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968화 (968/1,108)

968화 경도의 혼란, 이리저리 흔들리는 붉은 촛불 (2)

임완아는 등자경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범한에게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계년조 요원을 보내기는 했지만, 길이 먼 탓에 범한이 아무리 빨리 돌아온다고 해도 진평평의 사형을 막을 수는 없을 거였다. 임완아는 범한의 온화한 겉모습 안에 숨겨진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진평평의 이대로 사형당한다면 범한이 얼마만큼 과격한 반응을 보일지 누가 알겠는가?

범한이 과격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임완아는 지금 잔뜩 긴장해서 모든 일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자네는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말게. 내가 잠시 뒤에 직접 입궁해서 상황을 살펴볼 생각이니까.”

임완아가 등자경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등자경이 한숨을 쉬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차를 따라갔다.

저택 안으로 돌아온 임완아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범씨 집안 안에 있는 모든 호위병과 종과 일꾼들을 불러 조심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아무와도 사담을 나누지 말라고 지시했다.

범씨 집안 주인마님인 임완아는 천진난만하고 성격이 좋기로 유명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이미 집안에서 위신이 서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모두들 범씨 집안이 오늘 경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일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임완아가 눈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집안에서 동원 가능한 힘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했다. 저택 안에는 계년조 요원 몇 명 남아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6처 검수들도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범씨 집안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라서 함부로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어제 대보가 귀뚜라미를 묻겠다고 이전 임씨 저택으로 간 것이었다. 오늘 경도 안에서 큰일이 터졌으니 얼른 사람을 보내서 데리고 와야 했다.

고민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손짓으로 계년조 요원을 불러 지시했다.

“1처 쪽에도 사람을 보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연락만 유지하라고 하게.”

비록 감찰원 쪽에서 소식이 전해진 건 없었지만, 임완아는 황제 삼촌이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해 음산한 정방형 건물을 장악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1지점 근처에 있는 대리사에 오히려 빈틈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임완아가 지금 진행하는 모든 일은 범한을 위한 준비였다. 그녀는 경도로 돌아온 범한이 가장 먼저 일의 진상을 파악하려 할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범한이 모험을 하거나 미쳐 날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상공이 미쳐 날뛰게 될 걸 대비해서 아내로서 사전에 필요한 준비를 해둘 수밖에 없었다.

모든 안배가 끝나자 임완아는 범씨 집안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 지시했다. 교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뒤에야 임완아는 살짝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잠시 뒤 그녀가 탄 마차가 경도 남성 대로를 거쳐 오늘따라 유달리 스산해 보이는 황성을 향해 북쪽으로 달렸다.

* * *

오늘 황궁의 경비는 아주 삼엄했고, 금군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주 삼엄하게 순찰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해 잔뜩 굳어 있었다. 진 원장이 중상을 입어 체포되었음에도 모두들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임완아가 직접 황궁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황태후와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황궁에서 자랐기에 평상시에는 마음대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황궁 문 앞에서 멈춰서 대기해야 했다.

금군 대통령 궁전이 임완아를 보고는 아주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인사를 한 뒤 조심히 말했다.

“폐하께서 오늘은 황궁을 봉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임완아가 고개를 들었다. 잔잔한 호수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크고 동그란 눈으로 궁전을 바라보며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 공격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군주가 입궁해 문안을 올리려는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까?”

궁전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오늘 궁의 봉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게다가 신 군주는 폐하가 가장 아끼는 조카였으니 입궁을 하는 게 맞았지만, 문제는…… 오늘 사건과 감찰원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하 모든 사람들이 신 군주가 이번에 감찰원 원장으로 부임한 범한의 정실부인이라는 걸 아는 상황에서 입궁을 허락했다가는…….

“본관은 폐하께서 군주를 보고 싶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궁전이 나지막이 말했다.

궁 장군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챈 임완아는 심장이 살짝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궁전은 임완아가 입궁해 황제 폐하 앞에서 진평평에게 선처를 호소할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지금 상황에서 누구든 황제 폐하에게 선처를 호소한다면 오히려 황제 폐하의 화를 더 돋울 수 있었다. 게다가 신분이 특별한 임완아가 선처를 호소했다가는 오히려 갈등만 더 심해져서 감찰원은 물론이고 지금 경도에 없는 범한한테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이에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하던 임완아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몇몇 대학사들도 황궁 안에 있다고 하고 정왕야께서도 입궁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저도 들어가서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궁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분수에 맞게 행동할 줄 안답니다.”

궁전이 한숨을 쉬고는 뒤에 있는 사병에게 길을 열라고 지시했다.

황성에 들어가자 후궁까지 가는 건 순조로웠다. 어찌나 발걸음을 재촉했는지 황제 침궁 앞에 도착했을 때는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혀 있고 두 뺨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전 앞까지 도착했다고 해서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임완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의 귀빈이 3황자의 손을 잡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굳게 닫힌 대전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1 황자의 생모인 영 귀비도 굳은 얼굴로 궁녀들을 데리고 한쪽에 서 있었다.

정왕야도 대전 앞에 서서 섭중게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돌계단 오른쪽에는 조정 문관 수장이 호 대학사가 어두운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문하중서 대학사 두 명이 있었다. 하종위는 이때 진평평을 감찰원으로 호송하러 가서 이곳에는 없었다.

임완아가 가장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3년 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집안에서 손자들 돌보는 즐거움에 빠져 지내던 전임 대학사 서무 선생이 오늘 대전 밖에 와 있는 점이었다. 서무는 평소 급하고 거친 성격과는 다르게 아무 말 없이 움푹 팬 두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 군주가 온 걸 발견한 사람들이 다가와서는 인사를 했다. 다만 그녀를 바라보는 호 대학사의 눈빛에서 궁전과 비슷한 걱정을 하는 기색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경국 조정 사람들이 모두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폐하가 진평평을 사형시킨 뒤 감찰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했고, 특히…… 범한의 반응을 걱정하고 있었다.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영 귀비의 궁에 가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잤기 때문에 지금 대전 앞에 있는 사람 중에서 영 귀비와 사이가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 영 귀비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고는 마음이 쿵 내려앉은 임완아는 대학사들과 인사를 한 뒤 정왕야 옆으로 다가갔다.

“약약이 들어간 지 반 시진 정도 되었단다.”

정왕야는 겉보기에는 어수룩해 보이지만 사실은 친어머니처럼 총명한 조카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안다는 듯이 상황을 말해주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약약이 말고는 폐하를 뵌 사람이 없어. 폐하가 너를 예뻐한다고 해서 그 늙은 개에게 선처를 베풀어달라는 말을 할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에 잠겨 있어서 정왕야와 신 군주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정왕야의 말을 들은 임완아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작게 말했다.

“폐하께서 크게 다치신 겁니까?”

“못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오래 산다고 하지 않느냐. 분명 쉽게 죽지는 않을 거다.”

정왕야가 거짓 웃음을 지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정왕야가 황궁 안에서 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꺼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임완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입궁을 하면서 임완아는 황제 폐하를 직접 만나서 진 원장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 호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범한과 마찬가지로 황제 폐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진 원장이 죽음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입궁하는 길에 소식을 들었는데, 능지처참하려 한다고요?”

안색이 살짝 창백해진 임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정왕야에게 물었다.

정왕야가 그녀를 바라보며 살며시 알려주었다.

“감찰원이 오늘 갑자기 힘을 못 쓰게 된 것 같더구나. 물론 범한과 네게 남아 있는 감찰원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만. 황형의 뜻은 아주 단호해서 바꿀 수 없을 거야.”

임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

“자비를 베풀어 줄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진 원장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사람들이 뭘 걱정하는지도 알고 있어.”

정왕야의 눈빛이 혼탁해지더니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

“그 늙은 검은 개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너는 문신들이 진평평을 위해서 폐하에게 선처를 호소해 줄 거라 기대하는 것이냐? 모두들 범한이 나중에 미쳐 날뛰지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고 있어.”

임완아를 바라보는 정왕야가 살짝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는 아무도 안 만나려 하신다. 폐하는 결정을 바꾸지 않으실 거야.”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게다가 황궁에 들어온 사람들은 진평평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같은 건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용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그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어떻게 죽는지가 더 중요했다. 만약 진평평이 이대로 정말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은 채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게 된다면 감찰원 안에 쌓여 있는 분노가 폭발하게 될 수 있었고, 그렇다면 경국에 어떤 혼란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진평평은 폐하를 시해하려 했으므로, 사형에 처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진평평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하거나 아니면 참수나 교수형을 명령한다면 폐하께서 관용을 베푸신 거니 이 일이 가져올 파문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서방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길래 황제 폐하가 좀처럼 보기 힘든 엄청난 분노를 드러내며 진평평을 가장 참혹하게 죽이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임완아가 정왕야의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황제 폐하가 약간이라도 관용을 베풀어 주신다면 범한도 경도로 돌아왔을 때 상황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였다. 물론 이건 모두의 추측일 뿐이었고, 범한이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보일 진짜 반응이 어떠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였다.

“영 귀비께서 오늘 좀…… 이상하시네요.”

임완아가 멀리 처마 아래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영 귀비를 바라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정왕야는 안색이 살짝 변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왕야와 이씨 황족 윗세대들만 아는 황궁 안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외부인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정왕야는 영 귀비가 황제 폐하에게 정말 마음이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또 한편으로 영 귀비가 지금까지도 절름발이 노인을 잊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태양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해가 저무는 저녁이 되었는데도 새벽 사이에 내린 빗물이 여전히 청색 돌판 사이에 고여 있었다. 빗물에 햇빛이 비치자 불이 붙은 것처럼 물이 반짝였다.

황궁 안에 등불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서 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태양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별처럼 드문드문 불을 밝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폐하의 침궁 안에서 등불이 가장 먼저 켜졌다. 수십 개의 등불이 내뿜는 밝은 빛이 창문을 통해 밖으로 새어 나와 주변 사물들을 밝게 비추었다.

임완아의 마음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범한이 중상을 입고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황궁 궁전 안에서 치료를 받았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밝게 등불을 밝히고 범약약이 집도를 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