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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28화 (928/1,108)

928화 검려를 열다 (1)

범한은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었다. 얼굴 표정이 눈보라 치는 신묘 밖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변해 버려서였다. 범한은 앞에 있는 왕 십삼랑을, 그리고 이 젊은 친구의 차분하지만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썰렁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범한은 왕 십삼랑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실제로 있는 사람이니 범한은 썰렁한 한기를 느낀 거였다.

나중에 범한과 사고검이 계획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천하 사람들이 보기에 범한은 동이성의 실력을 수탈하기만 했을 뿐 동이성 백성과 상인들의 이익은 전혀 고려해주지 않은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렇다면 왕 십삼랑은 어쩌면 모든 대가를 불사하고서라도 범한을 공격할 것이다.

사고검의 유언과 태평 전장이라니. 검려 제자들은 이번 도박을 위해 너무 많은 이익과 실력을 내건 상태였다. 그러니 범한이 배신이라도 한다면, 그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분노가 일 터. 그렇다면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검려 13제자가 미친 듯이 복수에 나서면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지는 범한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곁에서 가까이 지내 준, 그것도 관계가 지극히 좋은 젊은이는 더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왕 십삼랑과 목숨을 건 대결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검려가 미친 듯이 복수를 해와도 감찰원의 보호를 받고 있는 범한을 직접적으로 다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9등급 강자들의 습격으로 범한이 아끼는 가족, 친구, 부하들은 다칠 게 뻔했다.

경국 황제가 이러한 손실까지 감수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가족들 대부분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때가 많아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그렇게까지는 못 했다. 그래서 왕 십삼랑이 방금 보여준 태도가 검려 제자들의 어떤 결심을 대표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던 터라 저도 모르게 대놓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점점 강해졌다가 이내 점점 흩어졌다. 범한이 왕 십삼랑을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사형들에게 똑똑히 설명을 좀 해줘야겠네. 이번 일은 자네 스승님께서 내게 해달라고 요청하신 걸세. 내가 그분께 해달라고 매달린 게 아니란 말이지. 말이 협력이지 그분의 일방적인 생각이므로······. 나는 그 어떤 형식의 위협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네.”

왕 십삼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왕 십삼랑을 주시하며 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여 그것 때문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단 말이지. 사고검께서 내게 12개의 검을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의 충성심을 믿고, 또한 밤마다 등에 칼 맞을 걸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대인을 찌르려 한다면, 내가 막아줄 것입니다.”

왕 십삼랑이 암담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이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범한이 살짝 비웃으며 냉소를 지어 보였다.

“내 뒤에는 그림자가 있는데, 굳이 자네까지 와서 무엇 하겠는가? 그냥 이런 기분이 싫을 뿐이야. 내가 누구인가? 나는 위협 받으면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네. 그러니 검려 쪽은 반드시 태도를 조금 더 단정히 해야 할 것이야. 운지란 대가나 이백화 선생이 나를 전혀 믿지 않는다면, 우리끼리 계속 대화를 할 이유가 없겠지. 그걸로 끝이란 걸세. 그런 후 몇 달 후에 대군을 몰고 와서 다시 말하면 되는 거야.”

왕 십삼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범한을 쓱 바라보았다.

“지금 대인이 저를 위협하고 있군요.”

“오는 게 있는데 가는 게 없다면 예의가 아니겠지.”

범한이 진지하게 왕 십삼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드러낸 바람 때문에 내가 머리가 아프군. 누구든 자네를 통해 나를 통제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에게는 그런 헛된 바람은 없습니다. 다만······. 사실대로 말하지요. 우리는 스승님의 명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사형들은 대인과 깊이 접촉해본 적 없지요. 그분들은 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경국의 이익은 상관 않고 동이성의 사활을 생각해 주리란 걸 감히 믿지 못하는 겁니다.”

“믿고 말고는 그분들의 일이네. 나는 그분들이 받아들이기만 바랄 뿐일세.”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왕 십삼랑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우리는 친구라네. 나는 자네가 내 곁에 서서 시시각각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친구는 되지 않았으면 해.”

“친구는 반드시 서로 믿고 서로 지지해줘야 하지. 이유 불문하고 말이네.”

범한이 왕 십삼랑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사고검 대인께서 내게 보여 준 태도이자, 내가 사고검 대인께 보여준 태도일세. 왜냐하면 자네가 있었기에 나와 사고검 대인 사이에 신뢰가 구축될 수 있었거든. 하나 오늘 이후부터는 자네도 자신의 태도란 걸 가져보게나······.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위해 살아해. 이 세상에서 나라를 위해 복수심을 품고 백성을 위해 대의를 행하는 사람은 충분히 많아. 그리고 자네 성격은 그런 일을 하는 데 맞지 않거든.”

“대인은 그런 일을 하는 데 적합하고요?”

범한의 말을 알아들은 왕 십삼랑이 그윽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네. 나 역시 하는 수없이 양산박으로 들어간 거거든.”

범한은 입가에서 쓴 내가 맴돌았다. 마음도 비통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입꼬리를 올리고 두 눈으로는 방 안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탄식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검은 동굴을 보았지. 한데 그게 도적 소굴인가? 도둑인 걸 인정해 뭐하겠는가? 그런데 정말 도적인걸? 내가 도적인데? 나는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으이. 더욱이 전부 깔끔하게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없으이.”

범한을 조용히 보고 있던 왕 십삼랑이 느닷없이 물었다.

“이 세계에서 누가 대인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핍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답을 해주었다.

“모르겠네. 어쩌면 근본 원인은 내가 그리 하고 싶은 거겠지.”

* * *

황제 폐하에 관한 일과 관련해 범한은 이미 충분히 깊이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에게 말한 것처럼 오죽 아저씨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황제 폐하와 반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황제 폐하와 반목할 이유도 없었다.

수십 년 전에 그런 참극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이 세상을 유랑하는 영혼이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위해 복수를 하려 해도 자신의 친 아버지와 마주하면 항상 주저한 거였다.

더군다나 황제 폐하는 여전히 강대했다. 전혀 이길 가망성이 없을 정도로 강했다.

범한은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같아지도록 만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완전히 다른 세계와 시공으로 넘어 온 사람이라면 대체적으로 맨 먼저 갖는 생각일 것이다.

‘섭도’와 ‘무안국’이 그러했고, ‘섭경미’가 그러했으며 대략 ‘석월’만 그리하지 않았지만, 범한은 그걸 알지는 못했다.

(역자주: 섭도, 무안국, 석월은 모두 각각 《명(明)》,《시광지심(時光之心)》,《新宋》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다.)

사실 이건 시공을 넘어온 사람이 지닌 숙명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이 우수했기에 맞게 되는 숙명이다. 부잣집 도령만 한 평생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누린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바라는 걸 매번 가라앉힐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탐구욕과 통제력이란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충분한 권세와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쥔 힘으로 무언가를 바꾸려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옷을 입고 평생 한밤중을 거닐려면, 수도승과 같은 정력(定力: 잡념을 없애고 하나에만 몰두하는 집중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도승도 늙어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는 결국 셰익스피어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래서 범한과 같은 사람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게 되면 멋진 옷을 입고 태양 아래에 서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려 하는 것이다.

그게 이 세계 입장에서 보면, 꼭 좋은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당사자는 그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란 건, 원래 강자가 주무르는 반죽이니까. 그런데 강자들은 대개 아름다운 어린 아가씨를 빚는 걸 제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는 그 반죽으로 커다란 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그것을 툭툭 잘라댄다.

물론 누가 맞고 틀린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는 게 좋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역사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강자들은 일찌감치 백골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철저히, 속 시원하게, 억울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거다.

* * *

범한은 두 번째 생을 마음껏 살았다. 그리고 경력 10년 말 드디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봉오리 끝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지금 경국의 젊은 권신이 되어 손에 권력을 쥐고 있었다. 감찰원이란 큰 권력 말이다.

돈도 있었고, 천하 대부분의 돈을 그가 암암리에 주무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명성은,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그가 한 행동들이었다. 흰 연기가 동이성 사방에서 활활 피어올랐다. 짙은 흰색의 혼을 부르는 깃발이 봄날의 저녁 바람을 맞아 흔들렸다. 사고검의 장례가 곧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경국과 동이성 사이의 담판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천하대세에 드디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 오늘부터 지도의 모양이 낯설게 변한 거였다.

동이성이 드디어 강대한 경국에 명의상으로 귀순한 거였다. 온 대륙에서 서방의 녹색지대, 그리고 북쪽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국의 철제 편자 아래에 복종한 거였다.

더군다나 경국은 병졸 하나도 파병하지 않고 그 목표를 이룬 거였다. 이 모든 걸 이룬 건 당연히 범한이었다.

그의 명망은 이 순간 역사의 정점에 이른 거였다. 그러니 그가 이룬 이번 일은 역사서에 기입되어야 할 것이었다.

범한은 차분하게 검려 문 앞에 서 있었다. 왕 십삼랑이 그의 뒤에 서 있었고, 나머지 11명의 검려 제자들은 저 멀리에서 조용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경국 사절단은 범한 옆쪽에 서 있었다. 감찰원의 밀정인 검수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각 방향에서 주변 모든 상황을 경계하며 주시했다.

경력 10년의 오늘은 검려의 개방 의식이 있는 날이다. 원래 이 의식은 일찌감치 거행을 마친 후였다. 하지만 사고검이 죽음을 앞두고 중병을 앓는 것도 있고, 그리고 또 오늘 검려에서 천하에 큰일을 선포하려 한 터라, 여기에 천하의 중요 인물들이 적지 않게 초대된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검려에는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이 많이 와 있었다. 한데 최근 동이성 주변의 제후 소국 및 성내의 시정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 요소가 피어나는 중이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의병이 일어난 터였다. 그래서 침략자의 대표 격인 범한을 보호하는 일은 자연스레 제일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동이성 쪽은 사실 범한의 안전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범한을 죽이려 시도 한다면 분명 살아서 나갈 리 만무한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자연스레 현 세상의 유일한 대종사인 경국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한 말이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경국 황제가 갑자기 정신이 나가 이제 막 큰 공을 세운 사생아를 죽이러 오는 일은 일어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범한과 함께 서 있지 못했다. 오늘따라 날이 너무 좋고 햇빛이 쨍해 살짝 더위까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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