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화 집에서 깊이 잠들었으니 깨지 않았으면 (1)
경국 추밀원의 당당한 정사이자 황제 폐하 밑에 있는 군측 첫 번째 인사인 섭중 원수가 직접 범한을 탄압 내지 감시와 통제를 하러 태평 별장까지 정예병을 끌고 온 거였다. 이는 경국 조정과 황궁 쪽이 범한을 지극히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존중과 경계심은 실력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범한은 초췌하니 살짝 창백했다. 그리고 잘생긴 얼굴 위에 옅게 줄이 난 흔적은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분명 천 리 길을 달려오면서 묻은 먼지와 빗물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낙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말 위에 있는 섭중을 살짝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어도 오히려 좀 무뚝뚝하고 심드렁해 보이기만 했다. 그리고 섭중과 갑옷으로 무장한 수천 명의 기마병을 보지 못한 듯 보였다.
범한과 섭중 정도의 실력자라면 아무리 강한 고수일지라도 들판에서 수천에 달하는 정예 기마병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한다는 걸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이미 대종사 경지로 들어선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 경도성 외곽이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물까지 흐르는데다가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범한이 만약 정말로 경도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몸을 돌려 거대한 새처럼 숲으로 도망간다면, 어쩌면 수천 명의 정예병은 잠깐 동안은 범한을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섭중을 보내 직접 이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는 건 바로 그러한 점까지 고려했다는 거였다. 또한 수천 명의 정예 기마병 사이에는 군 측 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제일 관건은 범한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섭중, 즉 경국에서 극히 적은 9등급 상의 강자였다.
범한은 아주 조금 실눈을 뜨고 말 위에 있는 섭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살짝 뛰기 시작하면서 다른 일이 떠올라 범한이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천하 3국 중 9등급 고수의 수가 제일 많은 건 당연히 동이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칼과 말로 천하를 정복한 건 경국이었다. 경국에도 고수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7, 8등급 사이의 강자가 제일 많았다. 그리고 9등급에 들어선 강자의 경우, 애당초 경도에 있던 사람만 따져 봐도 여럿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7, 8등급 고수가 가장 많이 모여 있던 호위(虎衛)는 경국 황제가 전임 호부 상서 범건을 경계하기 위해 모두 동이성의 흉악한 검에 바쳐버렸다. 그리고 군측 강자의 경우는 3년 전 경도 반란에서 죽거나 다쳐 사라졌다. 특히나 진업 부자는 모두 황궁 앞에서 사망했고, 더욱이 늙은 홍 태감은 대동산에서 죽었으며, 경묘의 대제사와 2 제사도 차례대로 사망했고…….
경국 절정의 고수들이 황제 폐하의 모략과 의심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간 거였다. 그래서 현재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백이 생겨 버렸고, 이에 범한이라는 9등급 상의 인물을 막기 위해 파견할만한 사람도 없는 지경이 되어 군측 제1 인사인 섭중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거였다.
“작은 공작 어르신이 웃을 줄도 아시다니. 본장(本將)으로서는 너무 의외로군요.”
섭중이 눈 속의 한기를 서서히 거두며 차분하게 말했다.
“본관은 그저 궁금한 게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만약 섭 대인과 궁전마저 죽었다면, 황제 폐하…… 곁에 믿을 만한 강자가 남아 있었을까요?”
범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범한이 경국 무력의 현 상황을 단번에 간파해버리자 섭중은 심장이 살짝 떨렸다. 경국 정예 기마병은 천하무쌍이고, 정주군과 연경의 대군영이든 각 변방에 흩어져 있는 과거 1 황자 마마 휘하에 있던 정서군 옛 부하들이든 모두 전쟁터에서는 호랑이와 늑대 같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강자가 이끄는 작은 규모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면, 경국에게는 의지할만한 고수가 더는 없었다.
“천하 강자가 모두 제 손안에 있습니다.”
범한이 섭중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어떤 황명을 내리셨는지 상관 않습니다. 제가 아는 거라고는 척후병과 기마병을 당장 철수하지 않으신다면, 대인께서는 분명 원치 않는 광경을 보게 되실 거란 것뿐입니다.”
‘천하 강자가 모두 제 손안에 있습니다.’라니. 어찌 이런 오만방자한 말을. 천하에서 제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천하 신하 중 제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했거늘. 그렇다면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경국의 제왕에게는 가장 많은 수의 강자가 따라야만 했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었다니. 운인지 단순히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섭중은 천하에서 정말로 고강한 고수 중 대부분이 범한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섭중은 현공 사당의 자객 사건과 관련한 진상을 모르고 있었지만 앞서 사형장에서 벌어진 광경을 통해 확신한 건 있었다. 감찰원의 진짜 고수는, 예를 들어 신비한 6처 수장이자 사고검의 동생이라 알려진 그림자는 분명 범한의 명만 듣는다는 거였다.
제일 관건은 검려 제자 열세 명이었다. 이미 동이성 성주가 된 운지란을 제외한다고 해도 그들 중 9등급은 여전히 11명이나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작은 공작 어르신에 대해서는 명확한 명을 내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심중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나 흑기와 작은 공작 어르신을 따라 경도를 나간 1처 관원은…… 경국 법률을 위반하고 역모에 가담한 것입니다. 하여 조정에서 그들을 살려둘 거라 보십니까?”
“제가 그들을 살려둘 것입니다.”
범한이 피곤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섭중과 입씨름 하는 게 피곤해 다음과 같이 천천히 말했다.
“똑똑한 분이시니 어찌해야 할지 자연스레 아시겠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역정이 나 계실 테고…… 듣자 하니, 그분께서도 다치셨다고 하던데요. 하여 이런 때에 내려온 황명이니, 그리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군요.”
“지금 제 감정을 통제하는 게 힘듭니다. 대인께서도 제가 궁지에 몰려 미친 모습을 보이기를 원치 않으실 것 같은데요. 제가 미쳐 날뛰면 대인께나, 저에게나, 경국 조정 관원과 백성에게나, 심지어는 황궁에 계신 그분께도 좋을 게 하나 없습니다.”
구부정한 자세로 있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아실 겁니다. 늙은 절름발이에서 시작해 저까지, 제 감찰원의 품격은 잘못을 감싸주는 겁니다. 바로 제 사람이 다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저도 압니다. 하나 그건 항명이라…….”
섭중이 범한 이마에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경국의 신하입니다. 법률을 위반한 모든 관원을 체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씨알도 안 먹힐 말은 그만 하시지요.”
범한이 피로한 모습으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계속 말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은 없군요. 하여 정주군이 예전처럼 계속 평안하기를 바라신다면, 얼른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섭중과 범한은 기마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어 누구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리는 없었다. 계속 범한 뒤를 따르던 언빙운도 검은색 마차 옆에 차분하게 서 있기만 할뿐 앞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섭중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저들을 놓아 준다 해도, 어르신 수하인 흑기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지요. 하여 저들에게 서량으로 가 홍성 밑으로 들어가라고 하든, 동이성의 1 황자 마마께 가라고 하든, 각주로 통하는 길목마다 병사가 주둔해 있으니…….”
여기까지 말한 섭중이 돌연 말을 멈추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동안 조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연스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정보 중에는 며칠 전 범한이 연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내용도 분명 섞여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렇게 경도로 서둘러 돌아온 건 뜻밖의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경국의 군측 강자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범한이 천리 길을 어찌 날아 왔는지, 그것도 수백에 달하는 흑기까지 데리고 서둘러 경도로 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인께서 친히 나서지만 않으신다면, 주군들이 제 사람들을 막을 리 없겠지요.”
범한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제가 대인을 따라가면, 대인이 저들을 풀어 준 것을 두고 황제 폐하께서 노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섭중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 어르신께서 저를 따라 경도로 돌아가신다면, 황제 폐하의 노기가 많이 누그러지실 것입니다.”
“거 보세요. 간단한 일 아닙니까!”
범한이 무표정하게 말을 마친 후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언빙운이 있는 검은색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가림막을 가린 후 눈을 감고 쉬었다.
마차가 살짝 덜컹거리며 도로 위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국 정예 기마병 수천이 호위를 하듯, 압송을 하듯 검은색 마차를 따라 경도 방향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가 정양문을 지나 고요하고 스산한 대로로 들어서서 운행할 때였다. 줄곧 눈을 감고 쉬고 있던 범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입궁해야 할까요?”
“아니요.”
말을 타고 있는 섭중이 작달막한 몸집으로 몸을 곧추 세우고는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작은 공작 어르신을 경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만 있으셨을 뿐, 입궁하란 명은 없으셨습니다.”
“잘 되었군요.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범한이 다시 두 눈을 감고 자그마하게 대꾸했다. 마차 운행을 책임지고 있는 언빙운이 살짝 굳은 낯빛으로 말고삐를 당겨 소금 시장 입구에 있는 갈림길을 따라 성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주변 어두운 곳에서 일부 사람들이 이 검은색 마차를 바짝 뒤쫓았다. 섭중의 부하 기병대에서도 일부가 범한의 뒤를 쫓았다. 한편 섭중 본인은 거리 입구에 말을 세우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길 위에는 행인들이 있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사형장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민간에 떠들썩하게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백성들의 삶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먼 세상의 일이었다. 그래서 경도에서의 삶은 가을비가 멈추자 곧장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거리 가장자리, 처마 밑에서 걸어가고 있는 행인들은 일찌감치 군사들에게 밀려 양측 대로변으로 가 있던 거였다. 이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굳은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군사들이 검은색 마차를 에워싸고 있어서 행인들은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에 그들 눈에서 순식간에 긴장, 흥분, 의문, 걱정과 같은 여러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섭중은 말 위에서 일어나 검은색 마차가 성 남쪽 방향으로 천천히 사라져가는 걸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이치대로라면, 범한을 경도로 잡아오고 경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해놓았으니, 황명은 이미 완수한 거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 범한의 노골적이면서도 차분한 위협 때문에 경국 옥토 위를 내달린 흑기와 감히 황명에 항거한 감찰원 1처 관원들을 쫓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이에 그는 잠시 후 입궁했을 때 무섭게 화를 내시는 황제 폐하를 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싸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돌덩어리는 바로 멀어져가고 있는 범한이 보인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