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7화 하늘이 화를 내니 물러날 수 없네 (1)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이냐는 말이 얇고 무정한 군왕의 입술 사이로 나오는 순간 어서방 전체에 한층, 또 한층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덮이는 것 같았다. 한도 끝도 없는 냉기에 유리 창문과 붉은색 평상과 실내 화초들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서리가 점점 퍼져나가면서 모든 걸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얼려버리려는 차가운 냉기는 황궁 전체에 퍼지는 걸 넘어 동쪽 하늘 멀리에 있는 회색 먹구름까지 덮칠 기세였다.
차가운 냉기가 놀란 먹구름이 겁을 먹은 작은 동물처럼 잔뜩 움츠러들더니 색이 점점 짙어지면서 구름 안 깊숙이에 숨겨 두었던 습기를 짜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물방울이 어느덧 비가 되어 가볍게 떨어졌다. 어둑어둑한 먹구름이 경도와 황궁을 덮자 깨어나 있는 사람들이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을 바라보며 초가을 첫 번째 비가 내리면 곧 날씨가 추워지겠다고 생각했다.
* * *
물론 경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하늘에 비를 뿌리게 만든 건 아니었다. 이 말을 한 뒤 그는 입을 꽉 다물었지만, 얇은 입술의 색깔이 보기 좋지 않을 걸 보니 마음속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모셨던 주인을 바라보며 차분히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경제는 지난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속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처럼 냉정하고 몰인정하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약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경제 앞에 서면 모두들 허리를 숙이고 굴복하고 뒤로 숨으려고만 했지, 진평평처럼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며 따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평평이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만약 황제 폐하가 정말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이라면 자신이 죽인 게 뭐 어떠냐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였다. 비록 몰인정하고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다른 뜻도 담겨 있었다.
반명 황제는 자신을 노려보는 진평평의 눈빛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섭경미 때문에 진평평이 자신에게 그런 눈빛을 보인다는 게 정말이지 화가 났다.
“섭경미가 폐하에게 아무 상관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천천히 한숨을 내쉬는 진평평의 시선은 황제 폐하의 어깨 너머 어서방 뒤쪽 벽에 향했다. 마치 그 벽 너머에 있는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평평의 말에 황제 폐하가 웃기 시작했다. 웃음 속에는 담담함, 냉담함, 비웃음, 고통 등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황제 폐하가 입을 열었다.
“짐은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
“왜 언급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평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너무 눈이 부시도록 뛰어나서 폐하의 자존심과 자랑거리들을 완전히 압도해 버리는 게 견딜 수 없어서입니까?”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섭경미는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네.”
“폐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진평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메마른 웃음소리에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짙게 드러났다.
“폐하께서는 도대체 뭘 용납할 수 없으셨던 겁니까?”
“짐이 용납할 수 없는 거라……. 아니, 이 세상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있을까?”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차갑고 엄숙한 눈빛으로 진평평의 두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마 네놈 같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
차가운 목소리는 여기서 끝났다. 경제는 당시와 관련된 어떤 일도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설사 자신을 수십 년 동안 따른 전우 앞에서라 할지라도, 또 설사 이런 상황에서라도 그는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을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했고, 자극되는 걸 원치도 않았다.
하지만 진평평이 오늘 죽음을 불사하고 경도로 돌아온 이유는 눈앞에 있는 중년 남자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천하에 적수가 없어 보이는 이 강력한 남자의 마음에 드리운 면사포를 걷어내고 상처를 드러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를 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진평평이 경제의 두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서 그녀를 무척이나 싫어하셨지요. 게다가 그녀가 하는 일에 왕공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혹시 폐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래서 이런 냉혈하고 무정한 결정을 하신 겁니까?”
경제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진평평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점점 흐려지더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멍하게 변했다. 그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언제 이런 대역무도한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거세를 한 태감 주제에 그녀를 사랑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거세를 한 태감이라…….”
진평평이 눈꺼풀을 천천히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아까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누구든 이 노비에게 잘 대해 주면 이 노비 역시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잘 대해 주려 합니다. 저에게 잘 대해 주던 그녀의 모습이 항상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십 년 동안 그녀 비참한 죽음과 그 안에 담긴 의혹을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그녀를 대신해 폐하께 묻고 싶었습니다.”
“짐도 잘 대해 주지 않았는가?”
경제가 눈으로 진평평의 노쇠한 얼굴을 천천히 훑으며 담담히 말했다.
“짐이 네놈에게 더없이 높은 영광을 하사했고, 일반 신하들은 절대 오르지 못할 지위를 하사했으며, 짐은…… 짐은 네놈을 누구보다도 신임했다. 그런데 네놈은 20여 년 전에 죽은 여자 하나 때문에…… 짐에게 이러는 것인가?”
진평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폐하께서도 이 몸을 잘 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어디까지나 저를 노비로 대하시며 그에게 맞게 잘 대해 주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저를 친구처럼 대하면서 허물없이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게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마주치는 만남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 경제를 비롯한 사람들의 관계는 칡넝쿨처럼 얽혀 있어서 삼일 밤낮으로 이야기해도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진평평이 그만하라는 경제의 손짓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성왕부에서 머무르는 비천한 태감인 저를 그녀는 단 한 번도 제 몸이 온전치 않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항상 진심으로 저를 대해주며 친구처럼 생각해 주었지요……. 이 늙은 노비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녀 외에 다른 누구에게 그런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없었고, 그녀가 떠난 뒤에도 없었지요.”
진평평이 갑자기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범한이 그녀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더군요.”
이때 조용한 어서방 안에서 범한이란 이름은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줄곧 강력한 정신력으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황제 폐하가 범한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진평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경국의 발전을 위해서, 이씨 황족을 위해서, 그리고 저희들을 위해서 섭씨 아가씨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진평평이 약간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지난 일을 계속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이들은 모두 머리와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잊지도 않고 있었다.
진평평이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던 당시 조정은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신정을 추진한다는 말에 심한 반발이 일어난데다가 제가 감찰원 원장직에 올라 관리들을 감독한다는 것에 경도 전체가 시끄러웠습니다. 게다가 황태후 마마께서는 계속 황궁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될 여자가 혹여나 들어올까 경계하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그녀가 폐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아시고 나서부터는 그녀를 멀리 보내지 못해 안달이셨지요. 게다가 아둔하기 짝이 없었던 황후 마마는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하께서 매일 황궁 안에 머물지 않고 태평 별궁 담벼락을 넘는 이유를 알지 못하셨습니다!”
“섭씨 아가씨는 최선을 다해서 폐하를 도왔습니다. 담주 해변에서 그렸던 그림들을 그녀는 조금씩 실현해 나갔지요. 당시 섭가는 이미 민북에 3대 작업장을 세웠었고, 경국의 근간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폐하에게 더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히려…… 조정과 황실을 불안하게 만들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버렸지요. 만일 그녀가 계속 자신이 그린 그림을 실현해 나갔다면, 경국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하셨을 테고, 또 설사 실현하려 했다 한들 천하 관리들과 지방 세도가들이 폐하에게 엄청난 원망을 쏟아냈을 겁니다.”
진평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업적을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런 용기나 의지가 없으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 중 단 하나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섭씨 아가씨를 죽이신 거지요. 그녀만 이 세상에 없다면, 폐하께서는 그녀가 준 모든 걸 마음껏 누리면서 그녀로 인해 생길 위험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천 가지 이유, 만 가지 이유가 있다 할 만큼 폐하께서는 그녀를 죽일 수많은 이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폐하는 자신이 앉은 용상과 경국과 자신의 야심 때문에 그녀를 죽이신 거지요.”
입술을 오므린 진평평이 하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폐하께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이 없으셨습니다.”
마음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들로 그날의 진실을 캐묻는 진평평의 목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경제가 여전히 멍한 눈빛을 지은 채 천천히 말했다.
“정왕부에는 아직도 그때 그녀가 썼던 문자가 남아 있네. 네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그녀는 민심을 거스르는 기이한 생각을 품고 있었어. 아름답지만 독을 품고 있는 꽃처럼 말일세. 만일 경국 들판에 그 꽃이 피어났다면 경국 전체가 무너지고 말았을 거네. 짐은 경국의 군주로서 천하 백성들을 책임질 의무가 있어.”
“그녀는 짐이 평생 가장 아꼈던 여자다.”
황제 폐하가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진평평을 노려보며 말했다.
“짐은 천하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꼈네.”
“그 일과 백성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섭씨 아가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폐하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현실성이 없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실현에 옮길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한 말과 남긴 글들은 아마 모두 그녀가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것들일 겁니다.”
진평평이 온기라고는 조금도 볼 수 없는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놀라 겁을 먹고 움츠러드셨지요. 폐하는 그때 알아채신 겁니다. 그녀가 실현에 옮기려 하는 생각들이 폐하가 앉아 있는 용상에 엄청난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그녀가 더는 없지만, 그녀가 남긴 불꽃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 불꽃이 선명하게 타올라 그 썩어 문드러진 의자를 불태워 없애 버릴지도 모를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