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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70화 (970/1,108)

970화 쉴 틈이 없는 영웅을 비웃다 (1)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언빙운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옆에서 하종위가 아무런 걱정 없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찰원 감옥은 이미 군대 쪽에서 완벽하게 통제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감찰원 내부에서 어떤 불안 요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끌어줄 수장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아래 있는 진평평을 구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어가는 진평평의 몸을 바라보던 하종위는 순간 서늘한 느낌에 인상을 구겼다. 이번 일의 시작은 그가 범한을 공격할 빌미를 찾으면서 시작되었지만, 결과는 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살짝 난처한 기분이 든 하종위는 자신이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계속 가서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결말이 무엇일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끝은 지금 눈앞에 누워 있는 절름발이 노인처럼 벗어날 수 없는 처참한 말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종위는 반드시 끝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황제 폐하가 그에게 범한과 대립하는 역할을 맡긴 이상 그는 이미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궁 안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을 때 그는 일부러 진평평과 감찰원의 죄명이 바뀔 수 없도록 소리쳤고, 뒤늦게 도착해 진평평의 참혹한 죽음을 본 범한이 미쳐 날뛰기를 바랐다.

경국 조정의 문무백관들과 핵심 인물들이 하나 같이 이번 일로 범한이 미쳐 날뛸까 걱정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하종위는 오히려 범한이 미쳐 날뛰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범한이 몰인정하게 진평평의 죽음과 감찰원이 받은 굴욕을 외면한다면 그는 기존처럼 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모두의 위에서 호령하는 담박공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거였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살스럽고 온정 없이 행동하는 담박공은 하종위가 대면하고 싶은 적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종위는 범한이 뜨거운 피가 아직 남아 있는 젊은 권신이기를 바랐다. 마음에 남아 있는 온정 때문에 폐하와 사이가 갈라서야 그가 폐하 옆에 서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하종위가 깊이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언빙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대학사, 밖에 네 명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모르십니까?”

하종위가 언빙운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언빙운이 말하는 네 명의 사람이 삼베옷을 입고 삿갓을 쓰고 있는 신비로운 인물들을 가리키는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황제 폐하의 교지를 가지고 있는 네 명은 금군보다 권한이 높아서 진평평을 감시하는 임무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다만 황궁 안 어디에서 갑자기 네 명의 고수가 등장한 건지는 아무도 몰랐고, 하종위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언빙운을 바라보던 하종위는 속으로 다른 생각에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과거 황제 폐하는 조정에 새로운 인재들을 영입할 당시 칠군자를 황궁에 불러 한사람 한 사람에게 신중한 부탁을 했다. 그중에서 집안이 반란을 일으켜 흑기 수장인 은색 가면을 쓴 형과에게 처참하게 죽은 진항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은 점점 조정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 폐하가 미래를 위해 마련해둔 사람들이었다.

이 여섯 명 중에서 가장 선두에 올라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명성과 지위가 가장 높은 하종위였다. 하지만 오늘 언빙운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보니 하 대학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종위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유리한 진영을 선택하는 걸 잘하고 자신의 본심을 감쪽같이 숨기고 있다가 움직여야 할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악랄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 말이다.

진평평이 황제 폐하를 시해하기 이전에 언빙운은 이미 감찰원 내부의 반응에 대응할 여러 방법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하종위는 적지 않게 놀랐고,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작은 언 공자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정 없이 차가운 성품을 가진 냉혹한 사람임이 틀림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더욱 두렵게 만든 것은 이번 일에 대해서 작은 언 공자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바꿔 말하자면 황제 폐하가 작은 언 공자를 자신보다 더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면 언빙운은 옆에 앉은 하 대학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복잡하면서도 차분한 눈빛으로 감방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감방에 누워 있는 노인은 평생 경국을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하며 자신이 모든 정력을 쏟아부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과거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며 여러 차례 중상을 입은 그는 두 다리까지 못 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백발이 되어 힘없이 누워 있는 그의 생명은 지금 아주 빨리 고갈되고 있었다.

오늘 어서방 안에서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분노를 표출한 황제 폐하는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청와 찻잔을 날려 진평평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했다. 태의가 뭐라 말을 하든 언빙운은 진 원장의 목숨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황궁에서 진귀한 약재로 목숨을 늘리지 않았다면, 내일 법정이 열리기도 전에 진 원장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할 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언빙운의 눈에서 다른 사람은 알아채기 힘들 만큼 어렴풋하게 번뜩였다.

바로 그때 의식이 없던 진평평이 몸을 갑자기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태의가 황급히 다가가 진맥을 했다. 한참 뒤에 힘겹게 두 눈을 뜬 진평평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피고는 마른 입술을 움직여 어렴풋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평평이 광채라고는 조금도 볼 수 없는 혼탁한 눈을 굴려 차가운 눈빛으로 언빙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빙운 역시 똑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평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산속에 있으면 세월 가는 줄 모르듯이 지하에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유로 만든 횃불은 온 사방을 밝히며 불타고 있는 가운데 감찰원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밤이 되어서도 잠이 들지 못했고, 숨이 막히는 밤이 지난 뒤에는 참기 힘든 피로감을 느껴야 했다.

피곤한 두 눈을 비비던 하종위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보려 고개를 들었지만, 눈에 보이는 건 두꺼운 돌벽뿐이었다. 비로소 자신이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지하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감방 뒤쪽 돌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교지를 읽으러 온 어린 태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태감의 등장에 하종위의 표정이 굳었다. 반대로 태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고, 진평평을 간호하던 태감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빙운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여전히 무표정했다. 죄인 진평평을 감시하던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

이미 동쪽 구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해는 따뜻한 햇볕을 경도 건물에 쏟아내고 있었다. 감옥에서 나와 새벽빛 아래 선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잔뜩 긴장해서 밤을 꼴딱 새운 탓에 하종위와 언빙운은 말할 것도 없고 방어를 책임진 금군들도 모두 정신적으로 피로도가 최고조로 이른 상태였다.

하종위가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온몸에 갑옷을 두른 수백 명의 금군 사이를 가르며 검은색 마차가 감옥 입구에 멈춰 섰다. 이윽고 들것 위에 누운 진평평이 마차에 올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휘황찬란한 황궁을 바라보는 언빙운은 조회가 이미 열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각 관아의 대신들은 태극전 안에서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진평평의 대역무도함을 질타하고 있을 거였다. 문신들은 오랜 시간 준비한 죄명을 마침내 늙은 검은 개에게 씌울 기회를 가진 것이었다.

죄인 진평평이 감옥에서 나와 죽음의 길에 올랐고, 감시 임무를 맡은 병사들이 엄숙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포위했다. 가장 뒤에 남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언빙운과 진평평의 심복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진평평의 옆을 수십 년 동안 지키고, 진평평이 경도로 돌아오는 길에도 동행했던 늙은 종은 어젯밤에 자신이 모시던 주인과 함께 감찰원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수십 년 동안 모셨던 주인이 법정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감방 벽이 온통 피로 물들 때까지 머리를 박아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 받은 언빙운은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물을 사람들 앞에서 흘리지 않기 위해 황성에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든 그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경도 하늘을 뒤덮는 걸 지켜보았다. 얼마 뒤 붉은 해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경도 건물 위에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다시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량한 가을비가 흐릿하게 떨어졌다. 그러자 경도 거리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푸른 나무는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은 나뭇잎을 몇 개 떨어뜨림으로써 가을비가 얼마나 추운지, 또 가을바람이 얼마나 세찬지를 알려주었다. 빗물이 서서히 대지를 적시자 저자에서 힘겹게 삶을 꾸리는 백성들은 신경질이 났다. 가을비가 추위를 몰고 와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 탓이었다.

주홍색의 황궁 담벼락은 가을비가 차가운지 따뜻한지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쏟아지는 빗물을 덤덤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에 웅장한 황성은 점점 스며드는 빗물에 선명한 주홍빛에서 점점 짙고 어두운 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건 마치 혈흔이 굳었을 때 나오는 색상 같았다.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는 황궁 문이 찌그덕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큼지막한 나무문에서 새로 수리할 때 박아 넣은 황동 못이 반짝이는 가운데 백여 명의 관원이 복잡한 표정으로 줄줄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모두 의장(儀仗)의 인도하에 어도(御道)를 따라 광장에서 한참을 걸어간 후 양쪽으로 나누어 길게 늘어섰다. 이들은 모두 경국 조정 대신들로 이 나라의 모든 사무와 민생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씨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침묵하는 방관자만 될 수 있었다.

누런 궁궐 문 근처에 있던 어린 내관이 채찍을 소리 나게 세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황성 각루 모처에 있던 북이 동동, 하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웅웅, 하는 떨리는 소리가 황성 위아래에 있는 사람들 마음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조회는 이미 끝났다. 오늘 조회에서는 딱 한 건만 처리했고, 그것은 바로 감찰원 전임 원장인 진평평의 죄명을 정하는 것이었다.

* * *

황성에 있는 거리와 골목을 따라 수없이 많은 경국 백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제각기 다른 색상의 옷을 입은, 제각기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황궁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의 부름을 듣고 천천히 광장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넓은 광장에 개미 떼가 가득 몰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오늘 경도부 및 각급 관아에서는 아직 날이 밝기 전인 새벽부터 북과 징을 쳐대고 방을 붙여 이날 경도에서 일어날 일을 일찍부터 백성들에게 알렸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칼 맞을 일만 없으면 되는 것이므로, 이 좋은 구경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모두 알다시피, 오늘 극형에 처해지는 고관은 내내 신비함을 유지하고 있던 감찰원 전임 원장 진평평 이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더더욱 흥미를 갖고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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