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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50화 (950/1,108)

950화 두 사람, 전쟁의 막이 오르다. (2)

“원장님, 경도로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2처 부수령이라 자처하는 감찰원 관리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진평평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늙은 종만 놀라지 않은 걸 알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비를 바라보았다.

“아까 돌격하는 기병들을 멈춰 세운 이유가 뭔가? 그건 아마 자네도 3천여 명의 기병으로는 이곳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적으로 이곳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네. 그러니 내가 따라가겠다고 말하면 자네는 나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어.”

그 말에 옆을 지키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무슨 칠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이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진평평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놀라는 모습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사비를 바라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지금 상황은 나만 통제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할지는 내가 결정할 거네.”

진평평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비가 무의식적으로 투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 대인께서 저를 따라 경도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분부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원장 대인에게 교지를 따르라 말한 것 거짓말이었다. 사비도 당연히 황제 폐하가 진 원장을 살려서 경도로 데리고 오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임무가 뜻밖에도…… 아주 손쉽게 성공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저 서른 대의 마차 안에는 짐들과 여자들이 타고 있네.”

진평평이 사비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폐하의 뜻이 뭔지는 나도 알고 있으니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말게나. 내가 지금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마차에 있는 짐과 여자들을 온전히 보내달라는 거네.”

진평평의 부탁을 들은 사비가 무거운 숨을 토해내자 그의 눈동자에서 순간 핏기가 도는 것 같았다.

“폐하의 뜻을 알고 계신다고요?”

사비의 질문에 진평평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가 어떤 분인지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네. 그러니 내가 아끼는 것들을 남김없이 모조리 부숴버리지 않는 이상 폐하는 만족하지 않으실 거네. 그렇지 않은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이 깊고 그윽한 눈빛을 지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내 목숨은 이미 끝났네. 하지만 짐들하고 꽃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은 망가뜨리지 말아 주게…….”

그가 탄식하며 계속 말했다.

“그녀들을 경도에서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면, 내가 굳이 경도를 떠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폐하께서 이렇게 빙빙 돌아서 일을 처리하지도 않으셨을 게 아닌가?”

순간 사비는 목구멍에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멍하니 진평평을 바라보았다. 진평평은 달주에서 발생한 일들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면서도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 폐하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쫓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황제 폐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무정한 지시를 내렸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평평은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평평은 오히려 이 점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을 달주에 모은 뒤 손쉽게 상황을 통제했다. 그리고는 사비에게 자신이 순순히 경도로 돌아가는 대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문제는 진평평이 과연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서른 대의 마차 안에 있는 강노의 화살은 제한적이었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검수의 숫자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니 만일 3천여 명의 경도 수비사 기병들이 죽을 작정을 하고 전력으로 돌진한다면 감찰원 관리들의 방어막을 뚫는 건 시간 문제였다.

사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폐하의 밀지에는 분명히 진평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남겨두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단 한 명도 남겨두지 말라.’

* * *

“폐하께서 자네에게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 명령하셨겠지.”

진평평이 살짝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사비를 바라보았다.

“나는 경국 백성들을 아끼는 동시에 경도 수비사 병사들도 아끼네. 그래서 자네에게 기회를 준 거야. 만일 이 제안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자네들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거네.”

사비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공포스러운 능력을 지닌 진평평의 제안과 폐하의 엄명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고달은 반드시 잡아서 경도로 데리고 가야 했고, 여기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과 밀지를 친위병에게 건네주었을 때 이미 자신에게 감찰원 사람들을 모두 죽일 용기 같은 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비가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결단을 도와주려는 듯 주변에 있는 작은 산언덕에서 갑자기 검은 선이 나타났다. 달빛 아래 주변 산언덕들을 가득 메운 검은 선은 마치 누군가가 산언덕에 목탄으로 거친 선을 그려 넣은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검은 선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언덕에 그려진 검은 선은 검은색 기병들이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기병들이 산언덕에 서면서 검은 선이 만들어진 거였다.

마차 안에서 쇠뇌의 화살을 꽉 쥔 채 경계 가득한 눈으로 들판에 있는 기병들을 주시하고 있던 감찰원 관리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진 원장이 방금 전에 경악할 만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산언덕 위를 자욱하게 덮고 있는 흑기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경국 안에서 누구도 감찰원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반면 수비사 기병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산언덕이 나타난 검은색 선이 달빛을 받아 점점 형체가 분명해졌다. 어두운 검은색 갑옷이 밝게 빛나자 감찰원을 죽이러 온 경도 수비사 기병들은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졌다.

그동안 자신들이 감찰원을 포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신들이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을 포위한 건 감찰원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조직이자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기병인 흑기였다.

* * *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흑기가 있는 산언덕을 바라봤다. 흑기가 있는 곳과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사비는 흑기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흑기가 정말 돌진해온다면 진평평의 호언장담처럼 경도 수비사 기병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거였다.

하지만 사비를 무엇보다도 분노하게 만든 사실은 따로 있었다. 조정은 흑기가 가공할만한 실력을 지닌 점을 감안해서 감찰원이 흑기의 인원을 천명 이하로만 유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 산언덕에 등장한 흑기의 숫자는 족히 4천은 넘어 보였다.

사비가 고개를 획 돌려 진평평을 노려봤다.

“원장 대인께서는 어떻게 폐하께서 제게 달주에서 매복 공격을 하라 명령한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나는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네. 내가 확신한 건…… 폐하께서 절대 나를 이대로 그냥 놔주지 않으실 거라는 거였네.”

진평평이 차가운 눈빛으로 사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제안을 고려해 보아야 할 거네.”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사비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조정은 흑기의 인원이 천 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이건 모반입니다!”

진평평이 침착한 얼굴로 사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또 어떠한가?”

그 말에 사비는 순간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렸다. 바퀴 달린 의자 앞에 꼿꼿이 서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잠시 뒤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직접 움직이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럼 천하에서 원장 대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원장 대인께서는 왜 가지 않으시고 제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신 겁니까?”

“왜냐하면,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진평평이 차분한 눈동자로 사비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저…… 사람들을 배웅해주고 싶었을 뿐이네.”

* * *

사비가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경도 수비사 기병들은 진지를 구축하지 않은 채 완전히 탈진해서는 각자 나뉘어서 야영했다. 패배감과 무기력감이 수천 명의 기병들 가슴에 드리웠다. 경국의 자랑거리인 경도 수비사 정예 기병은 며칠 동안 경도 밖에서 감찰원 마차 대열을 따라왔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경국의 자랑거리인 경도 수비사 기병 수천 명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는 그저 별 볼 일 없는 조롱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비가 두 눈을 감고 휴식했다. 그는 이미 진평평의 모든 조건을 수락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락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다만 진 원장처럼 주도면밀한 사람이 흑기로 공격할 준비까지 해놓았으면서도 어째서 경도 수비사를 따라 경도로 돌아가려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 원장은 황제 폐하의 모든 생각을 예측하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사비는 진 원장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이 상황의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진 원장뿐이며 자신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은색 마차 대열 앞에 있는 공터에서는 십여 명의 감찰원 관리들이 바퀴 달린 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연신 조아리고 있었다. 이들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경도 수비사와 함께 경도로 돌아가지 말라고 간곡히 설득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감찰원 관리들도 황제 폐하의 뜻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이대로 정말 진 원장이 경도로 돌아가게 된다면 살아남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눈치챘다. 감찰원 관리들은 모두들 처음 감찰원에 들어올 때 경국에 충성하고, 황제 폐하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진평평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동행하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은 가장 오랫동안 그를 따른 사람들이었다. 이에 이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경국과 황제 폐하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평평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진평평의 뒤에 설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감찰원 사람들이었고, 감찰원은 진평평의 감찰원이었다. 어둠침침한 감찰원 곳곳에는 진평평이 발산하는 음침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범한이 몇 년 동안 부지런히 활약했음에도 이런 음침한 기운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음침함도 인격적 매력이라 한다면 진평평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이에 모든 심복과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그를 지키고 싶어 했다.

진평평은 가볍게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를 쓰다듬고 두드리자 ‘퉁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부하들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진평평의 얼굴에는 이별에 대한 슬픔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생 동안 해온 일에 대한 만족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경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경도를 떠나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건 그가 평생 해온 일과는 무관한 것이었고, 경국의 미래와도 무관했으며 감찰원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이건 그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일이었다.

“나는 그저 경도로 돌아가 폐하와 지난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거네. 이게 울 일인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자 감찰원 관리들이 입을 다물었고, 통곡하던 사람들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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