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화 쓸쓸히 성안으로 들어오는 마차 한 대 (1)
만약 진평평이 정면으로 황제 폐하와 싸우려 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경국 주와 군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일 수 있는 4천 명의 흑기는 경국 내부에서 전투를 치렀을 거였다. 그리고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경국은 회복하기 힘든 깊은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감찰원은 몇 년 동안 각 관아와 군대 안에 밀정을 심어둔 상태였다. 그러니 만약 진평평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도발을 하려 한다면 경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평평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혼자 경도로 돌아가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 폐하를 만나기로 함으로써 충성스러운 감찰원 부하들이 조정에 반기를 들고 싸움을 벌이지 못하도록 했다. 이건 경국 조정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는 결정을 내린 것인 만큼 진평평은 경국에만큼은 끝까지 충성을 다한 셈이었다.
게다가 멀리 내다보며 주도면밀하게 모든 걸 계획하는 진평평은 자신 때문에 감찰원 관리들이 조정과 황제 폐하의 손에 놀아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황제 폐하의 강력한 권력과 경국의 막강한 힘에 감찰원이 전력을 다해 맞선다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천하를 혼란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감찰원 관리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경도를 떠나 고향으로 가는 마차 대열에 오른 그는 달주에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범한에게 이들을 모두 남겨주고 싶은 그는 이들이 싸움이 끓이질 않은 경도에서 멀리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여기는 왕계년과 마차 안에 있는 짐과 미녀도 포함되어 있었고 자신을 30년 동안 따른 7처 전임 수장을 비롯한 가장 충성스러운 감찰원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가 오랫동안 비밀리에 기른 4천 명의 흑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진평평이 반드시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자 범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슬픔에 잠겨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을 행진하며 경국 국경을 넘어 범한과 1 황자가 장악한 동이성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국 황제 폐하의 통제를 벗어나야만 진정으로 범한만을 위한 독립적이고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진평평이 범한에게 남긴 이러한 힘은 앞으로 범한이 황제 폐하와 담판을 할 유용한 패로 사용할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이 패들은 자신만의 감정과 의리를 가지고 있었다. 흑기는 관도 주변 산길을 탐색하면서 유령처럼 조용히 전진했다. 은색 가면을 쓴 형과는 대머리 남자의 냉정한 감시를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추격조를 보내 경도 수비사 기병들을 죽이고 원장 대인을 데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접었다. 사실 그들이 마차에 있는 감찰원 관리와 밀정들을 보하는 데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한편 변장한 왕계년은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색도 창백했다. 그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고달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원장 대인이 경도로 돌아가시면…… 죽기를 청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네.”
고달은 이미 반 혼수상태라서 들을 수 없었고, 벙어리 아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왕계년의 느닷없는 말에 놀란 그녀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누구에게 들으라고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마차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용모를 지닌 감찰원 관리 한 명이 마차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왕계년 앞에 앉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왕계년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네. 자네도 원장 대인께서 감찰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지 않는가. 원장 대인께서는 경국이 혼란에 빠지는 걸 원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소공야께서 이 일이 연루되는 것도 원치 않으시네.”
“종추, 이제 보니 자네는 내가 몰래 빠져나가 작은 범 대인께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나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나 보군.”
오늘 밤 왕계년은 장난기 넘치던 평상시 모습과는 달리 진지해 보였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료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원장 대인께서 이대로 경도로 돌아가신다면 작은 범 대인은 원치 않아도 이 일에 연루되게 될 거네. 이런 상황인데 어째서 미리 가서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지금 천하에서 경도에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작은 범 대인뿐이네.”
왕계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종추였다. 왕계년과 함께 추격자로 명성을 떨치는 종추는 천 리를 빠른 속도로 내달릴 수 있고, 흔적을 감추고 미행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오랜 동료인 왕계년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원장 대인께서 떠나기 전에 자네에게 작은 범 대인에게 알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네.”
왕게년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듣자 하니 작은 범 대인은 이미 동이성을 떠나셨으나 길에서 여러 차례 동이성 의병들의 공격을 받으셨다고 하더군……. 동이성 의병들이 어떻게 감찰원의 귀국 노선을 알았을 것 같은가?”
종추가 대답하지 않자 왕계년이 그를 노려보며 계속 말했다.
“작은 범 대인이 앞당겨 경도로 돌아오는 걸 막으려고 원장 대인께서 일부러 정보를 흘리신 거네. 원장 대인은 작은 범 대인이 경도로 돌아오기 전에 이 일을 끝내고 싶으신 거야.”
종추가 침묵으로 왕계년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왕계년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달주에서 경도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릴 거네. 그러니 내가 당장 마차 대열에서 빠져나와 연경 동쪽으로 달려가서 작은 범 대인에게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시간에 맞게 경도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네.”
종추가 순간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줄곧 원장 대인을 따라다녔고, 자네는 줄곧 작은 범 대인을 따라다녔지. 원장 대인께서 내게 맡긴 임무는 자네를 감시하라는 거네.”
그가 탄식하며 계속 말했다.
“작은 범 대인을 오래 따라다닌 사람들은 우리와는 생각이 달라진다는 원장 대인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자네들은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변해서 뒷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니 말이야.”
이 말을 하는 종추의 눈빛이 단호하게 변했다.
“나는 반드시 원장 대인의 명령을 지킬 거네. 자네가 작은 범 대인을 끌어들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자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지금껏 우리 두 사람은 승패를 가려본 적이 없었지. 물론 자네가 이전에 몇 년 문서 업무를 했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종추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곧이어 종추는 미소가 얼굴에 그대로 박힌 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신이 당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칼자루가 소리 없이 그의 허리를 때려 몸을 마비시키자 왕계년이 잽싸게 칼을 뽑아 들고는 손잡이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종추가 ‘윽’하는 묵직한 신음을 내지르며 그대로 마차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바라본 벙어리 아내는 아이를 꽉 끌어안고 겁에 질린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칼자루를 꽉 쥔 고달이 두 눈을 부릅뜨고 힘겨운 숨을 내쉬며 왕계년에게 말했다.
“가십시오.”
왕계년이 고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범 대인께서는 항상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원장 대인께서 살아남으시기를 바라실 겁니다.”
고달이 기침을 하자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얼른 가셔야 합니다.”
왕계년이 그를 바라보며 힘겹게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마차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검은색 마차 대열에서 나온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처럼 어두운 밤에 그를 쫓을 수 있는 사람은 종추뿐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를 쫓을 수 있는 종추는 기절해서 마차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니 범한에게 사실을 알리러 가려는 왕계년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시간에 맞춰 움직일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범한이 경도와 달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돌아왔을 때 진평평이 아무 일 없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밤공기는 물처럼 차가웠고, 칠흑 같은 주변은 먹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어두워서 아무런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 * *
며칠 뒤 경도 수비사의 기병들은 마침내 경도 외곽에 도착했다. 기병들은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없는 검은 색 마차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기병들의 전진 속도도 자연스럽게 아주 느려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느리면 느릴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수비사 통령 대장 사비는 며칠 동안 진평평과 함께 마차 안에서 머무르면서 진평평이 먹고 마시는 모든 걸 살뜰히 챙겼다. 그는 평소 업무는 모두 제쳐둔 채 온종일 진평평과 함께 경국의 과거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조정 안에서 벌어지는 우스운 추문이나 깊은 황궁 안에서 나온 소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원로대신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후배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경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초가을에 들어서 있었다. 이에 진평평을 ‘모시고’ 경도로 돌아온 경도 수비사는 일부러 여명이 밝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을 선택했다. 물고기 배처럼 하얗게 동쪽 하늘에 뜬 태양이 아직 빛을 내기 전이라서 가을날 경도의 청명한 하늘도 어둡기만 했다. 어두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맑고 서늘하면서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3천 6백 명의 기병들 중에서 상처를 입은 십여 명을 제외한 모두가 검은색 마차를 호위하며 경도 정양문 밖에 도착했다.
사비는 이미 돌아오는 길에서 달주에서 일어난 상황을 비밀 경로 통해 경도에 있는 추밀원과 궁정에 보고한 상태였다. 이에 어두운 밤에 3천여 명의 기병이 갑작스럽게 경도 성문 앞에 나타났음에도 13성문사 관병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경계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이따금 들리는 말발굽 소리를 제외하면 성 위와 아래 모두 조용했다. 동쪽 하늘에 걸린 하얀 태양은 높고 높은 경도 성벽만을 비출 뿐이었다. 가장 높이 있는 청색 벽돌에 햇빛이 비치자 스산한 기운을 내뿜었고, 부지런한 새는 성벽 앞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면서 쉴 새 없이 울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좀처럼 열리지 않는 경도 성문이 ‘끼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마차 한 대가 통과할 만큼 널찍한 통로는 동굴처럼 어두워서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도 알아챌 수 없었다.
13성문사 관병들이 성벽에 서서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성문 쪽을 바라봤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직속상관이 갑자기 출현한 경도 수비사 관병들을 보고는 마치 적을 본 것처럼 긴장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불안한 침묵 속에서 인계 작업이 완료되자 늙은 종이 검은색 마차를 끄는 말고삐를 쥔 채 천천히 경도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때까지도 마차를 감찰원 늙은 종이 몰고 있었으니, 마차는 여전히 안에 타고 있는 절름발이 노인의 통제에 있는 셈이었다. 성안과 밖에 있는 군대 쪽 중신들은 마부를 교체하거나 마차 발을 걷고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