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화 천하의 종자돈 그리고 필살기!
“이백화입니다.”
그는 검려 둘째 제자이자 태평 전장의 주인이기에 범한의 태도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름을 대답해 준 후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태평 전장을 책임진 지 16년 되었습니다.”
범한이 한동안 침묵했다. 어떤 태도로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였다. 사고검의 생각에 따른다면, 범한은 이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태평 전장을 소유한 큰 인물을 어찌 자신이 나서서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범한은 이내 또 다른 일들이 생각나 눈동자가 점점 축소되기 시작했다.
‘내가 쥔 실력과 초상 전장에다가 남몰래 무수히 많은 상단과 백성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태평 전장까지 더해지면? 이 정도의 실력이면 분명 무언가에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곧 아래로부터의 대항이었다.
범한의 표정을 보고 있던 이백화가 범한이 지금 무슨 생각 중인지 알아차리고는 느릿느릿 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평 전장은 천하에 돈을 빌려줍니다. 하여 시국에 문제가 생기면, 외부에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힘들 수도 있지요. 하나…….”
‘하나’라는 말이 나와 범한이 이백화를 바라보며 다음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은표만 천하에 날아다닐 뿐, 은전은 시종일관 동이성 안에 있지요.”
이백화가 범한에게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만약 작은 범 대인께서 그 실력들을 하나로 뭉치실 수 있다면, 많은 일들에 영향을 미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천하 대란을 일으키실 생각이시라면, 그 역시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힘 있는 사람이다 보니 말도 배짱이 두둑했다. 범한은 이제야 검려 13제자 중 가장 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제일 위신이 높은 운지란도, 제일 높은 경지를 지녀 전도유망한 십삼랑도 아닌, 바로 가장 많은 은전을 지닌 이백화였다.
“정말 큰 선물이군요.”
범한은 깜짝 놀란 상태에서 벗어나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범한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이 점만은 명확히 말해드려야 할 것 같군요. 만약 동이성 쪽에서 너무 많은 요구를 해온다면 저는 그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대인의 자산입니다.”
이백화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반 무공 고수와 달리, 대륙 상업계의 숨은 과두(寡頭)는 범한의 신중한 면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다음과 같이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스승님의 유언에 대인께서 무언가를 하라는 요구 사항은 없었습니다. 분명 두 분이 이미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셨으니, 저는 그걸 집행할 뿐이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하더니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는 이미 하늘로부터 받은 황금대야를 한 차례 깨버렸습니다. 설마 오늘 두 번째로 깨버려야 하는 걸까요?”
“대인께 필요한 은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게는 은전이 많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이백화가 침묵에 돌입했다. 그러다 한참 후 느닷없이 입을 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대인께 조건 하나를 내걸고 싶기는 합니다.”
범한이 차분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한참 후 대꾸했다.
“선생께서는 조건을 내걸 만한 자격과 실력을 지니셨지요.”
이백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평 전장은 원래 동이성 성주부의 자산이었으나, 훗날 검려의 사적인 자산이 되었지요. 저는 이곳에 꼬박 16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여 전장도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 거지요. 전장의 은전은 단순히 전장 소유가 아닌 동이성 모든 상인들의 은전임을, 더 나아가 북제와 경국의 무수히 많은 사람이 맡긴 은전임을 기억해두셨으면 합니다. 하여 만약 사용하시려거든, 반드시 한도를 정해 상인들의 은전이 모두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거야 당연한 겁니다.”
“제 말뜻은 태평 전장은 실제로는 동이성의 전장이니, 그들의 종자돈을 대는 곳이자 그들의 근본이란 것이지요.”
이백화가 차분하기 범한을 바라보며 매 글자에 힘을 주며 계속 말했다.
“대인께는 동이성의 피가 절반밖에 없기에 일깨워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순한 건, 명의상 귀순일 뿐입니다. 연경 사람처럼, 강남 사람처럼, 위주 사람처럼 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동이성 사람으로 남고 싶을 뿐입니다.”
“그냥 대놓고 말씀하시지요.”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군을 주둔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백화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백화의 대답에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총명하신 분이니 분명 알고 계실 겁니다. 이는 검성 대인께서 이미 인정하신 일입니다. 하여 저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제 처지도 좀 이해해주시지요. 경국 천만 백성을 설득하기 위해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
그러자 이백화도 웃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건 담판의 수단일 뿐이었다. 이에 그가 이번에는 진짜로 간곡하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군을 주둔해야 한다면, 흑기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백화가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 외에 다른 군대는 안 됩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흑기는 그 수가 겨우 천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을 안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1 황자 마마의 옛 수하로 하지요. 제일 좋은 건 1 황자께서 친히 오시는 거고요.”
이백화도 더는 양보하지 않았다.
“만약 각 제후국이 이미 이상 행동을 시작했다면, 민심도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례를 치른 후 경국의 군이 억지로 진입해 들어온다면, 적지 않은 반발이 일 것입니다. 하면 국면이 혼란스러워질 터인데, 그 문제를 어찌 해결하실 겁니까?”
“설마 흑기나 옛 서정군이 동이성으로 들어온다면 그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까?”
범한의 질문에 이백화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흑기의 주인은 대인이십니다. 서정군 주인은 1 황자이시고요…… 한데 동이성 백성들은 대인이 섭가 아가씨의 후손이고, 1 황자 마마는 영(寧) 고모님의 아들이란 걸 알고 있답니다.”
범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은 그게 과연 동이성 국면을 안정시키는 데 어떤 관건적인 작용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요.”
이백화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우리 동이성은 이십여 년 동안 두 명의 걸출한 여인을 배출했습니다. 하나는 자당이시지요. 동이성 상인들은 오늘날까지도 과거의 섭가를 동이성의 긍지로 생각합니다. 또 한 분은 영 고모님이십니다. 동이성 출신의 불쌍한 포로 여인이 이국의 황비가 되었으니까요……. 이리 말하면 대인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들리겠군요. 하나 동이성 사람들은 그걸 굴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단지 흔히 오지 않는 영광이라 여긴답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전생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중국계 여인들이 북유럽 왕비가 되고, 거부의 처가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도 반발심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속으로 좋아했던 것만 같았다. 서양의 것이라면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심리와는 무관하게 대개는 국외에 본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며, 희한하게 기뻐했었다.
“그건 동이성 사람들 마음속에서 섭가 아가씨와 영 고모님의 지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백화가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여 많은 상인들에게 대인과 1황자 마마는 절반은 동이성 사람입니다. 두 분 중 한 분의 군이 와서 주둔한다면 민간의 정서도 조금은 쉬이 잠잠해질 것입니다.”
한동안 묵묵히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말씀은 일리가 있군요. 더군다나 그 정도 이유라면 제가 황제 폐하를 설득해볼 만도 하고요. 황제 폐하께서는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고 피가 강을 이루는 동이성이 아닌, 분명 온전한 동이성을 원하실 것입니다.”
“애써주시지요.”
말을 마친 임백화가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한 후 물러나려 했다.
동이성이 경국 신하 위치에 있게 되는 구체적인 사항들은, 예를 들어 매년 조공을 바칠지, 아니면 아예 경도의 세수 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지에 관해서는 아직 각급 관원들이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보다 훨씬 중요한 건 군사 주둔에 관한 사항이었다. 그러니 이런 와중에 오늘 이백화가 화끈하게 상자들도 내놓고 태평 전장까지 들고 나온 건 범한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든 행동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범한이 느닷없이 그를 불러 세웠다. 범한은 아직 놀란 마음을 완전히 진정시키지 못한 터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사고검은 왜 죽기 전에 자신을 가지고 이리 큰 도박을 벌인 것인지. 검려 제자들도 이유나 구체적 사항들은 물으려 하지 않고 이리 장렬하게, 심지어는 경솔해 보일 정도로 동이성의 밑천을 드러내 보이는 건지 말이다.
검려 제자들은 사고검처럼 과거를 아는 것도, 범한과 황제 간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있다는 걸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은 대체 뭘 믿고 범한을 믿는 건지.
“저는 단지 스승님의 지혜를 믿을 뿐입니다.”
이백화가 범한을 바라보며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스승님께서 소문처럼 백치가 아니란 걸 대인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여러분이 이리 많은 물건을 내놓은 건 저를 감시할 방법이 필요해서였군요.”
“당연히 운지란 대가 일리는 없을 터이나…….”
범한이 실눈을 뜨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성주부의 중립을 유지해야 하니, 운지란 대가가 최고의 선택이군요. 검려 밖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냉정하게 방관할 수도 있고, 또한 대세에 따라 저에게 제재를 가할 수도 있고요……. 하나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제재하실 생각입니까?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당연히 알고 계실 텐데요.”
“우리는 작은 범 대인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백화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우리는 스승님의 뜻에 따라 천하에서 크나큰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작은 범 대인께서 의를 저버리고 배신해 우리 동이성을 꿀꺽하신대도, 그건 우리에게는 의외의 상황이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대인께서는 경국 사람이고, 경국 황제의 사생아이니 동이성의 사활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께서는 그 점까지 생각하셨으면서 왜 도박을 감행하신 것입니까?”
“우리 동이성이 가진 힘이라고는 돈과…… 검뿐이라 그렇습니다.”
이백화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조용한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또 검 하나가 조용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왕 십삼랑은 피곤에 지쳐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범한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하기만 했다. 그러다 잔뜩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가 대인을 따를 것입니다. 하나 만약 의를 저버리고 배신한다면, 내가 죽여 버릴 것이오.”
“자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왕 십삼랑이 고집을 부리듯 범한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내가 당신을 잘못 본 거라면…… 못 죽이겠지. 그래도 죽일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