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1화 집에서 깊이 잠들었으니 깨지 않았으면 (2)
섭중도 알다시피, 범한은 자신이 경도로 잡아온 게 아닌 그가 자진해서 돌아온 거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든 건 범한이 입궁해 황제 폐하를 알현할 의사가 아예 없다는 거였다. 그러므로 섭중 입장에서는 범한이 분노해 황제 폐하를 책망하거나, 그분께 무언가를 해명 하는 편이 저 심드렁한 태도보다는 훨씬 안도감을 주는 거였다.
저 심드렁한 태도는 사실 황제 폐하를 향한 분노와 한기를 억누르고 있는 거였고, 동시에 황권을 경시하는 행동이었다. 섭중은 범한에게서 어떻게 저런 용기가 나오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와 범한 간의 냉전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상처를 치료중인 황제 폐하께서는 어쩌면 자신의 사생아가 황궁으로 들어와 해명을 해주고, 포효하기를 기다리고 계실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황제 폐하의 기대와 판단을 몽땅 허사로 만들어 버렸다.
섭중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아까 태평 별궁 밖에서 범한의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말투를 떠올리고는 암담한 기분에 결국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는 냉담하게 압박해오는 범한에게 밀려 양보를 한 거였다. 이는 곧 범한이 경국 군대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력은 황제 폐하와 범한 사이의 관계에 여러 변수를 낳을 게 뻔했다.
더 나아가 섭중은 황제 폐하와 범한의 생각까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에게 입궁하라는 황명을 먼저 내리시지 않고 그가 알아서 입궁하기만을 기다리실 것이다. 그런데 범한도 먼저 입궁하지 않고 용좌에 있는 그 남자분이 먼저 입을 떼 주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태도, 마음, 의지를 가지고 하는 힘겨루기다. 이는 양측이 지니는 엇비슷한 실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지극히 냉정한 심장을 갖고 있는 양측 중 누가 먼저 움직이는 가가 중요한 거였다.
섭중이 깊이 심호흡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다시 숙연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의 배를 툭 쳐 황궁으로 돌아가 결과 보고나 하려 했다. 부자간의 전쟁은 신하인 그가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에 정주군이 끼어들었던 건 황명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분명한 건, 황제 폐하께서 사생아인 범한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아들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경국 군측 수장인 섭중은 이 전쟁이 평화롭게 끝나기만을 바랐다. 어쩌면 그는…… 빠르게 수습되기만을 바란 것일 수도 있었다. 이틀 동안 쉼 없이 내린 가을비처럼 주변을 오싹하고 불안하게 만들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 * *
마차가 성 남쪽 범씨 가문 저택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곳의 대로는 고요했다. 저택 문 앞에서는 비에 젖은 사자석상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분노 섞인 불안한 모습으로 주변 행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굳게 닫힌 대문이 서둘러 열리며 저택 내 호위 무사가 칼을 들고 쏟아져 나와 마차 아래로 가 섰다.
마차에서 내린 범한은 끌채에 있는 언빙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주변을 담담하게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구석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략 13관아나 대리사에서 키우고 있는 사람들로, 황궁에서 보낸 게 분명해 보였다.
한편 더 멀리 떨어진 거리 입구에 감찰원 밀정들이 있자, 범한이 입가에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감시하는 일에서 만큼은 온 조정에서 달라붙어도 감찰원의 적수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밀정들은 황제 폐하가 아닌 여전히 자기 손안에 있어서였다.
범한이 계단을 올라가자 끌채 위에 앉아 있던 언빙운이 탄식을 하고는 떠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언빙운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감찰원은 내가 얼마 돌보지 못할 것 같군요.”
범한이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한쪽 팔은 집안 여인 중 하나가 부축을 해주고 있었다. 피로가 극에 달한 와중인데도 범한이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원래 오래 할 생각도 없었어요. 하나 작은 언 대인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감찰원이 견고한 건 상벌을 분명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덮어줬기 때문이라고요.”
“이미 많은 사람이 하옥되었겠네요. 나중에 그 늙은이들은 다시 8대 처에서 뭉개고 있을 수도 없겠군요.”
범한의 등이 천천히 곧게 펴졌다.
“관직을 뺏은 건 뺏은 거니, 그들을 살아 있게는 해줘야 합니다. 만약 그들까지 모두 죽는다면, 너덜너덜해진 감찰원을 아무리 보존시켰다 해도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거니까요. 알아들었습니까?!”
언빙운이 잠시 침묵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범한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쉰 후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의 높은 문지방을 넘었다.
저택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확 덮쳐왔다. 피곤에 절은 범한의 몸은 집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노곤노곤 해졌다. 아마도 집이 주는 효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억지로 몸을 곧게 펴고 돌길 위를 걸었다. 심지어는 집안 여인의 부축도 받지 않고 걸었다.
범씨 가문 저택 사방에는 감시자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호위 무사가 엄숙한 모습으로 걸어 다니고 있어 질서정연하면서도 스산한 느낌이 가득했다. 바깥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부는 시종일관 느슨해지는 법이 없는 것. 이것은 범씨 가문 저택의 전통이었다. 3년 전 경도에서 반란이 일었을 때 범씨 가문 저택에서도 충분히 준비를 했었다. 이에 오늘도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로 있는 거였다.
이 전통은 아버지께서 계실 때 세워진 규칙이었다. 그래서 경도가 혼란에 빠져 어찌 변한다 하더라도 이곳을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려면 적어도 수백 명의 군사가 강공을 펼쳐야만 가능할 것이었다. 범한은 완아가 해 놓은 만반의 준비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자신도 몸소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한 거였다. 자신을 기둥으로 여기는 범씨 가문 저택 사람들에게 그들의 도련님이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는 걸 알리려고 말이다.
화원을 지나 후원으로 온 범한은 응접실 문 앞에서 온유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다. 이에 범한이 그녀를 향해 억지로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돌아왔어요.”
임완아는 눈에 안개가 껴 점점 뿌옇게 되는데도 억지로 참았다. 그녀도 이제 막 황궁에서 돌아온 터였다. 임완아가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와 범한의 차가운 손을 붙잡고 달콤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돌아왔으니 되었습니다. 며칠 못 주무셨을 텐데, 우선 잠부터 청하세요.”
“엿새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네요. 나도 내가 이 정도로 견딜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범한은 심장이 살짝 아팠지만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후 아내의 어깨에 온 몸을 내맡긴 채 침실로 향하며 그녀에게 따스하게 말을 건넸다.
“요 이틀 동안 당신이 고생했겠네요.”
“고생이라뇨.”
임완아가 범한을 부축해 침소로 들어갔다. 임완아는 방안에서 범한의 손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좀 아팠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신 범한을 침대 가장자리에 앉힌 후 종에게 서둘러 뜨거운 물을 떠 오라 분부했다. 임완아는 남편의 얼굴부터 씻어주었고, 또 발 닦는 물이 담긴 황동 대야를 범한의 발아래에 가져다 놓았다.
임완아가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범한의 신발을 벗겼다. 범한의 발에는 수일간 고생하며 뛰어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 말을 타고 오기는 했지만, 신발과 발은 거의 하나가 되어 있는 듯했다. 특히나 등자를 밟는 발바닥 중간 부분은 깊게 쓸려 피난 자국이 있었다.
순간 마음이 아팠던 임완아는 조심스레 범한의 발을 뜨거운 대야 안에 넣었다.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기분 좋게 편안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院) 밖에 사람들로 가득해 들어갈 수 없었어요.”
임완아가 고개를 숙인 채 범한의 양발을 가볍게 주물러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가 말한 ‘원’은 당연히 감찰원이라는 네모반듯한 건물을 이르는 거였다.
“경도를 떠날 때 1처에서 담력이 큰 녀석들이 나를 따라 경도성에서 나갔지요.”
범한이 아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완아가 연락을 취한 거란 거 알고 있었어요. 하여 그들이 떠나도록 안배를 해놓았으니, 이제 염려 말아요. 원 쪽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나와 연락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임완아의 손이 살짝 굳었다. 범한을 걱정하는 동시에 그 일을 말해줘야 할지 주저하고 있어서였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가씨가 어젯밤 황제 폐하를 치료하러 입궁했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당연지사입니다.”
범한은 언빙운으로부터 이미 그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사람의 약점을 꽉 움켜쥐신답니다. 늙은 절름발이만 그 약점을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오늘 같은 일을 당한 것이고요.”
진평평을 언급하고 나자 범한의 낯빛이 암담해졌다. 사실 진평평의 이번 생에서 유일한 약점은 범한이었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처한 늙은 절름발이는 범한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마지막에는 필사의 대치 국면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을 마친 범한은 곧장 잠이 들었다. 두 발이 아직 대야에 잠겨 있는데 머리를 가슴팍까지 늘어뜨리고 깊이 잠들어 버렸다. 한동안 잠을 자지 못한 그가 아내 앞이라 마음이 편안해져 잠이 든 거였다. 하지만 그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슬픈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임완아가 손동작을 조심스레 멈추고는 초췌하고 슬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슬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는 반짝반짝 빛나던 소년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불쌍하게 변한 거지?’
* * *
범한은 꼬박 하루 밤낮 동안 잤다. 그래서 느긋하게 잠에서 깨고 보니, 그때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 살짝 어두워진 노을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 안의 익숙한 사물에 낯선 빛을 드리워 놓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임완아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하인들에게 이런저런 일을 분부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범한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던 터라 따뜻한 이불 속에 그냥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나가면, 어쩌면 이미 일어난 일들과 곧 일어나게 될 일들과 대면할 수밖에 없어서 일수도 있었다.
범한이 시선을 옮기다가 침대 가장자리에 놓인 수건을 발견했다. 이에 손을 뻗어 수건을 가져다가 가볍게 눈곱을 닦았다. 그런 후 범한은 곧바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몸이 개운한 게 잠을 잘 때 완아가 자신의 몸을 닦아준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단순한 동작을 두 개 했을 뿐인데도 범한은 온몸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시큰거리고 아팠다. 천리 길을 달려오고, 살벌하게 누군가를 죽이고,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통해 하고 나니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거였다. 그러니 자고 일어났다고 해서 쉬이 나을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거다.
범한이 차분하게 침대에 누워 천천히 체내 두 개의 정기를 속히 움직여 보았다. 특히나 천일도의 자연 법문을 가지고 원기 회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선은 장막 꼭대기의 반복되는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곳을 향한 채 속으로는 ‘황궁에 있는 그 남자가 지금 무슨 생각 중일까?’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