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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29화 (929/1,108)

929화 검려를 열다 (2)

범한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건 왕 십삼랑으로 범한보다 반 발짝 뒤에 서 있었다.

범한은 차분한 낯빛으로 천하 각지에서 서둘러 온 거상들을 맞았다. 동시에 반주인의 신분으로 경국 및 북제 사절단을 맞았다. 경국 사절단 관원들은 얼굴에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북제 관원의 표정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검려 문 앞 공터에 대붕(大棚: 거대한 막사)이 세워졌다. 위에는 수없이 많은 흰색 종이꽃과 막(幕)이 달려 얼핏 보면 전혀 경사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검려 개방 의식과 명의상 귀순 선포를 하는 자리임을 고려한다면 전혀 맞지 않는 장식이었다.

범한은 그 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경국 예부 관원은 속으로는 좀 불쾌했지만 그래도 그걸 감히 얼굴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모두 알다시피, 이번 검려 의식은 사실 사고검의 장례식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예부 관원은 이런 중요한 때에 검려의 강자들의 화를 돋우고 싶지 않은 거였다.

태양이 천천히 하늘 꼭대기로 옮겨가고 공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다행히 동이성은 해변에 위치해 있어 해풍이 밤낮으로 불어와 그나마 더위는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대붕이 대부분의 작열하는 태양을 막아주고 있어 예식에 참석한 손님들은 땀을 닦아내기만 할뿐 과하게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갑자기 검려 밖에서 폭죽 소리가 울렸다. 얼마나 많은 폭죽이 터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종잇조각들이 높이 치솟았고, 연기도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신호 같았다. 이에 방대한 동이성 안에 있는 모든 상행 및 백성들의 민가 문에 달려 있는 폭죽에 동시에 불이 붙었다. 항상 매달려 있던 홍등은 모두 백등(白燈)으로 바뀌어 있었다. 밤마다 노래가 끊이지 않던 기생집에서도 홍등을 백등으로 바꾸어 달고 기루(妓樓) 앞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아가씨들은 소복으로 바꾸어 입고 불안한 기색이 담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검려 쪽을 바라보았다.

상인, 백성들은 집 앞에 초혼(招魂: 죽은 이의 혼을 불러오는 것)을 위한 백색 깃발을 걸고 그 아래에 서서 터져 사라져가는 폭죽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품 안에 있는 젖먹이는 동이성 동서남북에서 울려 퍼지는 폭죽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 응애응애 하고 큰 소리로 울어댔다.

이에 온 동이성에 폭죽 터지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눈을 찌르는 유황 냄새가 연기와 함께 성 전체를 감쌌다.

터져 파편이 되어가는 폭죽은 사람의 일생 같고, 연기는 점점 떠나가는 영혼 같았다.

차분하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범한은 문득 여러 해 전 북제 상경성 밖에서 들은 폭죽 소리가 떠올랐다. 순간 암담해진 범한은 장 대가든, 사고검이든, 사실 평범한 백성에게는 매 한가지로 숭고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검려 밖에 세워진 대붕 아래에서 모두가 운지란의 음성에 따라 검은색의 거대한 관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범한도 무릎을 꿇고 운지란이 대표로 낭독하는 사고검의 유언을 들었다.

의외였다. 다른 마음을 품고 행동한 운지란을 사고검이 임종 직전에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에게 성주 자리를 주었다. 운지란은 줄곧 검려의 속무(俗務)를 보던 터라 세상일에 정통했다. 그러니 운지란에게 성주를 맡긴 건, 그에게는 분이 가라앉지 않을 일이겠지만, 분명 동이성을 이어받기 위해 온 경국 사람을 비교적 완벽하게 제약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 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오로지 사고검이 검려를 왕 십삼랑에게 물려준다면, 자신은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저 무시무시한 12개의 검을 제대로 통제할 생각뿐이었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운지란이 마지막 유언을 낭독했다. 그런데 범한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았다.

* * *

“범한은 어머니가 동이성 사람이고, 내게서 친히 검술까지 물려받았다. 하여 실로 큰 제목이니, 그가 맡게 될 것은…… 검려이니라.”

범한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자 그의 동공이 살짝 수축되었다. 그가 곧장 대붕 앞쪽으로 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섰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유언을 읽어 내려가는 운지란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 순간 검려 주변에 있는 이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경국의 사절단도 사고검이란 대종사의 영구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채 예를 다했다. 이는 동이성으로 오기 전, 경국 황제 폐하가 직접 비준한 세부 예절 사항이어서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은 사항이었다.

검려 안팎으로는 모두 천여 명의 사람이 와 있었다. 그중 범한과 운지란만 검은색 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니 꼿꼿이 서 있는 범한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이번 생에 하늘과 땅, 부모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조정에 나가 황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늘 무릎을 꿇은 건 강자와 망자를 향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지란이 말한 유서 내용에 깜짝 놀란 범한은 사고검을 향해 일었던 담담한 존경심이 순간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모두들 운지란이 말한 사고검의 유서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 이는 검려 13제자가 침대 앞에서 동시에 들은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니 운지란이 거짓을 말할 리도, 감히 거짓을 날조할 리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의 눈빛이 작은 범 대인에게로 향했다. 그것도 이미 벌떡 일어나 있는 작은 범 대인에게로 말이다.

어머니가 동이성 사람이었어?

검술을 물려받았다고?

실로 큰 제목이었어?

검려를 맡게 된다고?

놀라고 흥미로움을 발하는 무수히 많은 눈빛이 범한에게 꽂혔다. 하지만 범한의 옷깃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운지란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범한의 모습은 방금 전 말이 대체 자신만 들은 환청인지, 아닌 건지 판별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간단한 말 안에는 무려 네 가지 정보나 담겨 있었다. 즉, 사고검이 세상에 알리려는 정보 네 개가 들어 있는 거였다.

범한의 어머니는 섭경미이다. 섭경미는 경국이 세계에서 빠른 시간 안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왔었다. 그런데 그녀가 동이성 사람이었다니.

사실 이 점은 무슨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검술을 직접 물려받은 건, 사고검의 유언에 등장한 말이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믿을 것이었다. 이 대종사에게는 본디 작은 범 대인에게 사고검 진의(眞義)를 전수해 줄 자격이 있으니까 말이다. 또 작은 범 대인이 실로 큰 제목이란 평가는 누가 봐도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정보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친근한 의도가, 범한을 확실히 동이성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모계를 운운한 건 혈연적 친근감을, 검술을 사사받은 건 스승과 제자지간의 의를, 큰 제목이라고 말한 건 동이성이 범한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한에게 검려 개방 의식을 주제하도록 한 건 그야말로 정점을 찍은 거였다.

검려가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 제대로 검려를 개방하고 제자를 거두는 의식을 진행 한 건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의식을 주제한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사고검 본인이었다.

중상을 입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3년을 제외하면, 사고검은 이 검려 개방 의식을 유난히 중시했다. 그리고 이는 천하에서 일종의 묵계로 통했다

즉, 무릇 검려 개방 의식을 하는 자가 검려의 주인인 거였다.

사고검이 유언에서 범한을 지목해 검려 개방 의식을 주제하도록 한 건, 자연스레 이 무수한 고수들이 있는, 또한 3대에 걸친 제자를 가진 검려를 그에게 건네준 거였다.

* * *

이건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요 이틀 동안 범한은 줄곧 어떻게 해야 운지란을 제외한 12개의 검을 제대로 쓸 수 있는지를 생각했었다. 십삼랑의 경우는 이미 성정을 충분히 파악한 터라 더는 생각할 필요 없었지만, 나머지 11명의 고수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 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사고검이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미리 모두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다만 그 문제 해결책이란 게 순간 범한을 멍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 개의 정보와 하나의 명령으로 검려가 자기 손에 들어온 거였다. 오늘부터 자신이 한 말이 곧 과거 사고검이 한 말처럼 되는 것이니, 문파 하나가 자기 손에 들어온 거였다. 이에 대단히 묘하게 멋진 일이 벌어진 것 같았지만, 범한은 뒤에 감춰져 있는 사고검의 매서움을 똑똑히 맛보았다.

이건 침(針)이었다. 범한과 황제 아버지 사이에 찔러 놓은 침 말이다. 경국 신하로 검려의 주인이 되었으니, 황제가 어찌 생각할는지. 황제 폐하가 제아무리 범한을 신뢰한다 하더라도 대놓고 범한의 힘이 늘었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특히나 동이성이 범한에게 이리도 친근하게 충성심까지 보였는데?!

아무리 황제 폐하가 바다처럼 마음이 넓고 해와 달처럼 자신감에 차 있어서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감정은? 사람은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동물인데. 황제 폐하는 분명 자신의 사생아가 너무 밝게 빛나는 건, 심지어는 자신의 밝기를 뛰어넘는 건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늘에는 영원히 하나의 태양만 떠 있을 수 있는 거니까.

범한은 운지란의 입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사고검이 죽기 직전에 자신을 한 차례 뒤흔들어 놓은 후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운지란은 범한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사고검의 유언을 모두 읽어 내려갔다. 그런 후 범한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예를 차려 절한 뒤 말했다.

“자.”

자, 뭐? 자 앉으시지요? ‘자.’라고 말했으면 뭐든 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범한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그리고 눈꼬리로는 무의식적으로 곁눈질을 해 아래쪽을 쓱 살폈다. 어느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아직 경악한 표정으로 검은색 관 앞에서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주시하는 중이었다.

범한이 사절단 관원이 있는 쪽을, 특히나 예부 시랑 쪽을 쓱 살폈다. 그러자 예부 시랑이 범한의 눈빛을 느꼈는지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참동안 생각을 해본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국 사절단 내부에 있는 두 대인의 생각 교류는 딱 여기까지였다. 예부 사랑은 작은 범 대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동이성이 귀순을 하려는 걸 곧 보게 된 마당에 이 일로 전체 국면이 영향을 받는 건 원치 않았다. 경국 사람은 영토 확장의 야망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 예부 시랑조차도 황제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이 검려 주인의 위치를 마음대로 받아드렸다는 이유로 화를 내실 것 같지는 않다고 여긴 것이었다.

범한이 한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겨 이번 일의 득실을 따져보았다. 특히나 황제 아버지께서 이번 일을 알게 된 후 어떤 반응을 보이실 지에 대해 예측해보았다.

한편 운지란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살짝 비웃는 모습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그가 대답해주기만을 기다렸다.

범한은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비웃는 건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처럼 자신의 표현 방식은 너무 우유부단했고, 시원스러운 맛이 없었다. 다만…… 큰일을 하려는 자는 필시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걸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더욱이 맞서려는 대상이 능력이 심후해 능력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황제 아버지라면 말이다.

범한이 마지막으로 깊이 심호흡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댁의 스승님께서 돌아가시면서도 저를 놓아주고 싶지 않으셨나 보군요.”

“작은 범 대인을 도와 불세출의 공을 세우기로 결심했으니 검려 제자들이 자연스레 대인 휘하로 들어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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