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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55화 (955/1,108)

955화 파렴치한 짓 (2)

진평평이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몸에 붙은 종이들을 털어 내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군왕이 자제력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보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것이 그가 경도로 돌아오면서 가장 바랐던 일 중 하나였던 걸까? 수십 년 동안 마음 깊숙이에 숨겨 두었던 복수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황제 폐하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음이 찢어질 듯한 슬픔이 한데 뒤엉켜서 절름발이 노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폐하께서 만약 자신의 아들을 죽일 마음이 없으셨다면 이 노비가 어찌 폐하가 그런 일을 하도록 몰아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진평평이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게다가 이 노비가 죽이고 싶어 한 사람은 폐하뿐이었습니다. 황궁에 있는 이씨 황족들이야 폐하와 함께 순장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말에 황제가 힘겹게 분노를 떨쳐내며 침착함과 이성을 되찾았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권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대종사라는 가장 높은 경지에까지 오른 그가 진평평 앞에서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경제는 수십 년 동안 군신 관계를 유지하며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배신이라는 독약이 마음속 깊숙이에 스며든 그는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차갑게 진평평을 노려보며 말했다.

“짐이 가장 분노한 것은 네놈이 짐을 죽이려 한 사실이나 짐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려 한 사실이 아니다. 짐이 가장 분노한 건 이미 경도를 떠난 네놈이 다시 돌아온 것이야. 도대체 뭣 때문에 다시 돌아온 것이냐?”

“네놈이 저지른 일을 알고 난 뒤에도 짐은 네놈에게 살길을 열어줬다. 만일 네놈이 그대로 떠나려 했다면 짐은 네놈을 막지 않았을 거다.”

황제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진평평을 노려보았다. 아주 오래된 분노가 깃들어 있는 것 같은 깊고 그윽한 눈동자의 침착한 눈빛에서 한없는 위력이 느껴졌다.

“짐이 정말로 네놈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직접 나섰겠지, 뭣 하러 쓸데없이 군사들을 보내 잡아 오게 했겠는가. 하지만…… 네놈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돌아왔어. 네놈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 있길래 짐이 직접 자네를 죽이도록 만들려 하는 것이냐?”

아주 미묘하고도 기묘한 말이었다. 이미 경도 수비사 병영에 돌아가 있는 대장 사비를 비롯해 어서방 밖에 있는 사람들은 황제 폐하의 마음을 확실하게 추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달주에서의 상황을 통해서 황제가 마지막으로 진평평이 신하가 지녀야 할 마음이 있는지 탐색하려 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세상 전체를 통틀어서 진평평만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만약 달주에서 진평평이 그대로 흑기를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 갔다면 그건 그가 폐하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있어 직접 대면할 용기가 없다는 걸 설명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경도로 돌아와 냉정하고 당당하게 황제 폐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황제에게 경국의 역사상 가장 충성스러운 대신이라 불리는 자신을 죽이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진평평이 칼처럼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당시에 폐하께서는 그녀에게 살길을 열어주셨습니까? 제가 경도로 돌아온 이유는 폐하께 묻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녀를 죽이셨습니까!”

갑자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황궁도 저녁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막 지평선에서 벗어나 동쪽 하늘로 올라간 태양은 따뜻한 햇볕을 경국 땅에 비추기도 전에 어디서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먹구름에 통째로 먹혀 버렸다. 하늘에 걸려 있던 붉은 빛이 먹구름 속에 완전히 가려지자 하늘색도 점차 어두워졌다.

새벽부터 일어나 몸단장을 마친 후궁 궁녀가 물을 데우기 시작했고, 허드렛일 하는 태감은 자신보다 더 큰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땅에 먼지를 쓸기 시작했다. 이들은 황성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민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신의 임무와 생활을 반복해 나갔다. 그리고 이건 황궁에 있는 귀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비록 최근 며칠 동안 경도 안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녀들의 귀에도 들어왔지만, 경국에서 극히 적은 사람들만 진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문밖에서 멀리 어서방을 주시하고 있는 인물들은 당연하게도 이번 일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눈구멍이 푹 꺼지고 얼굴 표정은 한없이 진지한 이들은 진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 원장이 어서방에 들어간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이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이들은 어서방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황제 폐하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무예를 수련한 섭중이나 요 태감 같은 경우에는 마음만 먹으면 들을 수 있었지만, 멍청하게 정기를 이용해 어서방 안의 소리를 엿들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모두들 오늘 어서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되도록 아는 게 적을수록 자신에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진평평은 듣고 싶어 했다. 그는 이유가 알고 싶고, 해명이 듣고 싶어서 경도로 다시 되돌아온 것이었다.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모셔온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진평평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는 경국 황제의 입을 통해서 오래전 그날의 진상을 들으려 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게 되면 살면서 가장 분노했고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의문에 집착하게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경제는 진평평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진평평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질문을 들은 뒤 그는 꼿꼿하게 선 자세를 유지한 채 냉담하면서 약간은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진평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을 내뿜던 경제의 눈동자에 비웃음과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어렸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눈을 가늘 게 뜬 경제의 모습은 자신의 영토를 침범한 괴물을 바라보는 용맹한 사자 같았다.

속을 가늠할 수 있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경제가 입술을 잔뜩 오므리고는 진평평을 향해 천천히 말을 했다.

“뜻밖에도…… 뜻밖에도…… 이것 때문이었군. 이것 때문이었어!”

사실 경제는 속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지금의 상황이 납득이 되지도 않았다. 진평평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이후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조용힌 탄식했다. 이제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따랐던 검은 개가 자신을 배신한 이유가 뭔지,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경도로 돌아온 이유가 뭔지 알게 되었다. 검은 개는 과거 그 일에 관해 묻기 위해 죽을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이전에 동료들이 그 여자를 좋아하고 따랐다는 걸 경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평평이 이미 오래전에 죽은 여자 때문에 지금까지 자신에게 강렬한 복수심을 품고, 대립하려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낮은 평상에 돌아가 앉은 황제 폐하는 양손을 무릎에 올린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평평은 양손을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에 올린 채 조용히 냉담한 눈빛으로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 주기를 기다렸다.

경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변하더니 한참 뒤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를 위해서 짐을…… 배반한 것인가?”

이 말에는 실망, 슬픔, 그리고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와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이 노비는 그저 이유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진평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노비는 살면서 그녀와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녀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해야겠군요. 그녀는 인간 세상을 구제하려 내려온 선녀였습니다. 그녀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동원해 바꾸려 노력했고,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서슴없이 구제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폐하를 도왔고, 저를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경국을 강국으로 발전시켰으며 천하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런 그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일부러 죽이셨지요.”

진평평의 말투에는 강조나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지치고 슬픈 감정만 느껴질 뿐이었다.

경제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그의 앞에서 이 문제를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히 그에게 직접 이 일을 물어볼 용기를 낸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이미 대부분이 흙 속에 백골이 되어 있어 있었다.

당시 경제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중에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짐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경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늙은 검은 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설명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 못 할 괴로운 감정이 일었다. 그가 20여 년 동안 참고 견뎌온 이 괴로움은 점점 그의 몸과 마음을 점령했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의지를 가진 그가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진평평에게 설명을 하는 걸 수도 있었고, 어쩌면 후궁 작은 전각에 걸려 있는 초상화 안에 있는 황색 옷을 입은 여자에게 설명을 하려는 걸 수도 있었고, 어쩌면…… 황제 폐하 자신에게 설명을 하려는 걸 수도 있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네.”

황제 폐하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말투는 결연했으며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가 죽이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기만 하자 진평평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녀를 죽이지 않으셨다고요?”

진평평의 눈가 주름이 깊어지면서 그의 두 눈을 가렸다. 그는 약간 피곤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황제 폐하를 바라보고는 더없이 차가운 웃음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럼 그녀는 어쩌다 죽은 겁니까?”

“서쪽 정벌 중이라서 경도로 돌아올 수 없어 막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왕공 귀족들이 제멋대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거나 하늘이 정한 얄궂은 운명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그때 저와 범건, 오죽, 섭중이 모두…… 경도에 없었던 것이 우연이라거나 그날 그녀가 하필 그때 출산하는 바람에 가장 약해져 있어 죽은 거라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진평평의 눈빛은 두 자루의 칼날처럼 황제의 얼굴을 찌를 듯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폐하는 효로 천하를 다스리는 분이시니 모든 죄를 황태후 마마에게 덮어씌우려 해서도 안 됩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멍청한 황후 마마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모자라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에게까지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서쪽 초원을 정벌하자는 건 폐하의 뜻이셨습니다! 당시 태상사 금고 관리인 겸 호부 원외랑이었던 범건에게 군수품 조달을 책임지게 하시고는 그를 폐하의 군대와 함께 있도록 하신 이유가 뭡니까?”

진평평이 눈을 잔뜩 찌푸리자 엄청난 한기가 듬성듬성 나 있는 속눈썹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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