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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73화 (973/1,108)

973화 쉴 틈이 없는 영웅을 비웃다 (4)

수일 전, 이 대륙에 마지막 더위가 남아 있을 무렵인 동시에 아직 첫 가을비가 내리지 않은 때였다. 그때는 해가 없는 새벽과 저녁때나 되어야 언덕, 야생의 숲, 밭 사이로 가을 기운을 살짝 실은 가을바람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근심이 인다고 하는데, 그때 범한에게는 지나친 근심 같은 건 없었다. 길게 늘어선 검은색 마차 대열에 사이에 있으면서, 덜컹이는 마차 때문에 졸기나 했다. 그런데 그 졸음은 가짜였다. 정신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단지 눈만 감은 채 체내에 있는 성질이 다른 두 개의 정기를 두 개의 순환로를 따라 위아래로 흐르도록 해 정기를 단련한 한 거였다.

천일도의 자연스러운 정기 법문을 공기 중으로 운기 시키자 온유하고 순수한 정기가 생각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범한이 의지하고 있는 건 강대한 패도의 정기였다. 그래서 패도의 정기가 체내 곳곳을 운행하며 그의 신체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그의 마음을 방망이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고검이 죽기 직전에 전해준 작은 책자의 내용은 범한의 머리 안에 제대로 들어가 있었다. 이에 범한은 경도로 가는 동안 수련을 하고 동시에 그 작은 책자 속 현묘한 말들을 따라가 보았다. 이에 그는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고 사방 허공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또는 있을지도 모르는 원기의 파동을 느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많은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건 어쩌면 여정 중에 피로가 누적되어서일 수도, 또 어쩌면 동해 바닷가에 천지의 훌륭한 기운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또 그 덕분에 외부에 있는 것을 민감하게 촉각으로 감지해 내는 속도는 빨라져 있었다.

범한은 단 하루도 명상을 게을리하거나, 힘든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날과 같은 실력과 지위를 갖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바람이 마차 가림막 안으로 밀고 들어와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살짝 떨리고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범한이 실눈을 뜨고 어둑어둑해진 산과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체내에 모여 있던 정기를 천천히 진정시키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 있도록 한 정신을 거둬들였다. 동이성의 일은 대체로 가닥이 잡혔고, 아버지는 십가촌을 떠나 담주로 돌아가셨다. 경도는 아무 일 없이 조용했으며, 진평평 그 늙은 절름발이는 귀향길에 올랐을 터였다. 그러니 모든 게 범한이 바라던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중인데, 왜 그런 기분이 든 거였지?

맑고 수려한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동이성을 떠난 후부터 동이성 속국의 의병들이 길을 따라 습격을 해오는데, 이는 범한이 봤을 때 유독 이상한 일이었다. 이들이 필사의 각오로 경국 권신을 습격하고 있다지만, 범한 주변에는 강력한 방어 역량과 더불어 1 황자가 호위를 위해 내준 병사 천 명이 있었다. 그러므로 수일간 연속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결국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비틀거리며 뜨거운 피를 흩어버리는 쪽은 의병들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경계한 건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었다. 일단 범한은 동이성을 떠나 경도로 돌아갈 때 은밀한 노선을 택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동이성 쪽에서 관련 정보를 알아낸 후 길을 따라 습격할 이들을 포진시켜 놓았다고는 해도, 이는 지극히 강대한 정보 체계가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순간 범한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그리고 범한은 지극히 오싹한 판단을 도출해 버렸다.

‘감찰원 내부에서 누군가가 동이성 속국 의병들에게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 게 분명해! 더군다나 이번 일은 내가 동이성을 떠나기로 결정한 후 곧바로 시작된 거였어!’

이제 보니…… 경도에 있는 어떤 세력들이 자신이 경도로 돌아오는 걸 막는 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력들은 범한이 경도로 돌아오는 속도만 늦추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경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대체 나와 무슨 관련이 있기에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내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거지?’

범한의 눈동자에 깃든 싸늘한 기운이 어느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범한은 걸치고 있던 얇은 외투를 무의식적으로 끌어당겨 몸을 더 꼭 감쌌다.

감찰원 내부에 문제가 일도록 할 수 있는 건 딱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황제 폐하이고, 다른 하나는 진평평이다. 경도로 돌아가는 자신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도 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니 경도에서 일어난 일이 분명 황제 아버지와 진평평과 관련 있다는 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였다.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강한 걱정이 일어 결정을 내려 버렸다. 그가 마차 옆에서 말에 타고 있는 목풍아에게 분부했다.

“진을 변경하게. 칼날 대형으로 길을 열고, 길을 따라가되 저들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지 말게나. 제일 빠른 속도로 연경으로 돌아가야 하네.”

목풍아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공격을 뚫고 국경으로 들어가면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속도를 내면 다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작은 범 대인을 쓱 바라보았다. 대인께서 분명 무슨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셨기 때문에 서둘러 경도로 돌아가시려 하는 걸로 보였다. 이에 목풍아는 더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귀경길에 나선 기다란 대열을 향해 전속력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동이성에서 경도로 가는 대로에서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반 시진도 못 가 전체 대오의 속도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전방에서 경고하는 화살 소리가 울려서였다. 작은 범 대인을 호송하는 대열은 요 며칠 동안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급습과 매복 공격에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이에 경고용 화살 소리가 갑자기 울렸음에도 이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경고 차원에서 날려 보낸 화살은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고작 한 발이 끝이었고, 곧이어 들려온 건 마차 열 앞에서 뒤로 이어지는 “안전합니다!”라는 고함 소리였다.

감찰원의 안전하다는 외침은 짧은 시간 안에 신속히 전달되었다. 뒤에 있는 동료들이 정보를 전달하러 온 사람을 오인해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보를 전달하러 온 사람은 엄청나게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마차 대열 전체의 방어 역량은 요패를 잠시 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전합니다!”

제일 마지막 외침이 범한의 검은색 마차 옆에서 울릴 때 옅은 회색의 사람 형체가 전광석화처럼 마차 옆을 사선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 대열은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정보를 전달하러 온 자의 날랜 정도는 감찰원의 구호 전달 속도와 거의 비슷해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목풍아는 계년조 소속으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범한을 친히 호위하는 대장이었다. 이에 경계하는 차원에서 칼자루를 쥐고는 이제 막 마차 옆으로 다가온 감찰원 관원을 주시했다. 관원은 바람과 모레를 헤치고 달려와 그런지 한껏 초췌한 모습이었고, 더군다나 낯선 사람이었다. 이에 목풍아는 경계를 한 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관원이 요패를 든 손을 계속 치켜들고 있어, 목풍아는 깜짝 놀랐음에도 그가 마차 위에 올라가려는 걸 막지 않았다.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낡은 옷을 입은 감찰원 관원이 범한이 탄 마차로 쏙 들어갔다. 그런 후 곧바로 무릎을 꿇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진 원장께서 경도로 돌아가고 계시며, 아직 생사는 모릅니다!”

* * *

정보를 전하러 온 관원이 전광석화처럼 또 가벼운 바람처럼 마차 옆에 나타나자 범한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재빠른 몸놀림을 가진 관원이 누구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은 과거에 그와 가장 가까이 지낸 부하로 수년간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왕 씨…….”

관원이 마차 칸으로 들어오자 눈동자를 반짝이던 범한은 기뻐하며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왕계년의 보고와 함께 툭 끊기고 말았다.

범한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이내 응고되어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얼음이 되어 버렸다. 범한이 무서우리만치 싸늘하고, 두려우리만치 한기가 일렁이는 눈을 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느 지점에서, 또 언제 경도로 방향을 트셨단 말입니까?”

왕계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는 감찰원의 양 날개 중 하나로 달주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출발해 동북 지역까지 사선 방향으로 뚫고 들어온 터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쉬지 않아 피로가 극에 달했음에도 숨만 헉헉 몰아쉬며 달린 끝에 드디어 범한과 만난 거였다. 이에 왕계년은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노원장이 언제 경도에 도착할 것이며, 또 범한에게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물은 것임을 이해한 터라 왕계년은 일단 대답부터 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런 후 다시 눈을 떴다. 진평평이 경도로 압송되어 갈 대략적 날짜 및 자신이 서둘러 연경으로 돌아간 후 다시 최대한 빨리 경도로 갈 수 있는 시간 계산을 마친 거였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려나? 범한의 눈동자에 담긴 한기가 갈수록 짙어졌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왕계년을 범한이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회의 기쁨에 들떠있었는데, 이제는 강력한 원망이 모든 걸 덮고 있을 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진평평을 위해 범한은 호위 인력까지 친히 안배한 터였다. 그러니 감찰원이 보호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황제 아버지께 잡혀갈 수 있단 말인지!

범한은 달주에서 발생한 일이란 게 단지 진평평이 직접 경도로 돌아가 황제 폐하께 몇 가지를 물으려 한 것뿐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상황이 긴박해지자 범한이 냉담한 얼굴로 창가에 서 있는 목풍아에게 말했다.

“대열 전체는 동이성으로 돌아가고, 1 황자 마마께는 다음과 같이 전해드리게. 나의 친필 서한이 아니면 영원히 경도로 돌아오지 마시라고 말이네.”

진평평이 다시 경도로 돌아갔다는 걸 안 후부터 첫 번째 명령을 내리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가장 먼저 이 거대한 마차 대열 문제부터 해결한 후 동이성에서 만에 달하는 병사를 데리고 있는 1 황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일러둔 것이었다.

명령을 내려놨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책임지고 처리할 터. 이에 범한은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가 호화로운 검은색 마차 내의 격자판 안에서 물주머니를 꺼내 허리에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했다.

* * *

검은색 마차 칸이 갑자기 해체 되고, 앞쪽에 강판을 대지 않은 나무 벽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면서 검은색의 사람 형체가 나타났다. 그 형체는 검은 번개처럼 마차에서 나와 발끝으로 말 머리를 짚은 후 허공에서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사선 방향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한시가 아쉬웠던 범한은 체내 패도 정기를 최정점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방금 전 약간 깨달은 법술의 도움을 받아 한 마리 새가 되어 공중에서 공기 흐름을 타고 검은 그림자처럼 질주했다.

마치 번개가 지나가듯 범한은 발끝으로 감찰원 관원의 정수리를 밟고 훨훨 날아 순식간에 대오 최전방까지 갔다. 그리고 이는 범한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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