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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76화 (976/1,108)

976화 빗속에서 진평평과의 이별 (1)

초가을 비가 갈수록 거세졌다. 빗방울은 땅바닥에 떨어져 물꽃으로 피어났고, 몸으로 떨어져 옷을 적셨으며, 심장으로 떨어져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을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에 몽롱한 빗줄기에 휩싸인 황궁 앞 광장에서는 보이는 거라곤 물에 젖은 세상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가을비를 맞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대로,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방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어떤 감정에 감염 되어 통제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구 하나 말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모두의 눈빛이 무겁게 둘러싸인 희뿌연 한 빗물을 뚫고 대 위에 모여 있던 거였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금군, 궁정 고수, 그리고 경묘 고행자가 긴장되고 숙연해져 있는 가운데 나무토막으로 만든 사람처럼 빗물을 맞으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

조금 전 찰나의 순간, 수 명이 작은 범 대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제일 관건은 살을 에듯 빗물이 내리치는 가운데 황성 꼭대기에 계신 구오지존의 눈동자가 어떤 색깔의 기분을 반짝이고 있는지 그들로서는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언빙운은 아까 범한의 형체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대응에 들어간 터였다. 곧이어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비하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한껏 낮춘 음성으로 옆에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분부를 내렸다. 빗소리 덕분에 언빙운의 말을 엿들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복장으로 위장한 감찰원 밀정 몇몇은 이미 군중들 사이에서 사형장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황성 위아래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조금 전 범한이 피를 부르며 말을 몰아 들어오고, 빗속에서 폭발해 검을 뽑아 들고, 옷을 벗어 노인의 몸에 덮어 주는 놀라운 광경을 모두 본 터였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황성 아래쪽에 있는 사람 중 지위가 가장 높고, 형 집행을 감독하고 있던 하종위였다.

범한이 인산인해 속으로 말을 몰고 들어올 때, 하종위는 그 즉시 행동에 나섰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되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지 않는 몸놀림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대 근처에서 떨어져 나와 관원과 호위들 뒤로 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수많은 고수들 너머로 그리고 그들의 젖은 어깨와 삿갓 틈새를 통해 대 위에 있는 범한이 처량하게 비쩍 마른 진평평을 외롭게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하종위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그는 단지 죽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무 대 위에 있는 늙은이와 젊은이 두 사람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그런데 죽고 싶지 않았던 이는 하종위 말고도 많았다. 지금 나무 대 위에 있는 범한은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건 천지간에 살을 에일 듯 추위를 몰고 온 가을비도 막지 못했다. 이에 모두들 본능적으로 나무 대 앞을 떠났다.

요 태감의 경우는 일찌감치 대열 안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작은 공작 어르신께서 진평평을 추도하는 데 쓸 잡종개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무로 만든 대 주변에는 시체 몇 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핏물은 가을비를 맞아 색이 빠르게 희석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대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작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망나니가 범한과 가장 가까이 있게 되었다. 그는 작은 대 위에 있는 범 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본 작은 범 대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진 노원장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의 다른 소리나 기척은 느끼지 못하는 듯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대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고작 두 발짝 뒷걸음쳤을 뿐인데. 망나니의 목이 ‘처걱!’ 소리와 함께 잘려나갔다. 빗물 속으로 머리가 무겁게 떨어져 내리자 머리 없는 시체가 곧이어 육중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 대 위를 주시했다. 그런데 무공이 고강한 자들만 조금 전 찰나의 순간에 범한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여 검은색의 비수가 날아가 빗속으로 떨어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 * *

범한이 대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만인의 시선 한가운데 앉은 거였지만 그 어떤 시선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진평평의 몸을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떨어지는 빗물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굽은 그의 등은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품 안에 있는 노인의 몸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품 안에 바람을 안고 있는 기분이어서 바람이 불어오면 곧바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에서 창백한 얼굴이 살짝 씰룩거리더니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쭉 뻗어 진평평의 차갑고 늙은 손을 쥐었다. 그리고 손을 꽉 움켜쥐고는 더는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이 한 세상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모르겠으나, 노인은 장애가 생긴 몸으로 반평생을 사느라 체내 기혈도 일찌감치 쇠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능지처참을 당해 살점이 잘려나가는데도 통증은 차치하고서라도 피가 많이 나지 않은 거였다. 하지만 여러 차례 살점이 도려내지다 보니 결국에는 핏물이 한곳에 고여 범한이 덮어준 감찰원 관복으로 스며들었다. 진평평의 피는 살짝 진득했고, 살짝 뜨거웠으며, 살짝 화끈거렸다.

범한은 가을비를 맞으며 마른 몸을 살포시 끌어안고 있었다. 진평평이 아플까 걱정되어서였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찬 손은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진평평이 지금 이대로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본인이 돌아오려 노력하시지 않는데 누가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왜 저를 동이성에 묶어두려 하신 겁니까?”

범한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짝 마른 입술 사이에서 빗물 때문에 흰 거품이 일고 입술 껍질이 들뜨고 벗겨져 누가 봐도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제가 요 몇 년 동안 누구 때문에 이리 고생하고 바삐 지냈는데요! 노인분들께 경도에서 떠나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드리려 한 거였건만. 그것 때문에 계속 노력했건만…….”

“당신이 아는 건 저도 다 안다고요.”

범한이 고개를 더 숙여 주름이 가득한 노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살며시 가져다 댔다. 그런 후 빗물 속에서 그의 몸이 부드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품안의 노인을 재우기 위해 어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손이 조였다. 노인의 손이 있는 힘껏 범한의 손을 움켜쥔 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노인에게는 남은 생명력을 모두 다 쓴다 해도 손 하나도 꽉 쥘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미련이 남아서인지, 아니면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으나 비바람이 불고, 땅에 핏물이 가득한 가운데 진평평은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싶어 했다.

범한은 칼이 심장을 서서히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 같은 싸늘한 공포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품안의 노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대방이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하리란 걸 알 수 있어서였다. 이에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에게 은근히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진평평의 혼탁하고 초점 없는 눈빛이 빗물 속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익숙한 황궁이며, 구름이 가득 들어찬 하늘, 황궁 성벽 위에 있어서 보일 듯 말 듯한 제왕의 형체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진평평은 마지막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범한의 얼굴을 보았다. 혼탁했던 노인의 눈이 순간 맑아지더니 한 가닥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인은 자신이 평생 살았던 세상에서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눈앞의 광선도 점점 기이한 형상의 환영처럼 변해가서였다.

바로 이 순간, 어쩌면 전기적이라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일생이 눈앞에서 영사기 돌아가듯 빠르게 지나갔다. 작은 내관, 동해, 그 여인, 감찰원, 흑기, 그리고 한 여인, 죽음, 음모, 복수. 각양각색의 화면이 그의 눈앞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가더니 어느 순간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흰 선으로 합쳐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죽기 전에 대체 무엇을 보았으며, 가장 보고 싶어 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성왕부에서 싸울 때 튄 진흙일까? 겨울이면 태평 별원에 성대하게 피는 매화일까? 감찰원의 네모반듯한 음산한 건물 후원에 있는 연못에서 유유자적하며 놀고 있는 작은 물고기일까? 북방의 군산(群山)에서의 궁궐 복장일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과 희망을 모두 건 담주성의 어린 남자아이일까?

비바람 소리가 나는 가운데 진평평에게 문득 어떤 소리들이 들렸다. 노랫소리였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그가 진원에서 무수히 들었던 노랫소리이기도 했다. 희첩들은 모두 미인이었고, 노랫소리도 항상 아름다웠는데. 노인은 평생 어둠속에서 냉혹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가장 사랑했고, 그것들을 수집하려 했다. 만약 인간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훼손하는 게 비극이라면, 진평평은 이번 생에서 그 스스로 추하고 더럽다고 생각한 것만 훼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몸을 던진 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빗소리를 들으면 누가 가장 즐거워할까? 산을 넘고 고개를 넘지만, 빗속에 즐거운 노랫소리가 숨어 있으니, 노랫소리를 듣는 내 마음은 즐거워라…….”

이는 진원에 있는 여인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로 비바람 속에서 진평평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힘겹게 두 눈을 뜨고 이 자리에 있는 하늘과 땅,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핏기가 없는 양 입술을 아주 살짝 뻐끔 거렸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진평평이 갑자기 범한을 바라보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상자는……?”

범한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어보이고는 노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총입니다. 아주 멀리서도 살인할 수 있는 화기(火器)지요.”

진평평 인생에서 마지막 남은 의문일 것이었다. 그렇기에 죽기 직전에 물은 것일 수도 있었다. 범한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눈에서 살짝 빛이 발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나와 의외인 듯, 또 해탈한 듯했다. 그가 목구멍에서 커억커억, 하는 소리를 내며 급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냉혹함과 오만함이 살짝 담긴 기색으로 말했다.

“그…… 장난감…… 나…… 도 있다.”

범한은 더는 말을 않고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진평평을 조심스레 안고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품 안에 있는 늙은 몸뚱이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질수록 차가워지는 손바닥을 더 꽉 쥐었다. 그의 그런 행동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러니까 더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진평평이 죽었다. 그것도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가장 아까고 사랑하는 어린 남자 아이의 품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상자의 비밀까지 알게 되었건만. 그런데도 얼굴에 싸늘하고 오만한 안하무인격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범한은 점점 식어가는 몸을 가만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노인의 싸늘하게 식은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댄 채 자그마한 소리로 몇 마디 건넸다. 그러자 하늘의 비바람이 갑자기 칼이 되어 그의 몸을 찌르고 갈랐고, 범한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런데 이 통증은 그의 심장에서 나와 모든 근육으로 직행한 거였고, 마치 능지처참을 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에 범한은 결국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나무로 만든 작은 대 위에서 갑자기 통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장을 찌르고, 간장을 에고, 폐부를 찌르는 듯한 소리였다. 범한의 구슬픈 곡소리에 가을비마저도 더는 감히 떨어지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더는 들어주기 힘들 지경이었으며…….

환생 후 20년 동안 범한은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몇 차례 눈물이 눈가를 적신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억지로 참아냈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가 우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이처럼 온 힘을 다해, 그것도 온갖 비애와 슬픔, 갖가지 감정들을 밖으로 쏟아내며 우는 걸 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눈물은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대신 얼굴에 묻은 먼지를, 가을비조차 깨끗하게 닦아내 주지 못한 먼지를 닦아내 주었다.

가을비가 멎을 수 없는 것처럼 눈물도 멎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끝도 없는 슬픔이 그렇게 그의 눈가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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