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936화 (936/1,108)

936화 바람이 일다 (1)

“좀 쉬고 하시면 안 되나요?”

성아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지더니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이리 더운 날씨에는 황제 폐하께서도 오지 않으실 테고······.”

이승택이 진지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게 전부 스승님께서 주신 책 목록이다. 대부분은 과거 북제에서 가져 온 경전이지. 오늘 안으로 완독해야 한다. 더군다나 필기까지 해서 검사까지 받아야 하느니라.”

이승택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어머님께서 또 내게 채벌을 하실 게다.”

그러자 성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말했다.

“작은 공자 어르신은 지금 동이성에 있습니다! 하여 어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 있겠습니까.”

경도에서 인 반란을 평정한 후에도 황제 폐하는 범한에게서 스승이란 지위를 없애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범한은 3황자와의 독대를 거의 하지 않았다. 3 황자 역시 말썽을 부리며 출궁하던 걸 그만두었다.

두 형제 모두 3 황자가 경국의 진정한 황태자란 걸, 그래서 황제 아버지께서 황태자 교육을 범한에게 맡기기보다는 직접 하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금기를 지키기 위해 가급적 덜 만났다.

범한은 수방궁을 매우 드물게 방문했지만, 3 황자를 향한 교육이며 훈련을 멈추지는 않았다. 강남에서 지낼 때 범한은 3 황자에게 많은 걸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교육했다면, 최근 3년 동안에는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선정해 놓고 그에게 그것들을 모두 읽도록 해놓은 터였다.

평소 공무가 바빠도 범한은 시간을 내어 3 황자가 독서 후 필기한 내용을 살펴주었다. 이 일이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경국의 장래가 이승택에게 달려 있다면, 범한은 그가 어진 제왕이 되기를 바란 거였다. 그리고 이승택에게 영웅 같은 기개는 없다 쳐도 적어도 그가 자기 가업만큼은 잘 돌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매년 설 무렵이 되면 범한은 일가족과 함께 입궁했다. 그리고 그때는 범한이 3황자의 공부를 세세히 살펴봐주는 때가 되었다. 이에 수방궁에서는 회초리 때리는 소리와 3 황자가 고통을 참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궁녀 성아의 표정이 살짝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녀는 설을 쇠고 난 후 이승택의 첫 여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이승택에게도 그녀는 첫 번째 여자였다. 이에 성아는 작은 범 대인이란 이름자가 들려오자 참지 못하고 불평했다.

“작은 범 대인은 너무한 것 같아요. 걸핏하면 채벌에, 조금도 안 봐주고 말이지요.”

과거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 성아는 범한을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시키고, 인사를 시키러 다녔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3 황자와 함께 지내다보니, 이제는 황궁 밖에서 최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이 두렵기는커녕 옛날 그 잘생긴 청년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이에 그녀의 언사에서 공손함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거였다.

하지만 이승택은 여전히 범한이 무서웠던지라 씁쓸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일 때문에 부황께 말대꾸를 해봤지. 하나 모친께서 스승 편을 드시니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승택에게는 미움의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멍한 표정으로 탄식만 할뿐이었다.

“오랫동안 출궁하지 못했더니, 스승님께서 동이성에서 하시는 일이 어찌 되어 가는지 알 수가 없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성아가 어느새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웃으며 말했다.

“작은 범 대인이 직접 나섰으니 제대로 처리 안 될 리 없을 것입니다. 황궁 내에서 떠도는 소문으로는 동이성 일은 이미 결정이 났다 합니다. 1황자 마마께오서 곧 병사들을 이끌고 가실 거라던데요.”

3 황자도 당연히 조정의 제일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승님이 조정을 위해 불세출의 공을 세웠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자랑스럽게 여겨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갔다면 좋았을 것을.”

소년의 얼굴에 문득 어떤 생각 같은 게 스쳤다.

“살면서 제일 즐거웠던 시기는 사실은 두 차례 궁 밖에서 지냈을 때구나. 하나는 사철이 녀석과 포월루를 차린 거였고, 다른 하나는 스승님께 강남으로 끌려간 거였고······. 언제 다시 또 출궁할 수 있을는지.”

누구든 성장 과정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동성 중 가장 강력한 사람을 찾아내 그를 대결 목표와 모방 대상으로 삼기 마련이다. 그건 황궁에서 나고 자란 황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성숙한 정도가 민간 소년들보다 빠른 것뿐이었다.

이제 막 청소년기의 새싹 단계로 접어든 이승택은 지근거리에서 두 개의 거대한 산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부황과 범한이었다. 그런데 경국 황제는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강대하고 냉철한 인물이었다. 반면 범한은 강력하기는 해도 확실히 저속한 느낌이 있었고, 또한 집요하고 단순함에서 오는 친근함이 있었다.

그래서 3 황자는 범한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수방궁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수령 태감이 몸을 굽히고 내전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에 성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수령 태감을 바라보았지만, 감히 실례를 범할 수는 없어 곧바로 3 황자 뒤에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수방궁을 찾아온 이는 요 태감이었다. 현재 그는 황궁의 수령 태감으로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 측근 신하였다.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든 이승택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자가 이곳까지 친히 온 건지.

“요 태감, 무슨 일인가?”

요 태감은 자기 분수를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비록 황제 폐하의 측근이기는 해도 앞에 있는 3 황자가 황궁 내 딱 둘 남은 황족 남자 중 하나이며, 장래에 황제 폐하가 되실 분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정중히 큰절을 올리고는 온화함 음성으로 대답했다.

“궁정에서 여러 해묵은 안건을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데 어떤 일들은 전하와 관련이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전하께 폐를 끼치게 되었나이다.”

이승택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그는 똑똑했던 터라 태감의 말 속에서 많은 정보를 감지해낼 수 있었다.

‘여러 해묵은 안건이라고? 한데 그게 나와 무슨 관련이 있지? 나는 일 년 내내 황궁에만 박혀 있었는데, 나를 정면으로 스쳐간 안건이 뭐가 있는 거야? 더군다나 어떤 안건이기에 이렇게나 나를 놀라게 만드는 거지?’

‘포월루? 그럴 리가. 과거 스승님은 이 일로 2 황형을 잔혹하게 공격하셨어. 한데 그 일은 황제 폐하께서도 수긍하신 거였으니, 이제 와 다시 들먹이실 리는 없어. 하물며 현재 나의 신분을 고려하면 그 일에 나를 끌어들일 만한 담력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궁정에서 조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승택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3년 전 경도에서 모반이 일고 황궁에서 큰 난이 일었을 때 3 황자와 의 귀빈, 영 재인은 모두 함광전에 연금되었었다. 그리고 그 긴장 된 시기에 황궁 내 누군가가 그를 암살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때 수중에 범한이 직접 만들어서 건네준 독 묻힌 비수가 없었다면, 그는 일찌감치 죽고 없을 터였다.

훗날 황궁 안팎에서 이 일을 두고 의혹이 일었다. 당시 태자가 이미 황궁 내 국면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도리에 어긋난 일이 발생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2 황자를 의심했지만, 나중에 조사를 해봐도 그와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었다.

이승택에게는 그 일이 기억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밝히고 싶었지만, 감찰원이 오랫동안 조사를 했음에도 아무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범한도 그 일을 두고 이승택에게 사적으로 말한 적 있었다. 더는 조사하지 말라고 말이다. 이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3 황자는 더는 범한을 상대하지 않았다. 스승님이 분명 무언가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자신이 조사하는 걸 돕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서였다.

그런데······ 궁정에서 느닷없이 그 일을 조사한다고?

자신의 안위, 자신을 죽이려던 흉수에 대한 분노 그리고 범한을 향한 신임 때문에 3 황자는 잠시 갈등했다. 그러다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했다.

“그때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구나.”

“하면 마마께오서 소인에게 그림 한 장 그려주시겠습니까?”

이승택에게 살해당한 내관 시신 둘은 난중에 서둘러 소각되었다. 그때 황궁 변란으로 너무 많은 수의 내관이 죽었다. 당시 3황자를 죽이려던 자객이 대체 누구인지 이제는 누구도 알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죽었다. 요 태감이 3 황자를 쓱 보고는 공손하게 말했다.

이승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언가 은근히 괴이한 낌새를 맡은 듯했다.

“나는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건 별 일 아니지 않더냐. 내가 무탈하니 더는 신경 쓰지 말거라.”

“어찌 그럴 수 있겠나이까? 마마께오서는 천자 가문의 후예이십니다. 그런 마마께 감히 불손한 마음을 품었으니······ 화가 단단히 나신 황제 폐하께서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 명을 내리셨나이다.”

이승택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요 태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황께서 또 뭘 하시려 이러시는 거지? 정말로 화가 단단히 나신 거라면 요 3년 동안은 대체 뭘 하셨던 거야?’

* * *

7월 초의 그날, 3황자 이승택은 과거 황궁에서 있었던 변란을 되새김질하면서 자신을 죽이려던 내관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경도부 손 낭자는 그날 밤 하늘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별 두 개를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께서 최근 들어 훨씬 더 잘 지내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작은 공작 어르신의 도움으로 조정에서 그 누구도 감히 경도부를 겨냥하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문하중서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하종위 대인도 몇 달 동안 줄곧 잠잠한 것이, 예전처럼 사납게 굴지 않고 있어서였다.

작은 범 대인이 떠오른 그녀는 과거 경도 변란 때 그가 자신이 내건 조건을 승낙해준 일이 생각이 나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진원은 한창 떠들썩했다. 진평평이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다. 진원에 있는 아름다운 첩들은 진평평의 바람과 달리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임종을 지키겠노라 울고 불며 매달리고 있었다. 이에 늙은 절름발이는 답답한 나머지, 저들이 범한을 봤을 때 꿈쩍도 않았던 건 어쩌면 그때 이미 바람이 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경도성 남쪽 범부에서는 임완아와 사사가 아들과 딸을 안고 밥을 먹이고 있었고, 유모들과 여종들은 옆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등 대가의 아내는 계단 앞에서 올해 범씨 가문 장원에서 거둔 수확에 대해 상세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원의 서재 세 곳 중 한 곳에서는 항주회의 회계 담당 선생들이 올해 강남과 강북 일대 이재민 구제 사업에 쓴 은전 사용 내역을 임완아에게 보고하기 위해 대기하는 중이었다.

임완아가 죽을 유모에게 넘기고 소화와 범량의 얼굴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입구 쪽으로 걸어가 허리를 쭉 피고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확실히 큰 아씨 마님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건 범한이 이런 그녀를 사랑해주다보니 그녀도 자신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사랑하게 되어 나온 행동이었다.

임완아가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동해 바닷가에 가 있는 범한을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생각했다.

‘모든 게 정상 궤도로 들어섰구나. 훗날 경도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담주일까, 아니면 동이성일까?’

임완아는 문득 자신이 아직 동이성에는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