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화 밤바람을 타고 들리는 바퀴 달린 의자 소리 (2)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평평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달주 지주의 요청에 따라 마차를 타고 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궁정 태감들과 형부 관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진평평이 두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서 진평평만큼 경국 황제 폐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달은 분명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단단하지 못해 시금석으로조차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항상 주관적인 법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는 지금 어둠이 깔린 산속에 있는 진평평에게 질문을 건네주고 그에 따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진평평의 앞에는 아주 많은 선택이 놓여 있었다.
그는 고달을 구한 뒤에 천천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앞을 막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섭중과 요 태감이 알고 있듯이 경국 영토 안에서 누가 감히 진평평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평평은 고달이 죽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고 마차 안에 있는 여자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삶을 보낼 수도 있었다.
* * *
황제 폐하는 진평평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진평평이 무슨 선택을 하든 상관없이 황제 폐하는 확인하고 싶어 했다. 황제 역시도 진평평이 경도로 돌아가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에게 경도로 돌아가 황제를 만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평평이 오랜 시간 자리에 가만히 있자 관도 양쪽의 분위기가 갈수록 이상하게 변해갔다. 사람들은 점점 진평평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설마 또 누군가가 오는 건가?’
고달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감찰원 관리가 바퀴 달린 의자 옆으로 걸어가더니 허리를 숙이고 진평평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진평평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속도는 아주 느렸지만, 무척이나 단호해 보였다.
얼마 뒤 관도 뒤편에서 어렴풋하게 소리가 들렸다. 떠들썩한 소란이 아니라 규칙적이고 묵직한 소리였다.
감찰원 관리들은 이 대열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횃불 포위망 정중앙으로 안내했다.
달주 지주와 하칠간을 비롯한 궁정 태감들, 그리고 형부 관리들은 마침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온 대열의 정체와 진 원장이 기다리던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보니 진 원장은 일찌감치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예측하고 있었다.
만약 이 상황이 거대한 바둑판이라면 하칠간을 비롯한 궁정 태감들과 고생을 한 형부 관리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처음 이 계획을 세운 하종위까지 모두 보잘것없는 바둑돌에 불과했다.
하종위가 보낸 사람들은 황제가 내린 교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찰원이 개입해도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평평의 지위를 생각하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마침내 교지가 도착한 거였다.
이건 마치 허를 찌르는 수를 제시한 뒤 상대방에게 움직일 건지 아니면 앞에 있는 말을 죽일 건지 묻고 있는 것과 같았다.
* * *
십여 명 정도 되는 작은 부대 안에는 교지를 읽을 태감이 없었다.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경국 군사들은 영웅처럼 위풍당당했지만, 표정은 심란해 보였다.
작은 대대를 이끄는 대장이 황색 교지를 높이 들어 보였다.
말굽 소리가 조용한 달주 성 밖을 깨웠다. 군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 뒤 대장이 손에 들고 있는 교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교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진평평과는 관련 없는 내용으로, 바로 감찰원 마차에 있는 도망자 고달에 대한 것이었다. 형부 관리들에게 황제를 기만한 반역자를 빨리 잡아 경도로 압송하라고 명령하고, 동시에 누구든 압송을 막을 경우 반역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교지를 모두 읽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너무 조용해서 풀 위에 맺힌 이슬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빛으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바보라도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기묘한지 알 수 있었다. 세상일이 어떻게 이처럼 절묘하게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감찰원에서 궁정 쪽이 교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자마자…… 황제의 뜻이 담긴 교지가 달주에 도착했다.
달주 지주 대인은 본능적으로 포위망 밖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밖으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들은 이제야 오늘 일이 오로지 황제 폐하와 진 원장 사이의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그들은 감이 이 일에 참여할 자격도 없었고, 심지어 옆에서 구경할 자격도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교지를 읽은 대장은 밝은 황색 포를 품에 넣고는 바퀴 달린 의자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관은 경도 수비사 비장(裨將) 관웅입니다. 사비 장군의 명령을 받아 궁정과 형부가 도망자를 체포하는 걸 돕기 위해 온 것이니 원장 대인께서도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평평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는 이런 상황이 결국에는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그에게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를 막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황제 폐하 역시 진평평 스스로 그 통로를 막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일 터였다.
지금의 상황은 고달로 인해 비롯된 거였지만, 고달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건 진평평과 황제 사이의 일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 * *
멀리 조용하고 평온한 산간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경국의 군마는 훈련이 아주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수천 명의 경도 수비사 정예 기병들이 산골짜기에서 마지막 공격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수천 명의 병사들이 관도 위에 있는 서른 대의 마차를 공격하는 건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맨 앞에 서 있는 사비 대장이나 내막을 알고 있는 경도 수비 관병들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전투라고 생각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비가 손에든 단안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이 단안 망원경은 경국 전체를 통틀어 몇 개밖에 생산되지 않은 것으로, 새해에 작은 범 대인이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사비는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3년 전에 경도 동산로에 큰 혼란이 일어났었다. 또 정북 진영 주사 연소을이 반란을 일으켜 수천 명의 친위병을 이끌고 대동산을 포위해 정북 진영 전체에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연소을이 일으킨 반란은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정북 진영은 수장을 잃어 반란이 일어나거나 병력이 궤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로 그때 황제의 명령을 받은 사비는 혼자 힘으로 정북 진영에 들어가 수만 명의 군사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이처럼 큰 공을 세운 계기로 지금 경도 수비사 통령이 될 수 있었다.
혼자 힘으로 수만 명의 병사를 굴복시킨 일에 비하면,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대적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비는 어느 때보다 긴장되었다.
교지를 읽으러 젊은 비장이 떠난 뒤 사비는 줄곧 마음속으로 진 원장이 교지에 따라 물러나길 기원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진평평이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황제 폐하가 진평평에게 퇴로를 남겨준 이유는 그가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비는 황제와 진 원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그 일이 두 사람 사이를 단절시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 원장은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음에도 경도로 돌아가 황제 폐하와 서로 마주 보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선택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횃불로 밝게 밝혀진 관도는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진평평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비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었다. 산골짜기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폐 속에 들어오자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져 왔다. 그가 천천히 머리에 쓴 갑옷을 벗고는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준비해라.”
갑옷을 두른 수천 명의 병력이 감찰원 전임 원장 진평평을 포위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폐하께서 묻고 싶은 게 있어 내가 돌아오길 바라시는 모양이군.”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이미 예상 했던 일이네. 다만 폐하께서 이때까지 참다가 물으려 할 줄을 몰랐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일을 벌이실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는군.”
그러자 옆에 있던 감찰원 관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대인, 폐하의 교지를 따르셔야 합니다!”
“아니, 나는 평생 교지를 따르며 살아왔네. 하지만 곧 죽을 마당에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겠나?”
진평평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폐하께서만 네게 묻고 싶은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나는…… 폐하에게 묻고 싶은 일이 없었을 것 같은가?”
진평평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가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불빛 아래 선 수백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모름지기 오랜 시간 품고 있는 의문이 있다면 물어봐야 하는 거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주성 밖에서 천둥소리만큼 큰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달빛에 번쩍이는 갑옷이 보였다.
일순간에 관도 뒤편에서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어나자 횃불 불빛이 약해졌다. 횃불이 다시 밝아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 행렬 주변을 병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갑옷을 두른 병사들이 조용히 살기를 내뿜었다.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는 주변 상황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차 안에 있는 여자들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보고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은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걸린 걸 제외하면 이전과 같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기에 감찰원 부하들도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기만 했다.
이들은 쇠막대기 손잡이를 꽉 움켜쥐거나 쇠뇌의 화살을 꽉 움켜준 채 긴장한 눈빛으로 관도 양쪽 들판에서 돌진해오는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일반 전투와는 다르게 모두들 갈팡질팡하며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수천 명의 기병들은 수적 우세를 내세우며 마차 대열에 돌진해 살육을 벌이지 않았다. 기병인 만큼 돌진해서 공격해야 유리했음에도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서른 대의 마차를 포위했다.
횃불이 밝혀진 어두운 관도에서 수천 명의 기병들의 갑옷에서 뿜어내는 은색 빛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늙은 종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돌렸다. 진평평이 손바닥에 턱을 괴고 관도 양쪽 들판에 있는 기병들과 온몸에 갑옷을 두른 장군을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병 3천 6백 명으로 나를 잡을 생각인 것인가? 사비 장군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군.”
사실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비는 내적 갈등에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그가 부하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면 공격을 감행해서 감찰원과 틀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진평평의 마음속에 있는 계획이 뭔지 몰랐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건 황제 폐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감찰원과 철천지원수 사이가 된다면 훗날 처참한 말로를 맞이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진평평을 무서워했고, 범한도 무서워했지만, 황제 폐하를 더 무서워했다.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 원장의 말에 사비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가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진 원장 대인……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고 도망자를 지켜주려 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이 일이 황제가 병력을 보내 고향을 내려가는 늙은 신하를 죽이는 문제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가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떳떳하고 밝은 역할을 하려 하시는구먼. 그렇다면 내가 어둡고 음침한 역할을 맡아야겠지.”
서른 대의 마차 중에서 짐과 여자들이 있는 마차를 제외하면 감찰원 호송 인원은 총 백 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백여 명의 감찰원 관리들은 3천여 명에 달하는 경도 수비사 기병들을 보고도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도 겁나지 않는 듯 침착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