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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82화 (982/1,108)

982화 꿈속 설산, 대야 속 핏물 (1)

정결하게 펼쳐진 순백의 대지 위. 하늘 아래 땅 위로 깊이도 양도 알 수 없는 눈이 몽글몽글 내리고 있었다.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설원의 끝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지평선 끝에는 눈으로 둘러싸인 봉오리 하나가 마치 보검을 하늘 위로 꽂아둔 것처럼 구름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하여 이 설산(雪山)은 누가 봐도 절로 감탄이 나왔고 두려움이 일어 감히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맨발로 눈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추위로 인한 통증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눈꽃송이의 촉감만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했던 범한이 실눈을 뜨고 전방에 보이는 높은 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산 절벽의 빙설에서 반사된 빛 때문에 두 눈만 찌를 듯 아플 뿐이었다.

눈구름 위로 마치 아홉 개의 태양이 있기라도 한 듯 하늘과 땅이 모두 밝았다. 그리고 범한은 자신이 이 설원에서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다. 닷새째인가? 아니면 엿새? 그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데 하늘도 단 한 번도 어두워진 적이 없었다. 마치 이 이상한 지역에는 낮과 밤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 맨 처음에는 계속 밤만 지속되었었는데. 나중에 하늘이 눈을 뜨고 낮이 되어 버렸지.”

음성 하나가 범한의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 있었다. 늙은 얼굴에 쇠약한 붉은 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딱 봐도 마황환을 먹은 후 나타나는 후유증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하다는 듯 소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 죽은 거 아니었어요? 어떻게 내 눈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똑똑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무의식 속의 어떤 정신적인 힘이 그에게 더는 이 이상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에 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묘가 저 설산 안에 있는 거죠?”

“그래. 저기는 인간계 성지야. 평범한 사람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이지.”

소은이 탄식을 했다. 그런 후 그의 얼굴이 무수히 많은 점점의 빛으로 변해 설원 위에 떨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범한이 웅크리고 앉아 붉게 변한 양손을 눈 더미 속에 넣고 눈을 파냈다. 이미 죽은 소은을 다시 잡아 와 계속 물어보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나절을 파내자 눈구덩이는 점점 깊어졌다. 하지만 소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점점 깊어져 가는 눈구덩이 옆으로 어떤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삿갓에 베옷을 입은 사람이 눈구덩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다처럼 맑은 눈으로 저 거대한 설산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은 어디로 간 겁니까? 그러고 보니 내 신발도 어디로 간 거지?”

범한이 눈구덩이에서 뛰어 나와 붉게 변한 맨발을 바라보았다. 그런 후 다시 삿갓을 쓰고 베옷을 입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맨발이었다. 삿갓 아래로 그 사람의 눈빛이 보이자 범한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댁이 고하인 거 다 압니다. 과거 신묘에 와 보셨다죠? 소은과 함께 인육도 먹었고요.”

눈 바닥에 앉아 있던 고하가 웃으며 대꾸했다.

“신묘는 신성한 곳이 아닌 그냥 낡은 사당일 뿐이야.”

“하오나 세인들은 대사께서 신묘를 무한히 공경하고 우러러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신묘 앞 푸른 돌계단에 수개월 동안 무릎을 꿇어앉아 있었던 덕에 하늘로부터 절학을 전수받지 않았습니까.”

범한의 말이 끝나자 고하가 원래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고하가 사라진 자리에서 순식간에 왜소한 검성(劍聖) 종사가 나타났다. 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부라리며 범한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 유골은? 내 유골 말이다!”

범한은 순간 소름이 돋았고, 그제야 자신이 뭔가를 잊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신묘에 가게 된다면 사고검의 유골을 들고 가겠다고 그에게 말해준 것 같았는데. 그의 유골을 신묘 돌계단에 뿌려서 신묘에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들이 살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었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범한이 한껏 고뇌하며 대답했다.

“저 산은 너무 높고 또 춥습니다. 하여 제 힘으로는 닿을 수도 없으니, 대인의 유골을 들고 왔다 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핑계나 대다니!”

사고검이 분노해 포효했다.

“그건 그냥 핑계잖아!”

말을 마친 사고검이 범한 찌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부드럽고 아름다워 저항할 수 없는 눈꽃 회오리바람이 생겨났다. 새하얗게 질린 범한이 솜처럼 부드러운 설원을 맨발로 사력을 다해 밟았다. 그리고 절로 우러러보게 되는 전방의 높은 곳을 바라보라보며 영원히 정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설산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검은 점이 느릿하지만 설산을 향해 안정적으로 나아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기쁜 마음에 범한이 소리쳤다.

“오죽 아저씨! 기다렸다가 저랑 같이 가요!”

검은색 천을 쓰고 있는 오죽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는지 냉담한 모습으로 산을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기만 했다. 그런데 범한 뒤에 있던 그 검이 도착을 해버렸다. 검 꽃은 한 송이만 핀 거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여러 장의 꽃잎으로 갈라져 범한의 흉부 쪽 살점을 도려내 버렸다.

끝 모를 고통이 밀려와 범한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러자 몸에 있던 핏물이 눈밭으로 흘러들어가 이내 얼어붙어 검붉은 색의 피 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유명하면서도 살벌한 기운을 지닌 마노석 같았다.

범한은 오죽 아저씨만 바라보며 우뚝 솟은 설산을 향해 걸어 나갔다. 설산은 여전히 높고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는 심장에서 전해져 오는 참기 힘든 고통과 머릿속에 가득 찬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범한은 잠에서 깼다.

범한이 끄응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뒤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속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 있었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살짝 시큰거리게 아픈 것을 빼면, 무수히 많은 살점이 도려진 건 아니었다.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이제 보니, 아까 해 질 녘에 깨어나서 조용히 침대 꼭대기를 보고 있다가 다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왜 이런 악몽을 꾼 건지. 그것도 과거 천하를 호령하던 절정의 고수들이 하나씩 꿈에 나타나 설산에 대해 말을 해주고는 충고하고, 독려하고, 버리는 내용으로 말이다.

범한이 무겁게 숨을 헐떡이며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훔쳤다. 그리고 덮고 있는 솜이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꿈에서 나온 대설산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범한은 꿈속에서 나온 대설산이 현실 세계에서 무엇을 대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실은 그 대설산보다 더 강하고, 냉담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설산 앞에 서니 자신은 어떻게든 그곳을 올라가려고 했었다.

* * *

황궁 어서방 안. 황제 폐하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주변 탁자 위에 있는 등불을 보고는 그제야 밤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빛이 살짝 냉담한 것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앞서 어떤 꿈을 꾼 탓이었다. 꿈속에서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설산 위에 서서 산 아래 설원에 있는 수없이 많은 백성들의 숭배와 경배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그 설산처럼 외톨이였다.

백성들은 얼어붙어 곧 강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런 생물들에게 숭배를 받고 있다 보니, 어쩌면 취할 수 있는 쾌감이 많이 없었던 탓일 수도 있었다. 황제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꿈속에서 자신을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던 눈을, 익숙한 동료의 눈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 찜질을 좀 해야겠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줄곧 옆을 지키고 있던 요 태감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는 어서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서방에서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섭중 대인이 계속 전전(前殿)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제는 아무런 말도 않고 조금 귀찮다는 듯 손만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어서방 문이 닫혔다. 경국 황제 폐하는 후궁(后宫) 쪽에 자신의 궁전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정사를 돌보느라 어서방 안에서 밤을 지세며 상주문을 비준하는 게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어서방에 침구류를 갖추 놓고 있다 보니, 이곳에서 주로 밤을 보내고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이에 경국 황제가 삶의 절반을 어서방에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평소 밤이 되면, 이 고요한 서재는 황제를 빼면 측근 태감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늙은 홍 태감이 죽고, 홍죽은 세를 잃었으니 밤에 어서방 안에 머물 수 있는 건 오직 요 태감뿐이었다.

하지만 고용한 어서방 안에 오늘은 여인 하나가 더 들어와 있었다. 이 여인의 미간에는 타고난 차분함이 어려 있었다. 말갛고 빼어난 얼굴에, 절반은 갖옷으로 이루어진 얇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고 긴 의자 맞은편에 놓인 둥글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발 옆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황제가 이 여인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을 건넸다.

“요 이틀 동안 너도 쉬지 못했구나. 잠시 후 후궁으로 가서 쉬거라.”

그러자 범약약이 차분하게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리고는 조용히 있었다. 그저께 오후에 황궁으로 불려 들어와 황제 폐하의 상처를 치료한 후 그녀의 행동은 극히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어떻게든 황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요 이틀 동안 황제 폐하는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래서 어서방에서 집무를 보고, 아랫것들에게서 보고가 들어오고, 범씨 가문 저택과 관련한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범약약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

황제가 범약약을 잠시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범약약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녀의 얼굴에 숨은 깊은 걱정을, 그리고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쉬이 알아차렸다. 황제가 요 이틀 동안 범씨 가문 여식을 곁에 둔 건 범한을 압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상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황제는 이 조카뻘 계집아이가 깔끔하고 담백한 성정을 지녀 자신과 너무 잘 맞는다고 느껴 그녀에게 맘 편히 말도 건네 보았다. 그때마다 범약약은 천문지리는 물론이고 천하의 상황에 관해서도 막힘없이 대답을 해냈다.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황제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 범약약의 타고난 솜씨로 체내에 있는 대부분의 쇠구슬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진평평의 바퀴 달린 의자가 지닌 이중 살상력은 너무나도 컸다. 하지만 황제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경국 황제는 대종사였고, 그렇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당했다면 진평평의 총 두 자루에 일찌감치 죽었을 것이다.

“안지는…… 그러니까 네 오라비는 짐에게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하구나. 나중에 그 오해가 풀리면 별일 없을 것이니라.”

황제 폐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씨 가문 여식이 걱정하는 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에 그는 평소 성정과 다르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해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황제의 진심이었다. 그가 봤을 때, 안지는 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평평의 참담한 죽음을 그로서는 당장은 이해 못할 수도, 또 순간 생각을 고쳐먹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훗날 진평평이 이 씨 황족에게 심어 놓은 큰 악의 씨앗에 대해 범한이 알게 된다면, 그리고 과거 범한을 여러 차례 죽이려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범한도 자연스레 이해할 거라 여겼다.

“황제 폐하 말씀이 지당하시옵니다.”

범약약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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