를 잃는다면, 자연스레 손경수의 말로도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하루 종일 공황 상태에서 자신을 삭탈관직 한다는 황명이 오기만을 경도부에서 기다렸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 달리 황명은 오지 않고, 자신의 뒷배인 작은 범 대인만 또 다시 경천동지할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르고만 거였다.
손경수가 구부정한 자세로 저택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범한을 향해 몸을 깊이 숙여 정중하고 숙연하게 인사를 올린 후 자그마하게 몇 마디 물었다.
이때 범한은 피곤해서 등받이가 없는 긴 의자에 앉아 북위 천자의 검을 발 아래 쪽에 던져 놓고 있었다. 그리고 손경수가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놀라지 않고 싸늘한 얼굴로 짧게 대꾸해 주었다.
관원들은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터라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 손경수가 돌계단에서 아래로 내려오자 형부 시랑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작은 공작 어르신이 어찌 말씀하셨습니까? 이번 일은 예삿일이 아니에요. 거리에서 살인을 하셨어요. 태상사까지 시끄럽게 만들지라도 설명은 드려야겠지요.”
형부 13관아에게 출동해 범씨 가문 저택으로 들어가 사람을 잡아들이도록 해야 하지만, 이 시랑 대인은 그 정도로 박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국 법률은 지엄하고, 관원들은 모든 걸 지켜봤으니, 아무것도 못 본 척할 수만은 없는 터.
범한이 아까 손경수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경도 부윤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처럼 과하게 불안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경도 부윤이 차분한 낯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은 공작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최근 경도가 태평하지 않아 감찰원에서 조사를 하다가 몇몇 아낙이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걸 알아냈다 하십니다. 대인도 알다시피, 저택 안에 애기씨 두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여 자연스레 걱정이 인 작은 범 대인께서 진지를 잡수신 후 저택 밖으로 나와 길이며 골목을 한 바퀴 빙 둘러보셨답니다. 한데 딱 봐도 수상쩍고 눈에 거슬리는 자들이 몇몇 보여 몇 마디 물었더니, 아니, 저 개 같은 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흉기를 꺼내들고 작은 공작 어르신을 공격하더랍니다. 하여 저분 입장에서는 저 악인들을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던 것이지요.”
손경수의 말이 끝나자 정중앙에 있던 몇몇 관원이 찬 공기를 씁 하고 들이마셨다. 후안무치하고 악랄한 권력자와 귀족을 보기는 했지만, 이보다 더한 경우는 본 적 없던 거였다. 무려 14명 아닌가! 그리도 쉽게 죽여 버리다니. 더군다나 죽은 이 중 한 사람의 아내에게는 죄까지 뒤집어씌우고 말이다. 이런 식의 자기 방어는 일면 말이 되는 것 같아도, 작은 공작 어르신이 직접 아낙의 행방을 묻고 다니고 그 결과 14명이 죽었다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무도 안 믿을 이야기였다.
“본관은 당연히 믿지 않지요. 하나 본관에게도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작은 공작 어르신께 이런저런 질문에 대한 해명을 기록하기 위해 관아로 함께 가주십사 청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 이미 야심한 밤인지라 본관은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손경수가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옆에 있는 몇몇 동료들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각 대인들의 관아에서도 이번 일을 처리 권리가 있으실 겁니다. 하여 이번 안건을 맡고 싶으시다면, 원하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만…… 본관이 하나 일러드리지요. 죽은 자들은 황궁 내 사람들입니다. 하여 황궁에서 아무 말씀 없으시다면, 모두들 경거망동 않는 게 최선책입니다.”
정말 엉터리 같은 말이었다. 오늘 이 저택 앞에서 죽은 게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이번 일은 본디 황제 폐하와 작은 공작 어르신 간의 일이란 걸 모두들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 관원들이 제아무리 담이 커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사안이었다. 다만 작은 범 대인의 오늘 처사가 너무 과하기에 이 일은 곧장 황궁에도 전해야만 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이들 관원이 먼저 나서지 않는다면 황궁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볼지 모를 일인 거였다.
손경수는 말을 마친 후 경도부 아속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가급적 관심을 끄기로 했다. 앞서 범한과 짧게 몇 마디 나눈 게 그에게는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을 복용한 셈인 거였다. 비록 그 약의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작은 공작 어르신의 말대로라면, 그분이 죽지 않는 이상 손씨 가문도 무사한 거였다. 이에 손경수는 그렇게라도 말을 해준 범한을 봐서 더는 그를 원망하지 않고 모든 걸 운명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경도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범한이 의자에서 일어나 돌계단 아래에 있는 관원들을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 옆에 있던, 세인들에게는 진귀한 보물로 여겨지는 북위 천자의 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그런 후 물을 머금고 있는 대걸레를 들어 사자석상 머리를 대충 두어 번 ‘팍팍’ 소리를 내며 내리쳤다.
이와 같은 가식적인 행동은 죽고 싶어 환장한 뻔뻔한 개구쟁이나 할법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하필 작은 범 대인이란 자가 하자, 너무 이상해 보여 관원들의 낯빛이 변하고 말았다.
* * *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여종이 다가와 두툼하니 기장이 긴 옷을 건네주었다. 범한은 그제야 몸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아 옷깃을 꼭 여미며 뒤채로 걸어가며 되는대로 물었다.
“갈대 뿌리 달인 물은 아직이냐? 다 다려지걸랑 얼른 내게 가져다 다오.”
그러자 어린 여종이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는 자기 방으로 가 갈대 뿌리 다리는 불을 지켜보았다. 혼자 뒤채로 온 범한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 옆에 있는 아내 임완아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열네 명을 죽였으니 내일은 어쩌면 스물여덟 명이 올 거예요.”
“사실 그들은 조정 소속이라 황궁과 각부 관아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뿐이니, 너무 험한 일을…….”
임완아의 얼굴에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표정이 일었다.
“다시 말해, 상공이 씁쓸한 마음에 감옥에서 죽은 감찰원 부하들의 복수를 해주려 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게 불똥이 튀도록 하지는 말았어야죠.”
“완아는 모르는 게 있어요. 황제 폐하께서 나를 이 저택에 연금시키려 하세요. 하나 그분께서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나를 지켜보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섭중을 보내도 나와 외부와의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세요. 어떻게든 그 감시망을 찢어 놓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불에 올린 솥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청개구리만 될 뿐이거든요. 죽기 직전이 되었을 때야 내가 왜 죽게 되었는지 알게 될 거란 말이지요.”
범한의 미간에 누가 봐도 섬뜩한 한기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