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모든 건 다 생각하기에 달렸다.
운지란이 마치 범한의 말 속에 숨은 가시를 알아듣지 못한 양 말을 이어 갔다.
“날이 이미 많이 늦었으니, 자, 대인께서는 검을 받으시고 검려로 가시지요.”
그러자 범한은 꿈쩍도 하지 않고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검려를 열고나면 검려 3대에 이르는 모든 제자가 제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운 대가는요?”
범한이 운지란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제가 운 대가께 3만 6천 근에 달하는 지렁이를 캐오라고 한다면 그리 하겠다 답하실 것입니까?”
지렁이를 캐온다는 건 다른 세계에 있던 재밌는 이야기다. 우연히 지렁이를 발견한 수탉이 오로지 그 지렁이만 잡기 위해 계속 땅을 파다가 결국에는 지렁이도 잡지 못하고 온종일 굶기만 해 헛수고 했다는 이야기지만 운지란은 범한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운지란이 재빨리 대답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고검이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운지란이든 범한이 보일 태도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던 터였다.
“나는 이제 동이성의 성주입니다. 관원이 되었다는 건 검려에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운지란이 탄식을 하며 말했지만, 그의 말 안에는 망연자실함 같은 건 없었다.
“이제 나는 검려의 일원이 아니니, 대인은 나를 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거였군요.”
‘사고검은 과연 온전히 마음 놓고 있을 상대가 아니군. 제일 껄끄러운 운지란을 검려에서 내보내다니.’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비웃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나 잊지 마시지요. 동이성 성주란 자리는 이제 우리 경국 황제 폐하께서 임명하는 자리입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댁을 싫어하신다면, 운 대가는 성주로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운지란이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내 보기엔 작은 범 대인이 이 일을 제대로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두 사람이 소리를 최대한 줄인 상태에서 나눈 대화였다. 그리고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검은 관 앞에서 나눈 대화다보니 누군가가 들었을 염려는 없었다. 범한은 방금 전 운지란의 말을 통해 이들이 본인을 동이성과 협력과 결맹을 원하는 사람으로 보는지, 아니면 경국의 순수한 신하로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사고검 사후 불쑥 터져 나온 이 수는 범한의 계획을 제대로 혼한에 빠뜨려 버렸고, 이에 범한은 경도 쪽과 황제 폐하의 반응을 걱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수에 나쁜 의도를 규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는 해도 범한이 받아들이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적어도 앞서 한없이 걱정했던 국면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나아진 때문이다.
범한은 사고검 사후 유언에 따라 느닷없이 그림자가 검려 주인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한 터였다.
그런데 지금 나온 방법을 보니, 사고검은 범한에게 힘을 실어 주어 그와 황제 폐하가 직접 반목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러니 현 상황을 보면, 범한과 황제 사이에 틈이 생길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데 사고검은 비교적 인자하게도 범한에게 준비할 시간은 준 거였다.
그 비쩍 말라 약해진 대종사가 죽기 직전에 이런 식으로 몰래 포석을 해두었다니. 범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고하가 죽기 전에 서량로와 경도에 몰래 수를 써둔 것까지 생각나자 범한은 그제야 알 것만 같았다. 종사의 경지라는 건 무공의 경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과 세상일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현묘한 경지에 있는 거였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아래쪽에 있는 예부 시랑을 쓱 보며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지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운지란이 아주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웃으시지요. 이왕 연기하는 거 좀 멋지게 하자고요. 우리도 이제부터는 협력자이니, 우리 위대한 경국 조정과 당신네 동이성처럼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지요.”
범한은 운지란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미소를 지은 얼굴로 운지란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제2대 검려 주인과 몇 대인지는 모르겠는 동이성 성주가 서로의 손을 꽉 움켜쥔 거였다. 그것도 사고검의 검은색 관 앞에서, 무수히 많은 관중 앞에서 말이다.
* * *
검려 개방 의식은 그다지 번잡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신성한 느낌은 있었다. 범한이 굳게 닫혀 있던 오두막 문을 가볍게 밀어 열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범한은 자신을 대하는 검려 제자들의 태도가 은근히 바뀌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공손하고 협력하려는 태도 속에 진정성에 엿보이기 시작한 거였다. 그건 왕 십삼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련의 일이 끝난 후 범한은 경국 사절단으로 돌아와 예부 시랑과 함께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은 단지 검려 개방 의식 겸 두 번째 담판이었다. 비록 담판이 무척이나 순조롭게 끝나기는 했어도, 그래도 마지막에 합병이라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경국 쪽에서 파견한 최고위급 관원은 범한을 빼면 겨우 시랑이었던 것이다.
만약 동이성이 경국에 귀속되었음을 천하에 제대로 선포 하려 했다면, 어쩌면 예부 상서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가 직접 행차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는 기쁜 마음으로 지도를 받아들며 동이성라는 이국의 천만 백성들이 올리는 절을 받았을 것이다.
예부 시랑은 작은 범 대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작은 공작 어르신, 너무 근심하지 마시지요. 동이성 쪽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는 우리 쪽에서도 빤히 알고 있습니다. 하여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입니다.”
“말로는 그리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번거롭겠지만, 대인께서 서둘러 상주문을 써서 속히 경도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즉각적으로 아셔야 하는 일이니까요.”
범한은 걱정을 멈추지 못했다.
“오늘 느닷없이 몰려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지만, 이치대로라면 황명에 따라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동이성 사람들은 아직도 탐탁지 않아 합니다.”
시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황제 폐하께서는 영명하시니, 분명 그들의 도발을 단박에 알아차리실 것입니다.”
범한이 웃었다. 시랑 대인이 자신의 걱정을 알아차렸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어서였다. 물론 범한이 그것까지 솔직히 털어 놓을 리는 없었다. 이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제가 경도에 한 차례 다녀와야겠습니다.”
“현 상황만 보면 협상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듯하나, 동이성 쪽의 반발 정서가 너무 강합니다.”
예부 시랑이 눈을 또르르 한 차례 굴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작은 공작 어르신께서 주재하신다면 상황이 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 폐하께서 엄히 명을 내리셨지요. 반드시 온 힘을 다해 이번 일을 성사시키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공작 어르신이 이곳에 계속 계시고, 구체적 사항은 하관이 경도로 돌아가 조정에 보고를 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범한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었다.
“그럼 대인께서 고생을 해주십시오.”
* * *
범한의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가 올라가 짓누르고 있었다. 검려 주인이라는 신분이 생겼다고 해서 황제 아버지의 신임이 당장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범한이 요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과도하게 처리해 온 건 모두 황제 폐하로부터 오는 신임을 파먹으며 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것을 모두 다 파먹어, 하나도 남지 않는 때가 올 수도 있는 거였다.
사고검이 내놓은 수는 훗날 범한이 배신해 동이성을 팔아버리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사고검은 일단 동이성을 범한에게 넘겨버리고 본 거였다. 범한에게는 주고, 경국 황제에게는 주지 않은 거였으니, 사고검이 이 도박에서 진다면 결말은 딱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범한과 황제가 제아무리 소란을 떤다 해도 이미 죽은 사고검에게 뭘 더 할 수 있을까?
범한이 동이성 밖에 위치한 해변을 다시 찾았다. 범한이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서서히 넘실대는 흰색의 물보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물보라 안에서 사고검의 냉랭하고 감정 없는 두 눈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저에게 그 길을 가도록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제가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 하셨나 보죠?”
범한이 물보라 안에 있는 사고검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사고검의 대답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자네와 경국 사람까지 사랑해야 하는 건가?”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고검이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힘들든 말든, 경국이 혼란이 일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범한이 파도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제가 고생하는 건 그렇다 치자고요. 하나 죽을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경국에서는 혼란이 일어서는 안 됩니다. 제는 동이성보다 경국을 더 사랑하거든요.”
“우리의 동이성이야.”
“저는 경국 사람입니다.”
“자네는 경국 사람이 아닌 이 세상 사람이야.”
범한이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나는 사실 이 세상 사람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왜 이 세상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원. 설마…… 모친 대인께서 이 육신 안에 남겨 둔 이상주의의 빛이 드디어 발산하기 시작해서 그런 건가?’
사람이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천명을 기대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만약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전쟁을 막지 못하고, 또 만약 역사의 변화를 막지 못하겠다면, 당장 이 세계를 떠나 자신의 소소한 일상이나 살아야 한다.
그런데 모든 건 다 생각하기에 달린 거다.
* * *
동이성 일은 여전히 복잡하고 민감했다. 갑자기 경국 백성이 되는 일이니 모두가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확실히 더 득이 되는 일이고, 창부(娼婦)란 본래 무정한 이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인과 창부들도 곧바로 경국 쪽으로 돌아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건 장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고, 장사를 해도 능숙하게 못 하는 것이며, 손님에게 바가지나 씌우기 위한 행위였다. 그렇다면 상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사를 통제하는 권력을 가급적 익숙한 사람 손에 맡기는 게 제일 좋은 거였다.
또한 이건 창부가 단순히 손님을 받는 것과도 다른 문제였다. 연지 발린 입술 하나로 이놈 저놈, 이 나라 저 나라 사람을 다 상대하라고? 한데 이 아가씨들도 사실 속으로는 일부종사를 꿈꾸고 있었다.
특히나 동이성이 통제하는 제후국들은 일찌감치 뒤숭숭해져 있었다. 그래도 연경 근처의 송나라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이 소국의 귀족과 관원들은 일찌감치 연경 대군의 위세에 길들여져 있던 터라 반항 할 의지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은 소국들은 달랐다. 이제 곧 자신들이 쥐고 있는 명의상의 권력과 호화로운 삶을 잃고 경국 경도에서 별 볼 일 없는 인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들은 벌써 암암리에 어떤 일들을 벌이기 시작한 터였다.
이들 소제후국들은 강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비교적 음침한 수단들을 선택했다. 민간에서 암류가 들끓도록 몰래 수를 씀으로써 동이성 백성들 마음을 자극했다. 그러자 고작 반 개월 사이에 사방에서 더 거세고 빈번하게 항쟁이 일었다.
동이성을 평화롭게 접수하는 건 원래 하룻밤 만에 완수할 수 있는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20여 년 만에 천하에 발생한 일 중 제일 큰일이었다. 그러니 저항이 일 거라는 건 범한도 예상한 일이었다.
이에 감찰원 8처는 사전에 많은 수의 문관을 확보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그들을 동이성으로 들여보내 검려 및 성주부와 협력해 쉼 없이 선전 공격을 펼쳤다. 여기에 4처가 각국에 포진시켜 놓은 밀정과 매수한 간자들까지 합세했고, 동이성 쪽도 대세를 따라주었다. 그러자 평화와 반전, 공영과 같은 선전 문구들이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