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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54화 (954/1,108)

954화 파렴치한 짓 (1)

황제의 비꼬는 말투에도 진평평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담담히 말했다.

“저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제가 원래 태감이었던 사실을 굳이 사람들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사람들을 속이고 있지 않은가.”

황제가 차갑게 식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진평평의 두 눈을 빤히 주시하며 말했다.

“과거 황궁에 있던 자네가 왕부로 보내졌던 이유는 부황의 동정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네. 아마도 황궁에서는 자네가 몰래 짐에게 신분을 밝히고, 짐이 왕부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도와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늙은 홍 태감을 설득해 부황의 편에 서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이건 모두 과거 황궁의 상수 태감이었던 자네가 세운 공로이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는 황궁의 상수 태감이었던 덕분에 경국에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거네. 그러니 과거 태감이었던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선황께서 황위에 오르신 일과 이 노비는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진평평이 자신을 노비라 청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진평평이 자신을 노비라 칭한 건 이전의 습관에 따라 한 말일 뿐 이전처럼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경제의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해 말했다.

“선황께서 황위에 오를 수 있으셨던 건 어느 사람이 친왕 두 분을 살해했기 때문이지요. 덕분에 성왕야께서 용상에 앉을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폐하께서 오늘날 천하를 호령하며 만고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황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마도 진평평이 언급한 사람과 관련된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자네는 당시 무슨 이유에서 황궁 귀인들을 배반하고 왕부에 투항해 짐에게…… 충성을 바친 것이냐?”

진평평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는 듯 마는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경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폐하께서는 마음이 맑고 넓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분이셨습니다. 심지어 저처럼 보잘것없는 아랫사람에게도 잘 대해 주셨지요. 이 노비가 비록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제게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는 저도 잘 대해 주려 노력합니다.”

진평평의 말에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낮은 평상에 가만히 앉은 황제는 진평평의 방금 전 말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칼날처럼 날카롭던 황제의 눈빛이 초가을 하늘처럼 점점 맑고 훤해지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자네는 아직도 짐이 자네를 나쁘지 않게 대해줬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군.”

“당시 성왕야께서는 조정에서 아무런 지위도 가지고 계시지 못했고, 어떠한 조력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왕부는 크기도 작고 볼품없는 곳이었지요. 그리고 저 역시 황궁에서 가장 쓸모없는 어린 상수 태감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사상 같이 뛰어난 인물들은 계속 황궁에서 귀인들 옆을 지킬 수 있던 것과 달리 저는 성왕부에 보내졌던 것이지요.”

진평평은 마치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오른 듯 긴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어리면 어린 대로 좋은 점이 있고, 단순하면 단순한 대로 훌륭한 부분이 있지요. 그 시절에 소년 셋과 어린 꼬맹이까지 더해서 져 난장판을 피우면 범씨 유모께서 옆에서 고함을 치셨는데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정왕은 나이가 가장 어려서 아무도 상대를 해주려 하지 않았지.”

황제 폐하게 눈썹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그때 범건과 정왕이 손을 잡고 나를 때리려 하면 자네가 마지막에는 둘을 막아서 포기하고 돌아가게 만들었지. 그때 우리 둘이 손을 잡으면 아무도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지금도 그러는군.”

이 말을 끝으로 진평평과 황제는 동시에 침묵에 빠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범건은 폐하와 같은 젖을 먹고 자랐으니 형제나 다름없지만, 노비는 그냥 보잘것없는 노비일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시에 저는 폐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반역심 같은 건 없다는 듯이 경제의 얼굴선이 점점 부드러워지더니 눈빛을 먼 곳으로 던졌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그동안 자네가 짐을 여러 차례 보호해 줬다는 건 반드시 인정해야겠지. 만약 자네가 없었다면 짐은 이미 죽어도 여러 번 죽었을 거네.”

말을 마친 황제의 시선이 앞에 탁자로 향하더니 쌓여 있는 보고서들에서 멈췄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첫 번째 보고서를 들더니 안에 적혀 있는 그의 누이와 아들과 관련된 내용을 바라봤다.

“경국이 처음 변방 땅을 개척해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을 때 북위 정예 기병들은 움직일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네. 그래서 살짝 방심한 짐과 자네는 당시 소진국(小陳國)을 정탐하고 지금의 연경에 방어선을 쳤고, 결국에는 정산에서 전청풍의 수하 중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호열(胡悅)에게 포위되고 말았네. 그러고 보니 그 호열이란 사람의 활 쏘는 솜씨는 정말 뛰어났어…….”

경제가 장탄식을 내뱉으며 계속 말했다.

“그 뒤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연소을을 제외하면 호열보다 활을 더 잘 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네.”

정북 대도독 연소을은 경제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경제는 그를 언급하면서 분노나 원망 같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안타까움만 드러냈다. 경제는 인재를 유독 아끼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도 강인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연소을이 자신의 적수가 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반역을 저지른 사람을 스스럼없이 언급하고 죽음에 안타까워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경제가 연소을을 대하는 태도나 최근 며칠 동안 감찰원에 취한 조치들을 봤을 때 경제의 마음속에 진평평은 분명 다른 어떤 신하들보다 훨씬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보고서에서 시선을 돌린 그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을 바라보았다.

“당시 자네가 죽을 각오로 몸을 던져 호열이 쏜 화살을 막지 않았다면 짐은 그때 죽었을 거네.”

진평평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건 이 노비는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었습니다.”

경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린 보고서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 보고서에는 3년 전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평평은 미리 장 공주가 반란을 일으켜 경도로 쳐들어오고 결국에는 황성을 포위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내버려 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비록 감찰원이 당시에 너무나도 신중하고 은밀하게 움직여서 보고서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질적인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예민한 안목을 지닌 경제는 진평평이 당시 품었던 고약한 마음을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경제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아무렇게나 땅에 내던지고는 다른 보고서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전에 현공 사당에서 그림자를 시켜 짐을 암살하려 한 이유가 무엇이냐?”

지난날을 이야기하던 훈훈한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죄를 추궁하는 황제의 물음과 동시에 살짝 비릿한 피비린내가 어서방 안에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평평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노비는 폐하께서 숨기고 계시는 비장의 패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짐이 가진 비장의 패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황제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진평평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노려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보니 자네는 짐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것 같군.”

진평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침묵으로 자신이 대역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림자가 정말 사고검의 아우인가?”

경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폐하께서 귀신같은 안목으로 단번에 그림자의 진짜 정체를 알아보시니 이 노비는 감복할 따름입니다.”

진평평이 감복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 진심으로 감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경제가 두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를 다시 옆에 던졌다.

“처음 북벌을 단행했을 때 당시 짐은 뛰어난 공적을 제대로 세워보기도 전에 무너질 상황에 부닥쳤었네. 순간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전청풍이 이끄는 대군에 포위를 당했었지. 그때 산속에 포위되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자네가 흑기를 이끌고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몸이 상하는데도 희생하면서까지 짐의 목숨을 살리려 하지 않았다면, 짐은 그때 죽었을 거네.”

진평평의 시선이 경제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현공 사당 자객 사건의 진실이 담긴 보고서를 옆에 던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진평평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갈수록 짙어졌다. 눈에 담긴 웃음기는 절정에 이르자 곧이어 시들해지더니 쓸쓸한 눈빛을 지었는데, 그 쓸쓸한 눈빛 안에도 약간은 비웃는 듯한 기색이 보였다.

“폐하, 언제까지 제 죄와 공을 계산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노비가 폐하를 구한 공로와 폐하를 기만하고 죽이려 한 죄를 바꾸려 하시면 안 됩니다. 경국 법률이나 감찰원 조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이 노비에게 너무 많은 편의를 주려 하지 마십시오.”

침착한 얼굴로 황제 폐하를 바라보는 진평평의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노비가 폐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 구한 건 사실이지만, 과거의 공로에 기대 마땅히 죽어야 할 대역죄를 가볍게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큰 공로를 큰 죄와 바꾸는 건…….”

진평평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살짝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전에 그녀가 말했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어린 태감에게나 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 노비는 그 어린 태감이 아니고, 폐하도 다른 나라의 황제가 아니시니 과거의 공과 죄를 계산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네는 짐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황제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으며 강렬한 눈빛으로 진평평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천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네는 짐의 곁을 지키는 늙은 검은 개일 뿐이다. 하지만 오래 길렀으니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폐하께서는 이 늙은 노비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동안 일반 신하들은 누릴 수 없는 영예와 권력을 이 노비에게 주신 것이지요.”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에 살짝 기대앉으며 냉정한 목소리로 한 글자씩 강조해 말했다.

“그러니 지금 폐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자신이 기른 개를 죽일 합당할 이유는 찾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마 자네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경제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그가 고개를 쳐들고 크게 웃었다. 분노가 담긴 웃음소리는 어서방을 넘어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황성 곳곳에 울려 퍼졌다.

그가 몸을 돌려 탁자에 놓여 있는 보고서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힘껏 내던졌다. 두껍거나 얇은 보고서들이 진평평의 몸이나 바퀴 달린 의자를 때릴 때마다 ‘퍽’하는 소리가 났다.

경제가 한기 서린 눈빛으로 진평평의 얼굴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자네는 짐을 죽이려 했고, 짐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 게다가 괘씸하게도 내 아들을 죽이도록 짐을 몰아세웠어……. 이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주제에 짐이 자네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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