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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78화 (978/1,108)

978화 빗속에서 진평평과의 이별 (3)

정오의 햇살이 경도 외곽에 자리 잡은 유정강 위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에 차가웠던 강물도 살짝 따뜻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에서 아지랑까지 피어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물 맞은편에는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우아한 원(院) 있었다. 회백색 담벼락, 청황색 대나무, 그리고 압도적인 한기. 하지만 기왓장에 있던 물이 햇빛에 말라 젖은 흔적만 남아 있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도로 여름이 된 것만 같았다.

초가을의 후덥지근한 열기 속에서 검은색 마차가 유정강 대나무 다리 위를 질주해 건넌 후 별원의 문 입구에서 차분하게 멈추어 섰다.

이 별원은 섭경미가 과거 기거하던 곳이자, 장 공주가 죽은 곳이고, 범한이 강 맞은편에서 바라보며 절을 올린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섭가 사변이 있은 후에는 황실 금고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별장이 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러 해 동안 이곳을 거의 찾지 않았다.

더군다나 마마님들과 황자들도 눈치 없이 감히 이곳에서 잠시 기거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때문에 이 별장은 이십여 년 동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다 3년 전 장 공주가 경도 사변을 획책할 때, 무슨 생각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며칠 동안 기거했었다.

이 별장은 고즈넉한데다가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았고,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음산한 기운이 깔려 있던 탓에 모두 이곳을 경원(敬遠)하는 태도로 대했다. 그래서 궁정에서도 이곳을 깐깐하게 신경 써서 관리하지 않고 고작 황실 호위병 넷만 상주시켜 놓았을 뿐이었다.

별장 밖에 있는 황가 표식을 무시하고 검은색 마차가 무작정 달려 들어오자, 호위병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가 보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검은색 마차 뒤편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쇠뇌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제압한 후 무장 해제시키고 결박해 버려서였다.

감찰원 관원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 말없이 마차 가림막을 열었다.

그러자 발걸음 소리가 작게 나는 가운데 온통 빗물에 젖은 창백한 얼굴의 범한이 진평평의 주검을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색 옷과 품 안의 노인이 덮고 있는 감찰원 관복에서는 빗물이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태평 별장 문이 열리고 범한이 부하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숙연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찌그덕 소리와 함께 그의 뒤에 있던 대문이 굳게 닫혔다. 감찰원 관원들은 이내 여기저기로 흩어져 대나무 다리의 중요 지점을 모두 통제하고, 주변을 주시하며 경계했다.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급박하면서도 어지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로에 지친 수백 명의 흑기 기마병이 유정강을 따라 난 국도로 들어왔다.

그런데 곧이어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더 먼 곳에서 멈추었다. 경도 수비사인지 금군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검은색 마차 한 대가 나타나 대나무 다리 맞은편에 멈추었다. 마차 위에서 얼음처럼 싸늘한 얼굴을 한 관원이 내렸다. 언빙운이었다. 그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 건너편 별장에 있는 감찰원 관원만 침착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범한을 따라 태평 별장으로 온 감찰원 관원들은 경도에 흩어져 있던 계년조 구성원을 빼면 대부분은 1처 소속이었다.

언빙운이 황궁 쪽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잠시 네모반듯한 감찰원 건물 내 형세를 통제하고 있기는 했어도, 감찰원 8대 처를 특히나 1처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다.

범한은 과거 1처를 관리할 때 이곳을 강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놓은 터였다. 이에 1처 관원들은 범한을 조상님 대하듯 했다. 그래서 오늘 황궁 앞에서 어마어마한 일이 막을 내리고 범한이 진평평의 주검을 안고 황궁 앞 광장을 떠나자 1처 관원들도 곧바로 검은색 마차를 몰고 와 그를 맞았다.

언빙운이 실눈을 뜨고 다리 건너편에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감찰원에서, 특히나 1처에서 범한을 높이 신망(信望)하는 건 언빙운이 봤을 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상하게 생각한 건 범한이 경도로 돌아오자마자 1처 관원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 하는 거였다. 황제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 1처를 감시하고 있어 정보 전달이 원활하지 않은데 말이다. 더군다나 1처에서 이렇게나 교묘하게 범한을 맞으러 온 건 정말이지 그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언빙운이 모르는 게 있었다. 범씨 가문의 젊은 안주인은 진평평이 황제 폐하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부군을 위해 서둘러 사전에 모든 준비를 해놓은 것은 물론 1처와 암암리에 연락을 유지했다. 이에 범한이 홀로 사형장에 나타났을 때 1처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갈 수 있던 거였다.

한편 피로가 극에 달해 있기는 했어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몇백 명에 달하는 흑기는 범한의 사전 명령에 따라 태평 별장으로 집합을 했다. 범한은 경도로 들어오기 전 자신이 늙은 절름발이를 구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 이들과 태평 별장에서 다시 만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굳힌 터였다.

언빙운은 다리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축축이 젖은 관복을 정리한 후 혼자서 다리 위를 건너갔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가운데 드디어 다리 맞은편에 도착한 언빙운. 1처 밀정들의 경계하고 원수 대하듯 무시하는 눈빛을 맞으며 그가 인사를 건네고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4처 언빙운이 원장 대인을 뵈러 왔네.”

* * *

범한은 언빙운이 태평 별장 밖에 나타난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설득하기위해 만나러 올 거란 생각은 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경도 안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뒤를 쫓는지, 또 얼마나 많은 경국 정예 부대가 쫓아올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지금 즈음이면 그들이 태평 별장 밖에 결집했을 거란 건 정확히 맞추었다. 그런데 그들의 설득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두 황제 아버지의 의지에 달렸을 터.

하지만 범한은 그런 고려는 하지 않았다. 귀찮아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온통 공허할 뿐이었다. 평소 산처럼 물처럼 풍부했던 정기는 아까 통곡을 할 때 모두 토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 가슴팍에 있던 탁한 기운을 토해내는 것은 물론 정기까지 토해내 남은 건 공허함뿐인 것 같았다.

범한은 발걸음이 오늘처럼 무거웠던 적도, 몸이 오늘처럼 허약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자기 품 안에 있는 노인은 분명 너무나도 가벼운데, 왜 이렇게 몸이며 발걸음은 무거워지는 건지. 범한은 자신의 몸과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져서 더는 진평평을 안고 있지 못할 것만 같았다.

범한은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채로 진평평을 안고 잔디밭을, 꽃나무를, 네모난 작은 호수를 지나 외딴곳으로 왔다. 그곳 담벼락에 꽃이 피어 있자 범한은 아직 활짝 피지 않은 작은 노란 꽃 한 송이를 살포시 땄다.

그런 후 손을 뻗어 담벼락 한쪽 귀퉁이를 가볍게 눌렀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났다. 그리고 지면에서 작은 구멍이 서서히 나타났다. 범한은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이때 하늘에 있는 태양은 아래쪽에 있는 마르고 쾌적한 석판 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태평 별장에는 밀실이 있었다. 분명 저 노인들에게는 비밀은 아닐 것이었다. 과거 아직 나이가 어렸던 장 공주도 별원에서 하나를 찾아냈을 정도니 말이다. 과거 섭가 사변 이후 황제는 분명 별원으로 찾아와 상자의 행방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찾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별원과 관련해 줄곧 이상한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그는 더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한편 범한에게는 이 비밀 통로가 익숙했다. 여러 해 전 그 상자를 연 후 오죽 아저씨가 그를 태평 별장에 데리고 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범한은 이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그 부지깽이에게 제일 필요한 탄알을 찾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마치 저승길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고작 지면으로부터 3장 떨어진 밀실일 뿐인데 말이다. 실내는 건조하고 상쾌하고 깨끗했다. 다른 귀한 보물 같은 건 없었고 의자 몇 개와 관(棺)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범한은 한손을 관 가장자리에 대고 살짝 힘을 주어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런 후 품에 있는 노인을, 허약한 몸을 그 안에 조심스레 넣고는 작은 도자기 베개를 가져다가 뒤통수를 받쳐주었다. 관 안에 비단이 놓여 있었지만 범한은 고개만 살짝 갸우뚱하고는 그걸 진평평에게 덮어주지는 않았다.

진평평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벌거벗은 몸에는 범한이 벗어준 감찰원 관복만 덮여 있었다. 범한은 관 옆에 말없이 서서 진평평의 홀쭉한 양 볼과 쑥 들어간 눈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덮어준 시커먼 옷이 저 화려한 비단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시커먼 옷은 감찰원 관복이자, 범한이 입고 있던 걸 벗어준 거였다. 그러니 그건 감찰원 원장이 입는 복장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진평평의 이번 생을 자기 맘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감찰원 원장의 신분으로 죽는 편을 더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범한은 그렇게 조용히 관 옆에 서서 깊은 잠에 빠진 진평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서 비 내리는 사형장에서 노인이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어 간 것과 잠들기 전에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쥔 것을 떠올리며 자문해 보았다. 분명 두렵지는 않았겠지?

늙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에게 불현 듯 여러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이 양털 담요로 무릎 덮기를 좋아하는 노인은 비개에게 자신을 가르치도록 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험악한 세계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을 배우도록 했으며, 또한 자신에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감찰원의 모든 조례와 기관에 대해 익숙해지도록 했다. 대략 자신이 태어난 그 날부터 노인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감찰원을 범한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이미 계획을 다 세운 거였다.

범한이 진평평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감찰원의 어두운 방 안에서였다. 분명 두 사람에게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하지만 범한은 의자에 앉아 있는 늙은 절름발이가 오랫동안 만나뵙지 못한 손윗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애초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은 친근감이 형성되었다.

그날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마르고 약한 진평평과 가볍게 포옹하고, 얼굴을 맞댔었다. 오늘 진평평을 안아주고 그와 얼굴을 맞댄 것처럼 말이다.

야트막한 호수 옆에서 천하를 논하고, 작은 꽃을 희롱하고, 진원에서 서로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쫓고 춤을 추고. 이제 더는 할 수 없겠지?

범한은 더는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어 눈을 꼭 감아버렸다. 하지만 이내 두 눈을 뜨고는 몸을 굽혀 들고 있던 조금 덜 핀 작고 노란 꽃송이를 진평평의 귓가 백발 사이에 꽂아 주었다.

* * *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범한이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관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옆에서 대못을 가져다가 관 뚜껑 가장자리에 대고는 손바닥에 기운을 불어 넣고 단번에 내리쳤다.

이렇게 나지막한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렸다. 범한이 모든 대못을 말없이 손바닥으로 내리쳐 다 박아버린 거였다. 범한은 관을 못으로 단단히 봉해 노인을 다른 세계에, 자신과는 더는 접촉할 수 없는 세계에 가둬버렸다.

모든 일을 마친 범한이 검은색 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노인을 고향으로,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경치 좋은 산으로 돌려보내 줘야 했다. 영원히 경도 부근 어둠 속에 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평 별장에 와 있으니 진평평 입장에서는 분명 좋아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여기는 경도로부터 그리고 황궁으로부터 너무 가까웠다.

범한이 살짝 몸을 휘청였다. 끝없는 피로와 권태감이 치고 올라와서였다. 이에 범한은 옆에 있는 키가 높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두 다리를 의자 가장자리 위에 얹은 후 머리를 양 무릎 사이에 깊이 묻고, 양손은 옆으로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못에 찢긴 왼쪽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가 똑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범한은 머리를 양 무릎 사이에 묻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무렵, 위쪽 태평 별장 잔디밭에 쌓여 있던 빗물이 돌계단을 타고 흘러내려 매 계단을 적시고 싸늘하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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