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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31화 (931/1,108)

931화 간단한 정복 (1)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항쟁을 진압할 때 이들 항쟁이 통제 불가능한 민중 봉기로 변하지 않도록 하려면 동이성이 직접 나서야 했다. 범한은 경국의 국가 기관이 지나치게 일찍 동이성에 개입하는 걸 원치 않았다. 만약 일단 피를 보게 된다면, 동이성 백성들의 증오심이 더 깊어질 것이고 사태는 오히려 수습하기 힘들게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게 뻔해서였다.

3로 의병은 이미 진압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 의병은 이산 저산을 누비고 다니는 도적에 불과했다. 범한은 검려 12제자 중 10인을 소제후국의 산림으로 파견해 이들에게 진압과 해명 작업을 책임지도록 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효과를 봤는지에 관해 범한은 아직 답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정한 국면에 동이성 백성들의 타고난 반항심이 더해지자 성 내 제일 큰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상인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추세가 나타나자 범한은 곧장 검려 둘째 제자인 이백화와 직접적으로 연합했다. 그리고 태평전장과 황실 금고라는 이중 압박을 통해 모든 상인들의 이상 행동을 직접적으로 위협해 억눌렀다.

같은 시각, 범한과 사절단은 경도로 17개에 달하는 연명 상주문을 급히 보내 황제 폐하께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아울러 비밀 상주문을 통해 각 제후국을 볼모로 대하는 것과 관련해 이들의 등급을 한 등급 완화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저들 왕공들이 절망해 무서운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영토를 수복한다는 건 단순히 종이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 영토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기까지는 몇 년, 심지어는 몇십 년, 몇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범한은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염려되는 게 있다면 황제 폐하께서 너무 서두르시지는 않을까 하는 거였다. 범한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그건 황제 폐하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동이성 백성들까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그리고 경국의 정예 기마병이 연경에서부터 살벌한 정벌에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양쪽에 한 줄기 철사 줄을 걸어 놓고 그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범한은 대단히 조심하는 중이었다.

* * *

정복을 위해서는 선전과 공세를 동시에 해야 하고, 민심을 얻어야 하며, 동이성 사람들이게 자신의 핑계까지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범한은 잠까지 줄여가면서까지 모든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리고 경국 권신으로서, 검려 주인으로서 거상들과 실권을 잡고 있는 지방 호족들을 동이성 내에서 쉼 없이 접견하면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그건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이에 잘 생긴 범한의 얼굴에도 드디어 눈가에 검은 테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로가 극에 달한 그의 낯빛은 갈수록 창백해져만 갔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수십 만여 명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대의를 위해 순교를 향해 가고 있다는 쾌감에 다시 정신이 바짝 들었다.

위에서 정복을 위해 필요한 걸 언급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강력하고 항거 불능한 무력이다. 강력한 무력이 뒷받침만 해준다면, 동이성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압박을 당해, 그리고 굴욕적으로 경국과의 합병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동이성의 정세가 살짝 안정세로 접어들자 경국의 정예 기마병이 동이성 방향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먹구름이 산을 잡아먹는 것 같은 거침없는 기세로 다가왔다.

이것 역시 황제 폐하가 제시한 하한선이었다. 경국이 동이성에 군을 주둔하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정복한 게 되겠는가?

어느덧 한여름이 되어 작열하는 태양이 미친 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슬픔에 찬 동이성의 아낙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헐떡여댔다. 동이성에서 대종사가 떠나간 후로는 비 내리는 날마저도 사라져 대지에는 오로지 번쩍이는 빛밖에 없었다.

북제 사절단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북제 사람들은 경국의 동이성 합병에 분명 엄청나게 놀라고 분노하고 있을 텐데,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건지. 북제는 마치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그저 차분하게 모든 걸 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날 동이성 밖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서 경국 사절단 관원 및 동이성 성주부 관원을 빼면 나머지는 범한과 각지에서 서둘러 돌아온 검려 제자들이었다.

범한은 아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울퉁불퉁 한 황토 국도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발을 바닥에 대고 무의식적으로 계속 발장난을 하고 있어 위엄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역시 위엄 있어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든 동이성 사람들의 얼굴이 유난히도 끔찍하고 창백하다는 게, 그리고 특히 그들이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서였다.

그래서 범한은 이런 때에 일부러 엄숙한 모습을 내보임으로써 저들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면에서 점점 진동이 올라오고 있었다. 범한 옆에 있는 운지란의 몸도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과거 검려의 수제자였던 운지란은 이제는 동이성 성주였다. 그래서 마음속을 검게 물들인 허무함을 더는 통제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동이성 성주부 관원들의 얼굴도 모두 끔찍해 보였다. 검려 제자들의 얼굴은 살짝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갈수록 커지는 진동 소리에 모두들 자신들의 진실한 감정을 내비치고 만 거였다.

도로 끝에서 마치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이는 지면에 커다란 진동을 불러일으켰고, 황톳길에 있는 모래와 흙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기마병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더니, 곧이어 둘, 셋, 백, 천······ 어느새 기마병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서쪽에서부터 동이성 방향으로 기세등등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러자 살기를 띤 장렬한 기세가 성 외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서쪽에서부터 에워싸 버렸다.

경국 군(軍)이 온 거였다.

* * *

새카맣게 몰려온 기마병이 천천히 동이성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의 등장은 경국의 강대한 군사력,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경국 황제 폐하의 강력한 의지, 정복을 의미하는 거였다.

경국이 동이성으로 보낸 군인 수는 총 만 명이었다. 5로 변군에서 한 달 안에 급히 뽑아 만든 군대였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곧 동이성 사방에서 장기 주둔하게 될 경국 군의 구성원이 과거 서정군에 속해 있던 병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 황자의 지휘 하에 있어서 그런지 이들은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위압적인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경국 군을 바라보고 있다가 살짝 조소를 날렸다. 그리고 의관을 정리한 후 느긋하게 그들을 맞으러 앞으로 나아갔다. 이 순간 범한에게 상주문으로 황제 폐하와 입씨름을 한 일, 사고검이 임종 시 했던 말, 그리고 수없이 많은 말들을 한 후에야 겨우 황제 아버지를 설득한 일이 떠올랐다.

흑기는 인원수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1 황자의 서정군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다음과 같이 확신했다. 우선 이들 주군(駐軍) 중 정말로 서정군에 속했던 장수들은 많지 않다는 거였다. 그리고 1 황자는 잠깐 얼굴만 비춘 후 돌아갈 것이고, 황제 폐하께서 자신의 큰아들을 동이성에 상주하도록 할 리 없다는 거였다.

저 먼 경도에서 동이성을 원격 통제하고 계시는 황제 폐하를 생각하니, 범한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범한은 성지를 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려의 주인이 되었지만 뜻밖에도 황제는 그 일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기라도 하는 듯 급히 황명을 내려 그와 같은 일을 비준해 주었다. 황제의 비준서에는 과거 그 상자 안에 쓰여 있던 것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안지.”

경국 황제가 범한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이었다. 황제의 뜻을 알아차린 범한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멍해졌다. 황제 아버지께서 자신을 믿어주신 데 대해 살짝 감동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황제 아버지께서 일단 태도를 바꾸면 얼마나 냉혹하고 무정해지는지 범한이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감동했으면서도 감히 감동했다는 티를 못 내고 있었다.

먼지가 일었다. 아직 덮쳐 온 건 아니지만, 이들은 용이 되어 곧바로 국도를 휘감으며 갈수록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코를 막았다. 그런데 그는 기마병이 누구의 명령으로 이런 위압적 기세를 뽐내며 오는 건지, 또 이게 동이성 백성들의 감정을 건드릴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했다.

범한이 엄숙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걸 보고 말았다. 검려의 강자들 얼굴에 은근히 분노가 어려 있는 걸 제외하면 나머지 성주부 관원과 인사하러 온 제후국의 왕공들은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이에 그들은 반항할 엄두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만 명의 기마병이 먼지를 일으키며 놀라운 기세로 다가오자, 동이성의 대부분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반항하려던 마음을 접어 버렸다.

동이성의 혈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하자 범한은 참다못해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1 황자의 이번 수는 거칠고 무례한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약점은 정확히 공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동이성의 혈기가 생각보다 약한 건 범한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북제 사람들도 동이성 사람들처럼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거란 헛된 망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순식간에 동이성 성 외곽까지 왔다. 만 명의 기마병은 모두 짙은 색의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갑옷은 태양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진동으로 일었던 먼지가 점점 잦아들자 경국 군이 모습을 드러났다. 빽빽하게 선 기마병들은 동이성 외곽을 에워싸고 있었다.

고요했다. 온통 고요함뿐이었다. 심지어는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어대는 전투마조차도 위협적인 경국 군의 군기를 느꼈는지 감히 날뛰지도, 숨을 거칠게 내뱉지도 못했다.

알만 쌍의 냉혹한 눈빛이 동이성 앞으로 마중 나와 준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동이성 관원 및 권력자, 귀족, 거상들은 벌벌 떨며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경국 군의 엄한 기율, 기염을 토하는 엄숙한 살기, 훌륭한 군 장비, 내면에서부터 우러나는 자신감과 패도에 모두들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성검 대인께서 경국을 끌어내리란 유언을 남기시지 않은 상태에서 경국 군이 동이성을 공격 해왔다면, 우리는 대체 며칠이나 견딜 수 있었을까? 어쩌면······ 몇 촌각은 버텼을까?’

달그락달그락, 말발굽 소리가 성문 앞을 감싸고 있는 고요함을 깨뜨렸다. 경국 기마병의 앞쪽 대대에서 그들의 통솔자와 번잡하고 화려한 의장대가 떨어져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국 천자의 의장이 경국 군대를 따라 동이성 밖에 도착한 거였다.

통솔자인 1황자 마마는 천자의 의장 옆에 있었다. 그는 은색의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검을 찼으며, 옆에는 긴 창이 매달려 있었다. 뒤쪽에서는 붉은 색의 바람막이 옷이 먼지가 섞인 해풍을 맞아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휘날리고 있었다.

1 황자가 가볍게 말고삐를 당기더니 천자의 의장을 호위하며 사람들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동이성 문 앞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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