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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51화 (951/1,108)

951화 두 사람, 전쟁의 막이 오르다. (3)

감찰원 부하들 역시 사비처럼 진평평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제 폐하가 진 원장을 건들고 싶어 하더라도 지금 모든 상황을 진 원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비 대장이 이끄는 경도 수비사의 정예 기병은 늦가을 메뚜기처럼 패배감에 휩싸여 싸울 용기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원장 대인은 경도로 돌아가 죽으려 하는 걸까?

황제 폐하가 진 원장을 잡고 싶어 하는 이유를 부하들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이것이 역사적 필연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혹시 진 원장이 황제 폐하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살짝 피곤해진 진평평이 부하들을 쫓아 버리자 줄곧 곁을 지키고 있던 2처 부수령만 남게 되었다. 진평평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지시했다.

“내가 날짜를 계산해 보니 안지가 경도로 돌아오려면 오래 걸리겠더군. 안지에게 미리 소식을 알리는 사람은 없었으면 하네.”

2처 부수령이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며 말했다.

“원장 대인께서 내린 결정을 저희는 바꿀 수 없었지만, 작은 범 대인은 모든 상황을 바꾸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야, 이 일은 안지도 바꾸지 못하네.”

진평평이 차가운 눈빛으로 2처 부수령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다리가 가장 빠른 자신의 다리를 믿고 범한에게 뭘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나. 내가 자네를 여기 남겨둔 건 지시할 말이 있어서이네. 이건 내가 내리는 명령이야. 잠시 뒤 자네는 흑기가 호송하는 서른 대의 마차를 따라 강북으로 들어가게. 그리고 가장 빠른 속도로 동이성에 진입한 뒤 내가 이전에 말했던 그 사람을 찾아가게. 그 사람을 통해서 십가촌을 찾아내야 하네.”

진평평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생각이 간파해내자 2처 부수령이 난처해하면서 좌절과 슬픔이 교차한 표정을 지었다.

“울거나 웃지 말게나. 계속 그러면 가면이 며칠 버티지 못하고 망가질 거야.”

진평평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타일렀다.

“왕계년, 자네가 당시 대동산에서 도망쳐 나온 이유는 범한에게 사실을 빨리 전달하기 위해서였지. 그랬던 자네가 이제 와서 범한을 찾아가 엄청난 골칫거리를 안겨줄 생각인가?”

가면을 쓴 관리는 3년 넘게 실종되어 있었던 왕계년이었다. 범한은 진평평이 왕계년의 종적을 감추어줬다는 걸 알고는 그리워하며 행방을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범한도 진평평이 왕계년을 감찰원 안에 숨겨뒀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왕계년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원장 대인께서 왜 경도로 돌아가시려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원장 대인이 어떻게 되든 이 일로 인해 작은 범 대인은 원치 않은 일에 연루되게 되실 겁니다. 그건 모르시는 겁니까?”

진평평이 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검은색 마차를 바라보며 속으로 검은색은 정말 보기 좋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 * *

경도 수비사가 조용히 길을 열어주자 상심, 분노 등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이 스물아홉 대의 검은색 마차를 포위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색 마차 안에서 진평평이 아끼는 진원의 미녀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마차 대열은 관도를 따라 경국 동쪽 방향으로 향했다.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만 덩그러니 외로이 자리에 남았다. 진평평이 바람에 날리는 귀밑머리를 쓰다듬으며 뒤에 있는 늙은 종에게 말했다.

“자네는 나보다 건강이 좋으니 굳이 나와 함께 돌아가서 죽을 필요는 없네.”

늙은 종은 입을 벌리고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언덕 위에 이어지던 검은색 줄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흑기 중 일부는 암암리에 스물아홉 대의 검은색 마차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나머지 흑기들은 산 위를 지키며 경도 수비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침착하게 바퀴 달린 의자 앞으로 걸어온 사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경도 수비사를 대표해서 원장 대인이 유혈 사태를 막아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진평평은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비가 고개를 숙이고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아까 떠나려고 했다면 자네가 뭘 어쩔 수 있었겠나?”

진평평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멀리 관도 위에 빛나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사비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러니 설사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을 바쳐 싸울 겁니다.”

“그래, 그래서 타협한 거네. 내가 남으면 자네 부하들이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할 수 있고, 또 감찰원 사람들도 죽지 않도록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목숨을 가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진평평이 웃으면서 호탕하게 말했다.

“물론 나처럼 늙은이의 목숨은 가치가 없지만 말이야.”

“경도 수비사는 경국에 충성하고, 감찰원도 경국에 충성하며, 나 역시 경국에 충성하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죽여 왔네. 언제든지 망설이지 않고 적을 죽일 수는 있어도 내 사람을 죽이는 건 익숙하지 않아.”

사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평평의 말 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게 경국에 충성한다는 말이었다. 그럼 제한된 인원수를 훨씬 넘은 흑기 4천 명은 뭐란 말인가?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는 건 뭐란 말인가?

진평평은 더는 할 말이 없는지 바퀴 달린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실은 속으로 경국은 경국이고 폐하는 폐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경국과 황제 폐하를 분리해 각각의 별개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평평은 경도로 돌아가서 그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신과 그 남자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 때문에 경국이 혼란에 빠지는 건 원치 않았다. 더욱이 진평평이 가장 원치 않는 건 조정과 감찰원이 싸움을 벌여 죄 없는 경국 백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살 곳을 잃고 떠돌게 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경도로 돌아가기로 선택하고 감찰원을 경도 수비사 앞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진평평과 경제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었고,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싸움이 경국 내부의 전쟁으로 바뀌는 걸 바라지 않았다.

“돌아가세.”

진평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원장 대인.”

사비는 마음에 오만가지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그가 손을 들어 감찰원이 일부러 남겨둔 검은색 마차 한 대를 불렀다. 그리고는 진평평에게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바퀴 달린 의자를 들어 검은색 마차에 태웠다.

그 순간 산언덕을 지키고 있던 흑기 진영이 흐트러졌다. 마차에 오른 진평평과 감응이라도 한 것인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는 살벌한 눈빛을 지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흑기들은 무기력함과 슬픔에 휩싸여 조용해졌다.

* * *

은색 달빛이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들어갔다 할 때마다 산언덕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산언덕 위에서 은색 가면을 쓰고 서 있는 형과는 관도에 외로이 서 있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분노에 찬 숨을 토해냈다. 검은색 재질로 만든 서슬이 퍼런 창이 그가 타고 있는 군마 옆에 걸려 있었지만, 말고삐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다.

경력 7년 가을에 반란을 일으킨 진씨 집안은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 황성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항을 죽인 형과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더욱이 지난 3년 동안 진평평이 범한이 감찰원의 권력을 순조롭게 장악할 수 있도록 자신이 쥐고 있던 권력을 일부러 내려놓았고, 이로써 감찰원 안에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범한의 심복인 형과도 자연스럽게 감찰원 5처 수령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형과의 마음속에서 절망과 분노의 감정이 용솟음쳤다. 그는 당장이라도 흑기들을 이끌고 돌진할 준비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진 원장이 경도로 돌아가 죽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군인이었던 시절 진영 안에서 괴롭힘을 받던 형과는 정례 훈련 도중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다가 예기치 않게 진씨 집안의 장남을 죽이고 말았다. 그날 사건으로 인해서 그는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버렸고, 고향에 남아 있던 가족과 아내는 진씨 집안이 복수를 위해 전부 죽여 버렸다.

그렇게 모든 걸 잃은 형과가 감옥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진평평이 몰래 그를 빼내 흑기로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로 은색 가면 뒤에 진짜 얼굴을 숨기고 살아온 형과는 복수를 위해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흑기 안에서 부통령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에 형과는 자신에게 복수할 기회를 준 범한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했고, 두 번째 삶을 준 진평평을 부모처럼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산언덕 위에서 진평평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봤을 때 형과는 살기를 내뿜으며 당장이라도 돌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는 대머리 남자가 그의 말고삐를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분노에 찬 형과가 고개를 돌려 은색 가면 뒤 깊고 그윽한 눈동자로 대머리 남자를 쏘아봤다. 하지만 대머리 남자를 공격하거나 말고삐를 뺏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대머리 남자는 감찰원 안에서 있는 경력이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과거 더 중요한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 대머리 남자는 범한이 과거 감찰원 감옥 안에서 만났던 7처 전임 수령이었다.

“원장께서 자네의 임무를 말해 주지 않았는가. 자네는 4천 명의 흑기를 이끌고 마차 대열이 무사히 국경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호송해 주어야 하네. 그리고 반드시 4천 명의 흑기 중 단 하나도 잃지 말고 온전히…… 작은 범 대인의 손에 넘겨주어야 하네.”

대머리 남자의 안색은 오늘따라 유독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다. 사실 그도 형과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절망과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진 원장이 가장 믿는 심복인 그가 오늘 흑기 대열에 나타난 이유는 진 원장의 명령에 따라 흑기가 소란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원장 대인께서 이대로 경도로 돌아간다면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는 걸 모르십니까?”

형과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했다.

“이건 원장 대인의 뜻이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원장 대인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것이네.”

대머리 남자가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형과가 물끄러미 관도 위에 서 있는 진평평이 탄 마차를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다시 대머리 남자와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몸을 살짝 떨면서 오른손을 천천히 들더니 가볍게 주먹을 쥐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부하들의 난폭한 기세를 잠재웠다.

한참 뒤 검은색 마차 한 대가 경도 수비사 3천여 명의 정예 기병의 호송을 가장한 포위를 받으며 천천히 경도로 돌아가는 관도에 올랐다. 그러자 형과가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면서 얼굴에 쓴 은색 가면을 벗었다. 얼굴에 난 처참한 상처를 드러낸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진평평을 떠나보내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차갑고 무정한 형과의 눈동자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었다.

반면 줄곧 아무 말 없이 마차를 바라보던 대머리 사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고, 눈동자에는 살며시 기뻐하는 기색도 보였다. 대머리 사내가 말에서 내려 관도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형과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대머리 사내는 자신이 나서지 못하도록 막아 자신의 해야 할 소임을 다 마친 뒤 원장 대인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순간 마음이 슬퍼진 형과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말 위에서 내려 관도를 향해 절을 했다.

모든 흑기들이 동시에 말에서 내려 작은 산언덕에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일제히 이미 사람도 마차도 떠난 관도를 향해서 머리를 숙여 절을 함으로써 진 원장 대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이후 다시 은색 가면을 쓴 형과가 잠긴 목소리로 명령했다.

“모두 함께 동쪽으로 간다.”

그렇다. 4천 명의 흑기는 감찰원의 가장 강력하고 가장 믿을 만한 병력이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진평평을 공격하려 하거나 조정에서 감찰원의 힘을 줄이려 할 때 반격하는 힘을 약화하기 위해서는 흑기를 어떻게 다루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형과는 진평평의 명에 따라 4천 명의 흑기를 온전히 경국 국경 밖으로 데리고 가서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범한의 손에 쥐여줘야 했다. 이건 진평평이 범한에게 주려고 준비한 마지막 선물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은색 가면을 쓴 형과는 자신이 맡은 임무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흑기를 이끌고 산언덕을 내려가는 그의 어깨는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고,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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