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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56화 (956/1,108)

956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군수품 조달을 담당하는 사람은 원래 후방에 머물러야 하므로 당시 항상 범건에게 전권을 주고 경도 안에서 처리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경국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면 범건은 항상 경도에 머물며 모든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째서 범건을 서정군과 함께 따라가도록 하신 겁니까?”

“뭐가 걱정되셨던 겁니까? 범건을 경도에 남게 했다가는 그가 비밀리에 양성한 호위를 동원해 진업의 거사를 망칠 수 있다는 걸 걱정하셨던 거지요?”

진평평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 일에서 진씨 집안 어르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요. 세 명의 황제를 섬긴 원로대신이 폐하께서 그녀를 죽이기 위해 경도에 남겨둔 사람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경도 수비사를 맡고 있었던 섭중도 급히 정주로 불려가서 경도 전체는 진씨 집안이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설사 황후 집안이 반란을 일으켜 태평 별궁에 쳐들어가려 한들 진업의 승낙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3년 전에 일어난 경도 반란에서 진업이 반란군 선두에 있었을 때 폐하께서는 분명 회심의 미소를 지으셨겠지요? 마침내 기회가 생긴 것 아닙니까. 당시 태평 별궁 살인사건이 황제 폐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을 제거할 핑계가 생겼으니까요.”

진평평이 경제를 노려보며 온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동안 폐하께서는 굳이 진업을 죽여 입을 막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겠지요. 진씨 집안이 뭐라 말하든 폐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범한이 결국에는 커버리고 만 겁니다. 그래서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폐하가 그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폐하의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인재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함께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폐하는 범한을 중시하게 되었고, 범한이 친어머니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셨겠지요. 그러니 진업이…… 어찌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진평평의 살짝 날카롭고 메마른 목소리가 어서방 안에 계속 울렸고, 경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차분히 듣기만 했다. 진평평이 구구절절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 그의 표정은 약간 기이해 보였는데, 마치 약간의 슬픔과 약간의 해탈이 섞인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22년 전 태평 별궁으로 돌아가 보지요.”

마음이 급해진 듯 진평평의 말이 갈수록 빨라졌다. 절름발이 노인은 수십 년 동안 마음속으로만 추측할 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일을 마침내 황제 폐하 앞에서 모두 말할 수 있게 되자 저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빠른 속도로 말하던 그가 기침하자 양 볼에 건강치 못한 붉은 기운이 돌았다.

한참이 지난 뒤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시 말씀해 보십시오. 폐하께서는 태평 별궁을 공격할 결정을 내린 이상 저를 경도에 남아 있게 할 수 없었으니 북쪽 방어선을 이용하신 것 아닙니까? 갑자기 북쪽에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감찰원 원장인 제게 군대와 관련된 일을 맡기신 것 아니냔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서쪽 정벌을 하는 일에 바쁘셨으니 제가 폐하를 대신해 북벌에 나서 직접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지요.”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그 일은 군대 전체를 움직여 상황을 연출하고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힘까지 빌려와야만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폐하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평평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줄곧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당시에 막 세워진 북제가 폐하의 요구를 받아들인 게 폐하와 고하 사이에 암묵적인 결탁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고하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물어볼 사람이 없는 게 아쉽군요.”

진평평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짐은 고하를 찾은 적이 없다.”

진평평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경제가 결국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짐은 누구도 찾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 누구도 찾은 적이 없다.”

진평평이 실망과 경시가 담긴 눈빛으로 경제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오죽이 남지요. 오죽은 웬만해서는 절대 그녀 곁을 떠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당시에 경도를 떠나 있었지요. 이 부분은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입니다. 오죽이 그녀 곁을 지키기만 했다면 천하 누구든 그녀를 죽일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경제의 눈꼬리가 살짝 실룩였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줄곧 의심했고, 심지어는 범건까지도 의심해 왔습니다. 저는 저희 사람 중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를 못했기에 모두를 의심해 왔습니다.”

진평평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오죽이 저에게 범씨 저택과 인접한 좁은 골목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그를 죽였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더군요. 그제야 저는 이 일이 이해되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4대 종사를 제외하고 오죽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진평평이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저는 신묘에서 또 다시 인간 세상에 사자를 보낸 거라는 판단을 내렸지요.”

“신묘 사람이 그때 올 수 있었다면, 22년 전에도 올 수 있었던 거지요. 폐하나 저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죽이 신묘 사람에게만 극도의 경계심을 보인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약 당시에 신묘 사람이 나타났다면, 오죽은 그녀 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녀 곁을 떠났을 겁니다.”

“오죽이 말한 신묘에서 온 사람은 범한을 죽이기 위해 범씨 집안 밖에서 나타난 거고 결과적으로는 오죽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사실 폐하께서 오죽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지요.”

진평평이 황제에게 눈을 고정한 채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전이 온 신묘 사람도 그녀를 노리며 등장했지만, 진짜 목적은 오죽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이었지요.”

“오죽은 마치 벽과 같습니다. 신묘만이 흔들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벽 말입니다.”

진평평이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비록 두 번뿐이지만, 두 번 모두 아주 공교롭게도 폐하에게 동기가 있을 때 출현했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께서 오죽을 항상 두려워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진평평이 냉담한 눈동자로 경제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범한이 경도로 온 뒤 폐하께서는 계속 오죽의 진짜 행방을 알고 싶어 하셨지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범한이 저에게도 오죽의 행방을 계속 숨긴 덕분에 폐하께서도 아실 수 없으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도대체 뭐 때문에 오죽을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진평평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당시 일의 진실을 알게 된 오죽이 쇠몽둥이를 들고 황궁에 침입해 폐하를 죽이러 오게 될까 두려우신 게 아닙니까?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폐하도 두려운 사람이 있는 겁니까?”

황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죽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네. 그는 어디에서 왔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해. 네놈도 아마 모르고 있겠지만 안지가 담주에 있던 시기 짐이 류운 아저씨에게 오죽을 보러 가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네. 오죽이 완전히 깨어나 있지 못한다면 그는 짐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니까.”

“대종사와 같은 괴물들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폐하께서는 항상 가지고 계셨지요.”

진평평이 차갑게 응수했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아직도 살아계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대종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면서 왜 자살하시지는 않는 겁니까?”

진평평의 악의로 가득 찬 대역무도한 말을 듣고도 황제는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을 뿐 그 역시 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였다.

진평평은 자신의 말로 인해 벌어질 일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몰차게 말을 이어갔다.

“당시 폐하께서는 저희들을 모두 경도에서 빼내신 다음 멍청한 황후 마마가 미쳐 날뛰도록 만들었고, 진업에게 모든 상황을 감시하고 통제하게 하셨지요. 태평 별궁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복잡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만약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계획에서 어긋났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태평 별궁 살인사건은 단순하면서도 조금의 허점도 없이 완벽하고 치밀하게 세워진 계획이었습니다. 이런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황제 폐하밖에는 없을 겁니다.”

진평평이 하도 쓰다듬어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더욱이 신묘 사람이 등장한 일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묘가 폐하의 계획을 따른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폐하와 신묘의 목표가 같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제거하고 싶어 한 겁니다.”

진평평이 경제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경제는 진평평의 내놓은 추측을 반박하지 않은 채 그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놈은 평생 동안 사람을 해치는 방법만 연구해온 생각해온 사람이니 그 일을 추측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 다만 짐은 네놈이 그 일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경제가 더 없이 진지하고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짐은……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녀를 죽이지 않으셨지요.”

진평평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도 기괴한 웃음이었다.

“우리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는 당연히 직접 움직이지 않으셨을 겁니다. 경국을 재창조해준 은인이자 폐하의 집안이 용상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자 폐하가 마음속으로 가장 사랑한 여인이자 자신에게 아들을 낳아준 여자를 직접 죽이지는 못하셨겠지요.”

“피는 좀처럼 씻기가 어렵지요. 그러니 폐하께서는 직접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진평평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폐하의 두 손은 아주 깨끗할 겁니다. 폐하께서는 항상 공명정대한 일만 하시면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용상 아래 있는 어리석고 난폭한 이들에게 맡기셨으니까요…….”

“저희는 그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경도 안에 있는 고집스러운 왕공 귀족들을 모두 숙청했습니다. 그날 밤에 경도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아십니까? 그날 밤에 황후 마마의 가족이 숙청당하는 걸 보면서 폐하께서는 무척이나 즐거워하셨겠지요?”

진평평이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일은 모두 폐하의 것으로 돌리시고, 더럽고 부끄러운 일은 대신이나 가족에게 넘기셨지요.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당연히 그녀를 죽이지 않으셨을 겁니다.”

진평평이 입술을 오므리고는 작게 기침을 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는 지금껏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게다가 이제 진업도 죽어서 당시 어두운 내막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증거를 가지고 폐하가 직접 태평 별궁 살인사건을 조종했다고 주장할 사람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절름발이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폐하 자신까지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노비를 납득시키지도 못하실 거고 그 일의 진실을 바꾸지도 못하실 겁니다……. 22년 전에 폐하는 직접 그녀를 죽였습니다. 위대한 여자…… 아니, 막 폐하의 아들을 낳아 가장 허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외로운 여자를 죽이셨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일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진평평은 온몸에 힘이 풀리고 피곤이 몰려들었다. 그가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에 기대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황제도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줄곧 침착했던 얼굴의 안색이 약간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짐이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냉정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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