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960화 (960/1,108)

960화 진평평의 복수 (2)

“폐하.”

진평평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가 정말 폐하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굳이 그녀를 죽이실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가?”

황제의 동공이 수축하더니 괴상한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왕이 된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오만방자한 생각이란 말이냐. 감찰원이 원래는 짐을 감찰하고 있었다니…… 짐은 오늘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이제 보니 저 검은 개새끼는 그녀가 짐을 감시하기 위해 남겨둔 거였어! 당시 그녀가 짐을 의심하고 경계하지 않았다면 그런 글귀를 남겨두지도 않았겠지?”

“틀렸습니다. 폐하.”

진평평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용상에 앉든 저희 감찰원은 용상에 앉은 사람을 감독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점을 가지고 그녀가 폐하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패도공결은 어떠하냐!”

아무런 이유 없이 황제가 갑자기 깊고 음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목소리가 상당히 높았지만,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의 목소리는 저승 바다에서 억만년 동안 잠겨 있던 검처럼 어서방 안을 날카롭게 찔렀다.

황제가 얼굴을 조금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 텅 빈 눈동자에서 차가운 기운을 번쩍이며 한 글자씩 강조해 말했다.

“당시 그녀가 짐에게 패도공결을 줬다. 짐은 그녀가 북제와 동이성에 대종사가 있는 점을 고려해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하고 무척이나 고마워했지……. 그리고 패도공결에 의지해 네놈과 섭중, 왕지곤을 이끌고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휩쓸면서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패도공결 뒤에는 엄청난 악의가 숨겨져 있었어!”

분노를 쏟아내는 황제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변했다.

“당시 처음 북벌을 단행했을 때 짐은 체내의 패도의 정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채고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병력을 이끌고 북쪽 산과 들판에서 전청풍과 연이어 큰 전투를 치렀고 결국에는 짐의 체내에…… 경맥이 모두 끓어져 버렸다!”

진평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는 그는 당시 북벌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전청풍은 더없이 노력하고 악랄하게 병력을 운용했고, 당시 북위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았다. 그러니 경국이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쳐들어간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당시 북위는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고,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 천하의 대세를 바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경국 입장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단행하는 건 필연적인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당시 황태자 신분이었던 경제가 병력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고, 진평평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감찰원을 안에서 경도의 안전을 지키고, 전장과 거리를 유지하며 냉정한 시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군이 약하고 적군이 강한 상황에서 격렬한 대규모 전투가 치러졌고, 결국에는 전청풍은 대군을 이끌고 효산 밖을 둘러싸 경국 군대를 포위해버렸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경국 군대의 통솔자인 황태자는 갑작스러운 중상을 입고 전신의 경맥을 전부 끊어져 군영에서 누운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비록 당시 부장이었던 섭중과 친위대의 소년 교관이었던 왕지곤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경국 군대가 약세에 놓여 있는데다가 통솔자가 갑자기 군대를 이끌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전천풍의 군대가 맹렬히 돌진해오자 경국 군대는 사분오열되어 뿔뿔이 흩어졌고, 황태자는 산속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바로 그때 감찰원 흑기를 이끌고 천 리를 내달린 진평평이 돌진해 북위 대군의 포위망을 뚫고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황태자를 구해서 경국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생스러웠는지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날 황제 폐하를 구출해 오는 과정에서 진평평이 이끌고 간 흑기가 거의 전멸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진평평은 속으로 한 가지 의구심을 품었었다. 도대체 폐하는 무엇 때문에 기괴한 부상을 당하신 걸까? 외부에는 어떠한 큰 상처도 보이지 않았지만, 체내의 경맥을 모두 산산이 부서져서 불구자가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 진평평은 추측만 하던 중에 범한이 경맥이 전부 끓어질 위험에 처하는 걸 보고는 비로소 당시 황제 폐하의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부상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건 패도 공결을 일정 정도까지 훈련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위험한 관문이었던 거였다.

* * *

“짐은 몸을 움직일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입으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날카로운 작은 칼들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내장과 뼈와 살을 베고 절단을 하는 것만 같았다.”

흐릿한 눈빛을 지으며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 고통과 절망과 고독과 어둠을 네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짐은 항상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어……. 물론 당시 짐은 새끼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지.”

황제가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리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프고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가 담담히 진평평을 바라보며 계속 당시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에 만약 네놈이 모든 걸 희생하면서까지 짐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아마 짐은 그때 죽었을 거다.”

진평평은 침묵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말을 부인하거나 비웃지도 않았고, 맞장구를 치지도 않았다.

황제가 콧방울을 살짝 실룩거리며 천천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하늘은 짐을 버리지 않았다.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몇 달을 버틴 끝에 짐은 마침내 깨어날 수 있었어. 게다가 단순히 깨어난 것만 아니라 마침내 패도공결의 관문을 돌파할 수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이었음에도 당시를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떨리고 두려워졌다. 누구보다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도저히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의 관문을 떠올릴 때면 그는 여전히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살짝 미소를 띤 눈빛으로 진평평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짐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공결을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짐도 그 점이 궁금해서 일찍이 그녀에게 직접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관문을 돌파할 수 있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자기도 모른다고 하더군.”

황제가 갑자기 ‘하하’하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동자에서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도 모른다니! 그녀는 고하를 만들어내고 사고검은 만들어내고 짐을 만들어냈으면서, 한다는 말이…… 자기도 모른다는 거였어!”

“그녀는 짐에게 패도의 공결을 줘서 짐이 평생 동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 주기를 바랐겠지.”

황제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치켜 올라가더니 비웃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짐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짐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관문을 넘는 데 성공했고, 이 세상 모든 걸 담담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마침내 자네들이 영웅처럼 떠받드는 여자가 사실은 아주 잔인한 마음을 가진 비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하지만 하늘이 짐을 버리지 않았는데, 짐이 어찌 스스로를 버릴 수 있겠는가?”

* * *

경제가 말을 끝내자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평평의 얼굴에 드리운 은은한 미소가 점점 짙어지더니 고개를 저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의심이 많으십니다. 폐하께서는 정말 끝도 없이 의심하는 그 버릇을…… 절대 버리지 못하시는군요.”

진평평의 웃음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었다. 그가 가만히 황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핑계는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입니다. 아마도 폐하께서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범한도 지금 패도의 공결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만약 해당이 그를 돕지 않았다면 아마 폐하가 겪으신 지옥과도 같은 관문에 빠졌을 겁니다.”

“천일도 심법은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거였다.”

황제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영원히 9품의 경지에만 머물러 있겠지.”

진평평이 살짝 비웃는 말투로 물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진평평이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한숨 섞인 말을 토해냈다.

“과거의 일은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녀까지 의심하시니 자연히 천하 모든 사람을 의심하시는 거지요. 하지만…… 폐하의 그런 의심은 정말 우습기 그지없습니다.”

우스우면 당연히 웃어야 하는 법. 그래서 진평평은 웃고 있었다. 그가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며 미친 듯이 웃자 혼탁한 눈물이 주름 가득한 눈가에 맺혔다.

* * *

“짐은 네놈이 죽기 전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허무맹랑한 환상일 뿐이라는 걸 알게 해주려는 거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난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는 차갑게 진평평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짐의 개에 불과한 네놈이 감히 그녀를 대신해 짐에게 물으려 하다니. 그래서 짐은 네놈이 그토록 충성스럽게 지키려 하는 그녀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선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거다.”

웃음을 멈춘 진평평이 양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경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늙은 노비는 천하의 일을 해결하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는 성인도 아니고, 성인이 될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아까 폐하의 생각을 지적한 건 천하를 위해서도 아니고,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가여워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녀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은 천하 백성들을 위해 간언하는 신하가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침착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그녀를 죽이셨으니 저는 그녀를 대신해 복수를 하려는 겁니다. 이건 개인적인 원한이지 무슨 엄청난 대의가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는 일일 뿐이니 어떤 다른 말은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속세에 내려온 선녀였든 아니면 특별한 지략을 가진 요녀였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녀가 섭경미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진평평이 황제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늙은 전우를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자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아주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미소였다. 황제의 눈에는 이미 오랜 시간 자신을 따르던 검은 개가 죽어 있었다.

“네놈이 품고 있는 감정은 아주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감정이다.”

황제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한 나라를 감시하는 신하가, 그것도 거세한 놈이 한 여자를 잊지 못하다니. 이제 보니 자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미쳐 있었던 것 같군. 물론 짐이 오랜 시간 네놈에게 속아왔다는 건 인정해야겠지…… 감찰원이 네놈의 손에 오래 있으면서 다루기 어렵게 까다로워진 것도 사실이야. 감찰원은 지금까지 네놈만 알고 따르며 황제인 짐의 눈치도 보지 않아 왔지. 물론 이건 그동안 짐이 네놈에게 용인해왔던 부분이자 네놈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네. 다만 짐은 이해할 수가 없네. 네놈은 무슨 힘으로 짐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밀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 네놈에게 그럴 힘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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