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6화 군자, 동료, 퇴로 (2)
언빙운이 유일하게 건들 수 없는 부서는 감찰원 1처였다. 1처는 원래 경도 관리들을 감찰하는 업무를 맡고 있어 경도 안에서만 활동하는데다가 범한이 직접 관리하는 부서라서 함부로 건들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 1처 수장은 목철이었지만, 1처 관리들은 여전히 범한을 자신들의 직속상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의 명령서를 가지고 있는 언빙운도 평상시와는 다른 특수 명령을 내려 이들을 경도에서 떠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모든 조치를 끝낸 언빙운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자신이 방금 한 모든 일들이 곧이어 자신의 숨통을 막을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건 경국을 위해서지.”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던 언빙운은 오래전에 아버지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매끄럽고 반듯한 눈가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건 감찰원을 위해서인가?”
* * *
어서방에서 나온 요 태감이 기다리고 있는 섭중과 궁전을 찾아와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을 무렵에는 황궁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황명을 받기 위해 땅에 무릎을 꿇은 섭중과 궁전은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두려움과 놀람,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다. 요 태감이 폐하의 친필 서신을 건네주며 아무런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사비 대장이 명령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섭중은 폐하의 서신을 받기 위해 일어섰지만, 과거 대동산 사건에서처럼 팔이 천금처럼 무거워져서 쉽사리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경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9품 강자 중 한 명이었지만 앞에 서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이 서신의 진짜 주인은 섭중이 아니라 연경파 중신인 사비였다. 경도에서 오래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제 폐하는 이 중요한 일을 처리할 담당자로 그를 보냈다. 추밀원 정사인 섭중은 사비를 떠올릴 때면 슬픔과 동시에 한기가 느껴졌다.
연경파가 맡은 일을 정주군에게 맡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 일을 처리하기에 사비가 이끄는 경도 수비사가 편리한 것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제 폐하는 경도에서 오래 살아온 섭중이 진평평과 돈독한 사이일까 봐 걱정해 임무를 맡기지 않은 것이었다.
섭중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빈손이 된 요 태감은 등을 웅크리며 천천히 금군의 숙영지를 나와 깊은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수령 태감인 요 태감 역시 섭중과 마찬가지로 온갖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황궁에서 오래 살아온 그는 폐하와 진 원장의 관계를 오랜 시간 지켜봐 왔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 군신 관계와는 달리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마음속에 진 원장이 평범한 대신 이상의 특별한 존재였다.
어서방 안에서 황제 폐하가 평소와는 다르게 진노하던 모습을 떠올리던 요 태감이 씁쓸함과 괴로움이 담긴 복잡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황제 폐하가 정말 진 원장을 처리하고 싶었다면, 그가 경도에 머물고 있었을 때 했을 거였다. 진 원장이 사직을 청하기 위해 입궁했을 때 움직였다면 훨씬 수월하게 그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황제 폐하는 어째서 진 원장이 경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는 잡으려 한 것일까?
모든 일은 달주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죽기 싫어서 도망친 호위도 달주에 있었고 하 대학사가 보낸 형부 고수도 달주에 있었으며, 궁정이 도찰원을 돕기 위해 보낸 고수도 달주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황제 폐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요 태감은 여전히 황제 폐하가 진평평을 놔주고 싶어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 태감은 만약 진 원장이 정말 도망칠 마음을 먹는다면 폐하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지 않는 이상 늙은 괴물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태극전으로 걸어간 요 태감이 복도 기둥에 기대 한가로움을 즐겼다. 그를 본 태감과 궁녀들은 살짝 무서운 듯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소리 없이 떠났다. 눈을 감고 초가을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요 태감이 남몰래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 원장, 떠났으니 돌아오지 마십시오. 폐하도 진 원장이 돌아오는 걸 바라지 않으시니까요.’
그렇다. 무정하고 냉혈한 경국 황제 폐하는 오랜 시간 은밀하게 조사를 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성격과 걸맞지 않게 진평평에게 살 기회를 주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진평평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와 떠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진평평은 떠나기 전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달주성 밖에서 조정에 체포하려는 호위 고달과 우연히 만난 그는 이대로 떠날지 아닐지를 결정해야 했다.
만약 진평평이 이대로 떠나려 한다면 이 일은 이렇게 끝나겠지만, 떠나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경도로 돌아오게 될 거였다.
이건 경제가 진평평에게 호의를 보였다기보다는 진평평의 마음을 심문하고 진심이 뭔지를 물으려 하는 거였다.
경제와 진평평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 온 사이였다. 의심이 많은 황제 폐하는 누구도 믿지 않았기에 누가 자신을 배신하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진평평만은 예외였다. 그는 진평평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에 자신이 조사해 알아낸 정보까지도 믿지를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그건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경제는 무의식적으로 진평평이라는 외로운 절름발이 노인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부분이 있다는 걸 증명할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분노하고 초조해하면서도 자신과 진평평의 마음 속 진심을 직시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당사자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옆에 있는 제삼자는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었다. 아마도 이 모든 걸 명확하게 보는 사람은 태극전 복도 기둥에 기대서서 햇볕을 쐬고 있는 요 태감일 거였다.
늙은 홍 태감이 햇볕을 쐬는 걸 좋아했듯이 요 태감도 햇볕을 쐬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과거 범한의 손에서 죽은 후 내관도 햇볕을 쐬는 걸 좋아했다. 이들이 햇볕을 쐬는 걸 좋아하는 건 마음속에 너무 많은 비밀을 품고 있고, 다른 사람보다 예리한 시선을 가졌기 때문일 거였다.
그들은 제왕이 기뻐하고 분노하는 많은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고, 생각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햇살을 쐬면서 마음속 비밀에 곰팡이가 끼는 걸 방지하고 제왕의 차가운 마음에 동상 걸리는 걸 막고자 했다.
두 눈을 감은 요 태감이 천천히 호흡했다. 그는 홍사상과 같은 무예 고수도 아니었고, 경국 천하 통일에 자신을 희생할 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신중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목적은 자신의 평온한 삶을 지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화를 입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와 진 원장 사이의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오늘 햇볕이 정말 좋군.”
태극전 옆에서 걸어 나온 대 내관이 빙그레 웃으며 요 태감 옆으로 걸어왔다.
요 태감이 오랜 동료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같은 날에 황궁에 들어왔지만, 대 내관은 요 태감만큼 평탄하게 지내지 못했다. 처음에 숙 귀비의 궁에서 근무했던 대 내관은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아 대신 저택에 교지를 전하는 중요한 일을 모두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하루아침에 세력을 잃고 궁 안에서 고생하다가 작은 범 대인의 도움을 받고, 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다시 황궁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황궁에 있는 태감과 궁녀들은 하나 같이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수령 태감인 요 태감을 두려워했지만, 대 내관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로 오랜 시간 알아 온 사이인데다가 대 내관도 지금 적지 않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데다가 뒤에는 작은 범 대인까지 버티고 서 있어 두려울 게 없었다.
요 태감이 아무 말 없이 옆으로 살짝 걸어가 대 내관이 기둥이 기댈 자리를 만들어줬다.
대 내관이 그를 힐끗 보고는 뭐라 말하려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막 황궁에 들어왔을 때 햇볕을 쬐면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늙은 홍 태감에게 곤장 50대를 맞았던 거 기억하는가?”
요 태감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같이 들어온 어린 태감들 중에서 몇몇 사람들은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옛일을 떠올린 요 태감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대 내관이 자신에게 뭘 물어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분명 상대방도 오늘 황궁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거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섯 명만 알고 있을 정도로 보안이 중요했고, 더욱이 대 내관과 작은 범 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말해 줘서는 안 됐다.
요 태감이 웃으면서 오른쪽 손 옆에 비친 햇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때 동료들 중 거의 대부분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네. 그러니 우리처럼 함께 매를 맞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은가?”
“우리는 살지 않았는가. 살았으면 된 거지.”
대 내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요 태감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젊은 태감이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홍죽이 요즘 자네를 따라다니던데 어떤가?”
“저 아이는 3년 전에 받은 큰 충격으로 갈수록 과묵해지고 있네.”
대 내관은 영민하고 과묵한 홍죽이 마음에 드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동궁에서 가장 잘나가던 태감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이전에 어서방에서 폐하를 모시기도 했었지. 뭐 과묵해졌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 않은가.”
요 태감이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에 비해서 자네는 이전에도 말이 너무 많았지.”
대 내관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이틀 뒤 달주성 밖을 둘러싸고 있는 산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한 경도 수비사 병력들이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를 하기 시작한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았을 무렵 경도 추밀원에서 보낸 긴급 밀지가 전해졌다.
밀지를 받은 사비가 봉인을 뜯고 안에 든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수축하더니 곧이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옆에 친위병에게 밀지를 건넸다.
“밀지를 잘 보관하고 있게! 만약 내가 죽으면 그 밀지를…… 작은 범 대인에게 보내게.”
수천 명의 경도 수비사 기병은 산골짜기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대장 사비는 친위병만 거느린 채 석양 아래 서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달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비의 지시에 화들짝 놀란 친위병이 속으로 생각했다.
‘연경 대군은 작은 범 대인이나 감찰원과 어떤 연관도 없지 않은가? 이 편지에 무슨 중요한 내용이 담긴 건가?’
사비는 놀란 친위병을 보며 차갑게 웃을 뿐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산골짜기 아래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면서도 자신감이 생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역시 경도 수비사 관병들 안에 감찰원에 심어둔 밀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조정의 규정이나 감찰원 조례에 감찰원이 군대에 개입하는 걸 엄격히 금지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대장 사비를 비롯한 누구도 이 점이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진씨 집안 어르신같이 대단한 인물도 감찰원이 심어둔 밀정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사비는 진업만큼 대단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속도를 줄여 달주 방향으로 접근해라.”
사비는 자신이 실패해서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자신이 죽은 뒤 황제 폐하가 작은 범 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진 원장을 살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울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황제 폐하가 직접 쓴 밀지를 친위병에게 건네주며 이번 일이 실패하면 밀지를 작은 범 대인에게 전달하라고 명령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