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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37화 (937/1,108)

937화 바람이 일다 (2)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원 복장을 한 범약약이 진료상자를 등에 멘 채로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뒤에서 몇몇 여종이 잔뜩 난처해 하며 황급히 무거운 물건을 받아들었다. 범약약이 시골에서 돌아온 거였다.

범약약은 문 앞에 형수가 서 있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농담 몇 마디를 건넸다.

저 먼 북제 황궁에서는 북제 젊은 황제가 정전(正殿)의 옥대(玉臺) 위에 앉아 있었다. 황제는 옥대 옆으로 펼쳐진 연못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흰 모래며, 모래 위에 함께 누워 있는 물고기 한 쌍을 그윽한 눈빛으로 넋을 빼고 지켜보았다.

이번 협의의 비밀 내용은, 이치를 따져봤을 때, 북제 금의위가 탐지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그 남자가 일부러 자신에게 소문을 낸 것일 터.

북제 젊은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가 이리 어수선한 기색을 보인 건 평생 처음이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나라며 자신의 장래가 어찌 될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국면은 모든 게 명확한 것만 같은데, 범한과 경국 황제 간의 모순은 폭발할 계기가 보이지 않으니. 대북제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 걸까?

만약 과거라면, 어쩌면 그는 일찌감치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국고로 들어오는 수입 절반을 쓰든, 무수히 많은 대가를 치르든, 아무튼 범한과 경국 황제가 반목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는 마음이 바뀐 상태였다. 왜냐하면 범한이 과거 했던 말들의 힘을 알고 있어서였다.

바로 7월 초의 그날인 건지, 아니면 그냥 7월 초의 그날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륙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평소와 똑같은 또는 평소와 다른 일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역사의 어느 전환점에서 누군가가 역사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건 경도도 상경성도 아닌, 경국의 어느 외진 고을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건 분명 관례대로 이루어진 치안 조사여야만 했다. 그런데 아속들은 살짝 지루하고 따분한 모습으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느릿느릿 걷다가 시시각각 거리 상점 아래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들어가 더위를 피하며 쉬기를 반복해댔다.

그런데 그때 변장하고 이름까지 바꾼 지 3년이 된 고달이 거리 한 구석 국수 노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건강한 붉은 빛이 돌고 있었다. 과거의 굳건해 보였던 얼굴 표정은 벗어버렸어도 충분히 편안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는 과거 장도를 쥐었던 손으로 긴 젓가락을 가볍게 쥔 채 솥 안의 국수를 능숙하게 건져내 그릇에 담고 향신채를 뿌려 향긋한 국수 한 사발을 말아내는 중이었다.

대동산에서 도망친 후 고달은 경국 각 고을을 떠돌았다. 하지만 경국의 엄격한 호적 제도와 통관문서 제도 때문에 그는 적잖이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의 신분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평온한 삶을 살고 싶어도 그에게는 그게 여전히 어려운 일인 것만 같았다.

그는 황가 호위(虎衛)였기 때문에 다른 일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민간 하류층이 사는 강호의 삶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당당했던 호위에서 하룻밤 사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만 떠돌게 되자 그는 생각보다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달주에 머물게 되었고 이로써 그는 드디어 완전히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거리에서 작은 국수 노점을 열고 날마다 뙤약볕 아래에서 국수를 말고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부인과 아들에게 돌아가게 된 거였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매일 노점 일을 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 온몸을 뜨겁게 달궈주는 아내를 품에 안고 있으면 모두 그런 기분일 것이다. 이에 고달은 더는 장도를 휘두를 일이 없어도 아쉽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할지로도 그는 늘 경계했다. 비록 요 몇 년 동안 조정에서 호위가 전멸했다고 여긴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달은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궁정 쪽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궁정 호위였으므로 자신이 사사로이 도망친 건 군주기만죄에 해당하며, 일단 잡히면 오로지 멸문지화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달은 여전히 범한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범한은 경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 거리 곳곳에서는 범한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제사 대인이 최근 3년 동안 매우 잘 지낼 뿐만 아니라 경국을 위해 공을 많이 세우고, 심지어는 최근에 동이성을 경국 지도에 편입시킨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에 고달은 기쁜 나머지 작은 범 대인은 과연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하며 몇 차례 술까지 마시셨다. 하지만 범한을 찾아가 자신의 죄를 벗을 생각은 여전히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생활이 무척이나 좋아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형부 아속들이 그의 국수 노점에 들어와 자신의 아내를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 * *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계시고, 시골 사람 인심은 잔혹하고. 현재 경국 내 모든 관원들은 감찰원의 강력한 감독 하에 있어 공무 집행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감찰원은 기형적인 기구였으므로 봉건 왕조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모든 단계의 관아를 다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외진 지역일수록 관원이라는 이 특권계층이 얼굴은 더욱 추악해졌다.

달주는 멀고 외진 곳에 위치한 주군(州郡)이었다. 이곳 아속과 관원들은 호랑이와 승냥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민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나 한 여름 태양이 이들 아속들 몸에서 냄새나는 땀을 뽑아대자 그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소고기 세 근과 백주 두 근으로 심장까지 후끈 달아오르자 아속들은 술 노점을 떠나 국수 노점으로 와 이곳 여주인을 향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아녀자를 희롱한 거였다. 이는 정상적인 관원과 아속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평소 같았다면 이들 아속들은 아녀자를 그냥 보기만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입으로는 갈수록 더러운 말을 내뱉었다. 일부 술이 많이 취해 얼굴과 귀가 벌겋게 달아 오른 놈들은 국수 노점 아낙에게 자신들 옆에 앉으라고 치근덕거렸다.

그런데 누굴 탓하랴! 오늘따라 황주가 목으로 너무 술술 넘어가고, 백주 상태가 너무 좋고, 국수 노점의 아낙이 너무 청초하게 예쁜 걸 탓해야지!

* * *

고달은 달주에서 아내를 얻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은 채 그냥 평온한 나날을 지냈다.

어떤 때는 인생 후반기 시작점에 이리 아름다운 아내를 얻게 된 걸 두고 하늘이 자신을 너무 잘 돌봐주고 계시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의 아내는 과부에 벙어리이고, 아들까지 딸린 여인이었다. 하지만 고달은 자신의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내가 대단한 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달주에서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녀는 고달이 과거 북제로 호위해 보낸 사리리 낭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고달은 아내의 지극히 온순하고 부드럽고 현숙한 성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도 좋아서 어떤 말로 형용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숨기기 위해 고달은 눈에 띄는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좋았고, 그녀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녀의 한 살 된 아들까지도 불쌍히 여기고 아꼈다.

벙어리 아내는 이 낯선 외지 사람의 성실함과 근육으로 다져진 몸매, 그리고 믿을만하고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녀가 아름답기는 했지만, 벙어리에 과부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거란 희망 자체를 갖지 않았다. 그리고 달주성에는 그녀의 친척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군침을 흘리는 남자는 항시 있었다. 대개 그녀의 몸을 노리는 이들로 그녀를 납치해 첩으로 들이려 했다.

벙어리 아낙은 그런 사람들이 싫었고, 단출해도 따스한 가정이나 가져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되었다. 몇몇 이웃들을 초대해 함께 밥을 먹는 것으로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송장공과 달주의 불쌍한 과부는 함께 살게 되었다.

한 살 된 아이는 가끔 부모와 함께 국수 노점에 나왔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되는 날이면 이웃 아주머니가 대신 돌봐주었다.

달주성의 백성들은 경국의 모든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순박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관원과 아속들은 백성은 아니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백성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고달은 국수를 건지는 팔을 아래로 내리고 얼굴을 살짝 숙인 채로 있었다. 이에 국물 솥에서 올라오는 증기에 때문에 그의 눈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낙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부끄러움과 분노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거였다. 점포 안에서 갈수록 저속한 말들이 들려오자, 그녀의 눈에서 굴욕의 물방울이 반짝였다. 그녀는 국물 솥 앞에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차리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남편이 알아차리지 못하자 살짝 실망해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혼인 전부터 그녀는 송 대형이 겁쟁이란 걸, 자신만큼 말수가 거의 없는 온순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국수 노점 부부의 침묵은 아속들의 화를 돋게 했다. 세상일이란 건 늘 그런 거다. 일방이 다른 일방을 압박할 때 반항하지 않으면, 압박의 강도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어느 아속이 손을 뻗어 벙어리 아낙의 뽀얗고 작은 손을 잡아챘다. 여인이 손을 뿌리치자 기분이 나빠진 아속은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젓가락을 쥐고 있던 고달이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는 참아야만 했다. 일단 일이 터지면 자신과 아내는 조정의 지명수배자밖에 될 게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과거에 조정 소속 고수였기 때문에 경국 관원에게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아속이 입으로만 한바탕 하고 잠시 후 떠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속들은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형부의 고관이 달주에서 일을 주재하고 있어서였다. 듣기로는 그들이 어느 큰 안건을 조사하는 중이라 이들 하층 아속들을 뜨거운 태양 아래로 내몰아 힘들게 쏘다니도록 만든 거라고 했다.

그러다 국수 노점 그늘 아래로 숨어들어 아름답고 말을 못하는 젊은 아낙을 희롱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유쾌했을까? 그런데 국수 노점의 남자? 이들 아속은 송씨 남성은 허우대만 멀쩡했지 방귀도 뀌지 못하는 못난이라고 알고 있었다.

못난이 앞에서 대놓고 그의 아내를 희롱하는 건 또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 * *

국수 노점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일찌감치 스리슬쩍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떠나기 전 고달에게 동정과 정신 차리라는 눈빛만큼은 잊지 않았다. 백성은 관료와 달랐던 것이다. 국수 노점의 주인이 이들 아속과 정말로 소란을 일으키는 걸 원치 않은 거였다.

고달은 소란을 피우지 않고 젓가락만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내를 뒤쪽으로 불러들인 후 탁자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정말 어색하게 양 뺨에 웃음을 띠고는 잠시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사정을 봐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고달이 평생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해 본 대상은 범한밖에 없었다. 그런데 범한은 그의 아부를 싫어해 중간에 끊어버리고는 왕계년에게 가서 배우라고까지 했었다. 그날부터 고달은 더는 비위 맞추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범한이 아무리 정 3품 관원일지라도 그를 대할 때면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 최대한 공손하게만 행동했다.

그러니 오늘 이들 아속에게 아첨하는 말을 해가며 용서까지 구한 건 고달 인생에서 최대의 양보를 한 것이었다. 무릇 3년 동안 세상에서 구르다 보면, 이미 무언가를 배웠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하지만 그는 손에 장도를 쥐고 상경성에서 단 한 초식 만에 상대를 제압한 호위 고달이었다. 그러니 어찌 자신의 강직한 성격을 제대로 꺾고 모래톱의 새우처럼 몸을 굽힐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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