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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79화 (979/1,108)

979화 빗속에서 진평평과의 이별 (4)

햇빛이 서서히 이동해 지하 암실은 빛이 들었다 안 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게 광선의 각도 때문인지, 아니면 구름의 두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소리가 범한이 있는 밀실로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이에 범한은 파묻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고 의자에서 내려와 어둠 속에 있는 관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고는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이상한 소리가 한 차례 울린 후 석실 위 밀실 문이 굳게 닫혔다. 이에 석실은 더는 햇살과 물이 침투해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이곳은 다시 고요하고 어두운 곳이 되었다.

범한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잔디밭의 작은 길을 따라 태평 별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무문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까지 걸어갔을 때 1처 부하가 나지막한 소리로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냉담한 범한의 얼굴에서 잠시 복잡한 표정이 스치더니, 그는 자그마한 소리로 한마디 건넨 후 별장 내에 있는 나뭇등걸로 가 앉았다.

나무문이 열리고 언빙운이 걸어 들어와 범한 앞에 섰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무슨 말로 서두를 열어야 할지 몰라서일 수도 있었다.

“황궁 안에서 동정이 있은 날부터 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겠지요. 하면 내 입장에서는 그 어떤 자잘한 것도 누설하고 싶지 않군요.”

범한이 피곤한 모습으로 나뭇등걸 위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있었고, 낯빛은 창백해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언빙운이 범한의 오른손을 쓱 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어 살짝 흠칫 했지만, 무언가 둘러대는 말은 하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2월에 황궁으로 불려 들어가 황명을 받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하 대학사가 달주에서 고달을 체포하고, 황제 폐하께서 이 일로 원장 대인을 달주에 머물도록 하고, 다시 또 경도 수비사로 사람을 잡아들인 일은 저도 대략만 알뿐 세세한 건 전혀 모릅니다.”

“하면 대인이 알고 있는 세부 사항을 말해줘요.”

언빙운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오늘 작은 범 대인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정상적인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언빙운은 그가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그날 새벽에 경도 수비사가 검은색 마차를 호송해 경도로 들어온 걸 시작으로 황궁 어서방에서 싸움이 일고, 황제 폐하가 중상을 입고, 진평평이 청자 잔에 다치고, 그가 감찰원 감옥에 갇히는 일이 차례대로 일어났다. 언빙운은 하나도 속이지 않고, 심지어는 그 일에서 자신이 맡은 추악한 역할까지 빠짐없이 말을 해주었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언빙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나를 쫓아 온 거죠? 저 늙은 절름발이를 다시 끌고 가서 토막을 내려 하는 겁니까? 아니면 기어코 저분은 땅에 묻힐 수 없다고 말하러 온 겁니까?”

범한 앞에서 언빙운은 자기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이에 그가 절대 거짓일 수 없는 비통한 기색을 드러내며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관 반드시 원장 대인을 뵈러 와야 했습니다. 대인께서 미쳐 날뛰도록 놔둘 수 없습니다.”

“미쳐 날뛰는 게 뭐죠? 반역을 저지르는 거요?”

범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별장 밖에 있는 경도 수비사와 금군 군대가 설마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요?”

이때 별장 밖에서 옅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분명 방금 전 가을비가 지나간 자리인데 갑자기 건조해지다니. 태평 별장 밖에 얼마나 많이 모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범한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와 고수가 매복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언빙운이 자신의 기분을 강하게 억누르며 범한을 냉담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말씀하시든 노원장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하여 더 분노하셔봤자 바뀌는 건 없습니다. 대인께서 경도에서 도망치실 수 있다고 해도 또 뭘 어쩌실 수 있겠습니까? 등자월은 서량에, 소문무는 민북 황실 금고에, 하서비는 소주에. 계년조 소속의 능력자들, 감찰원 내 최고 실력의 밀정 관원은 제가 여기저기로 보내놨습니다. 대인을 가장 엄히 통제할 수 있도록 그들을 흩어서 보내 놨지요. 대인께서는 경도 밖으로 나가시면 감찰원 역량의 6할은 모으실 수 있겠지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대인께서 또 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범한이 언빙운을 냉담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대인은 동이성 검려 주인이니, 수하로 있는 수많은 검객을 부릴 수 있으시겠지요. 더군다나 1 황자 마마께서도 동이성에 1만 정예군을 데리고 진주하고 계시고요. 하나…… 정예군 1만을 꼭 1 황자 마마께서 모두 통제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최악의 경우가 닥쳤을 때 마마께서 대인 때문에, 또는 노원장 때문에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들 것 같습니까?”

언빙운은 입술이 살짝 마르고 목도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계속해서 강경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홍성 세자는 정주에 계십니다. 그분은 대인과 가장 친한 벗이지요. 하나 그분이 대인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해도 정주군이 그분 말을 들을까요? 지금 천하에서 황제 폐하와 대립할 수 있는 사람은 대인뿐이지요. 하나…… 대인은 아직 황제 폐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말 다 했나요?”

범한이 살짝 실눈을 뜨고는 언빙운을 바라보며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를 설득하려거든 진평평 대인이 당신에게 남긴 친필 서한이나 내놓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언빙운은 순간 깜짝 놀랐다. 자신이 그동안 감찰원 내부에서 한 일 때문에 범한이 격노할 거라 생각했는데, 범한은 이미 다 조사를 해놔서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였다.

범한이 언빙운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당신이 그걸 꺼내 보여준다 해도 내가 보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위 거시적 판도란 걸 생각해서 그랬을 테니까요. 감찰원을 일시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황제 폐하께 강제적으로 제거될 수 있으니, 그걸 막기 위해서랄까……. 하여 언 대인은 황제 폐하의 두 번째 개가 되어 이 별장을 어떻게든 남겨둔 것일 테고, 또한 그 남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어떻게든 일련의 일을 해야만 했을 테지요.”

“대인이 불편하고 견디기 힘들다는 거 알아요.”

범한이 살짝 얼이 나가 있는 언빙운을 바라보며 냉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그건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니, 치욕을 참으며 중대 임무를 수행한다는 쾌감에 젖어 있겠지요? 노원장께서는 감찰원 내 수천에 달하는 사내들의 생명과 천하 백성들을 생각한 분이십니다.”

언빙운이 살짝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제가 오해를 좀 받고, 감찰원 관원들의 눈엣가시가 된 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설마 저에게 천하 대란이 이는 걸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하란 말씀이십니까? 천하에 왜 혼란이 일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천하 백성들을 생각해서라고요?”

범한이 갑자기 괴이하게 웃기 시작했다.

“천하 백성들이 대체 몇이나 되기에……. 그들을 위해 생각했다고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언빙운을 바라보며 매 글자에 오싹한 기운을 담아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건 경국을 위해서다. 모든 건 황제 폐하를 위해서다. 모든 건 천하를 위해서다. 이딴 건 당신의 태도이지 내 태도가 아니에요. 내가 아끼는 사람을 위해 수천수만을 죽인들 그게 뭐 대수랍니까?! 하나 당신은 나 대신 그런 걸 하지 않겠지요……. 하여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군요.”

범한의 온유한 표정 아래 지극히 강렬한 애증이 깔려 있다는 걸 언빙운은 알게 되었다. 이에 언빙운은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누구의 용서 따위 필요 없습니다. 노 원장의 선택과 제 의견이 일치하기에 제가 그리 한 것입니다. 경국을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하는군. 그리 해야 황제 폐하의 좋은 신하가 될 수 있는 법이지. 그 우라질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가 괜찮은 황제이기는 할 거야.”

범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내가 봤을 때 그분이나 당신은 모두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두 사람 마음속에는 동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정왕야와 영 재인께서 황궁에 연금되어 계십니다. 범씨 가문 아가씨도 황궁에 있고요.”

언빙운은 문득 싸한 기분이 들어 급히 이와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되돌아온 건 범한의 비웃음과 냉담함뿐이었다.

“황제 폐하 입장에서는 그리 하시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범한이 피로에 쌓인 발걸음으로 나무문 쪽으로 걸어가자 언빙운은 그 모습에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가 속에서 솟구쳐 올라서였다. 그건 자신을 위한 공포가 아닌 범한을 걱정해 주는 마음이었다. 이에 언빙운이 크게 소리쳤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손을 나무 문 위에 얹어 놓고 살짝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피곤해 하며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잘 겁니다.”

* * *

태평 별장 문 밖으로 걸어 나온 범한은 다리 입구에서 삼엄한 경비 태세에 있는 1처 관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리 건너편에 있는 수백의 흑기를 바라보았다. 흑기는 온갖 고생을 해 지친 상태였지만 피로감을 강하게 억누르고 힘겹게 방어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 건너편에, 노란 단풍이 섞여 있는 가을 숲 쪽에는 황제 아버지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보낸 군대가 있어서였다. 이에 범한은 ‘내가 경도로 급히 끌고 온 부하들이 어찌 저항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밝은 햇빛에 범한은 순간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에 그는 피로와 슬픔이 사람 몸을 이렇게나 심하게 상하게 한다는 걸 비로소 체감하게 되었다. 범한이 허공을 밟듯 허우적대며 대나무 다리를 걸어갔다. 그러다 이 긴장되는 순간에도 기를 쓰고 자신을 쫓아오는 부하들을 향해 가볍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려 주었다.

흑기 부통령과 1처 관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작은 공작 어르신이 자신들의 목숨을 생각해 주어서였다. 이에 이들은 더는 말대꾸 하지 않고 일제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꿇어앉았다. 그런데 이들이 젊은 원장 대인을 향해 무릎을 꿇은 건지 태평 별장에 있는 노원장을 향해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수백에 이르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는 한데 섞여 고요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을 따라 서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줄곧 묵묵히 범한 뒤를 따르던 언빙운이 복잡한 시선으로 그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범한을 따라 다리를 건너고, 도로 위까지 걸어갔다. 도로가 있는 곳 주변에는 밭과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수천의 기마병이 와 있었다. 기마병들은 빽빽하게 줄을 지어 서서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범한은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이 강대한 병사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들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경계하는 눈빛을 맞으며 원수(元帥) 앞으로 걸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척후와 추격병의 매복을 모두 풀어주시지요. 제 사람이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자 섭중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며 조금 싸늘한 빛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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