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화 체외 공기에 있는 것 그리고 손에 쥔 검 (2)
싸늘한 검의가 뼛속까지 전달되어 범한은 감히 몸동작을 크게 할 수 없었다. 9등급 고수 11명이 협공을 해오면, 범한도 알다시피, 이 자리에 황제 폐하가 있었다 하더라도 잠시 피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범한 자신으로서는 반격할 기회조차 찾지 못할 게 뻔한 거였다.
범한이 앞쪽에 꿇어앉아 있는 운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기 안에 독이 있습니다. 동이성 사람 절반이 이 흰 연기 때문에 죽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흰 연기를 봤을 때 범한은 가슴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닷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동안 검려 제자들이 이리 빨리 사고검의 유해를 불태워버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해서였다. 필경 그가 기억하기로는 이 대륙에는 화장을 하는 관습이 없는데 말이다.
사고검의 유해에는 독이, 그것도 맹독이 있었다. 비개 스승님께서 발라 놓은 맹독으로 몸이 굳지 않도록, 그리고 경국 황제의 왕도의 일격으로 생긴 상처에 꼬박 3년이나 버티도록 해준 것이었다.
물론 이 독소는 불꽃이 닿으면 흰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범한이 말한 것처럼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란 건 뭐든 조심하고 봐야 하지 않던가.
그리고 범한은 사고검 몸에 난 상처를 위해 몰래 이런저런 수단을 마련해둔 터였고, 그 약물들은 바로 오늘 같은 때를 위해 준비해 둔 거였다.
맨 앞자리에 꿇은 앉은 상태에서 범한의 설명을 들은 운지란이 몸을 일으키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오른쪽 팔만 들어보였다.
그러자 검이 검 자루로 들어가 더는 칼날을 번뜩이지 않았다. 검총 주변이 다시 조용하고 슬픈 분위기에 휩싸였다. 몇몇 검동이 울먹이며 불 안에 장작을 더 집어넣었고, 검려 2대(代)인 제자 13인은 커다란 불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광경을 본 범한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 받았다. 사고검이 죽은 후 운지란이 검려 내부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제일 높은 위신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13개의 검은 모두 무서운 역량을 지니고 있어. 이런 검을 쥐고 있는 게 내 손이면 얼마나 좋을까.’
범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위와 같이 생각했다.
* * *
날이 저물자 운지란이 보자기에 싼 작은 항아리를 품에 안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범한에게 작은 항아리를 심드렁하게 건네며 말했다.
“스승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걸 대인에게 건네라고 하셨으니 주는 것입니다.”
범한이 양손으로 정중히 받아들었다. 항아리는 아직 따뜻했다. 이에 아직 식지 않은 사고검의 유골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범한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운지란이 천천히 범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려의 12개 검을 스승님의 명에 따라 각하에게 건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범한의 동공이 살짝 수축되며 반짝였다.
범한은 앞에 있는 운지란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다가 무의식중에 여러 해 전 일이 생각났다. 밤이 되었을 무렵, 경도 황궁 안에서 처음 이 검술의 대가와 만났을 때였다. 그때 범한은 이제 막 조정과 삼국 정치 무대에 발을 내딛은 새내기였다. 그리고 운지란은 이미 천하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로, 동이성 사절단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6년이 지난 지금, 범한은 이 세계의 정점에 선 몇 명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운지란이 자신에게 절을 하며 충성을 약속하자, 범한은 그야말로 세상 변화가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범한은 사고검이 임종 직전에 대체 무슨 포석을 해 놓은 건지, 그리고 완고했던 운지란을 어찌 설득한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운지란의 태도가 허식이 아닌 건 느낄 수 있었다. 꾸준히 무도를 추구해온 강자가 일단 결정을 내리면 거의 약속을 무르지 않는다는 건 범한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범한은 운지란이 한 말과 12개의 검이란 단어를 똑똑히 들은 터였다. 이에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차분하게 운지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12개의 검은…… 운 대가께서 이 검들에 마음이 없으시다면 제가 어찌 12개의 검을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범한이 운지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려 첫 번째 제자를 정중하게 부축해 일으키며 진심을 담아 계속해서 말했다.
“운 대가께서 검성 대인의 유언 때문에 저를 믿어주신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대가의 믿음은 그다지 필요 없으니까요. 다만 이것이 거래라면, 제게는 검려의 힘이 필요하고, 검려는 저의 비호가 필요하기에 이루어진 거겠지요. 하나 대가께서 안 계신다면, 제가 어찌 12개의 검을 움켜쥘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운지란이 미소조차 지어주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스승님께서 작은 범 대인이 걱정 않도록 다 방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말을 마친 운지란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범한과 교류하고 싶다는 감정을 조금도 내비치지도 않은 채, 무도인으로서 친해질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범한은 심란한 마음으로 방 안에 서서 사고검이 운지란에게 시킨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잠깐 사이 그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일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사고검이 범한을 가지고 큰 도박을 시작했으니 누구든 자신을 제어하고, 감시하고, 감독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운지란은 이익 결맹 밖으로 나가 있는 동시에 검려 제자들 마음속에 위신이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범한이 훗날 일을 도모하다가 동이성의 이익을 크게 손상시키기라도 한다면, 그의 명령 한 방에 명의상 12개의 검을 쥐고 있던 범한에게는 순식간에 검 한 자루만 남게 되는 거였다.
* * *
운지란이 나간 후 방안으로 들어온 건 검려 둘째 제자였다. 범한이 그 중년의 남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생긴 사람으로 미간도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몸에 품고 있는 검의 역시 깊은 곳에 꽁꽁 싸매두고 있고, 살짝 두툼한 솜옷을 입고 있어 대단한 검객보다는 집사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대사형에 이어 곧바로 둘째 사형이 나타나다니. 범한이 속으로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사고검은 이번에 자신을 아예 불길 속으로 밀어 넣은 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마치 검려 제자들이 사고검의 유언을 받들어 순서대로 범한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곁눈질로 자기 옆에 놓인 갈색의 작은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허탈함에 가까운 기분이 담겨 있었다. 일대 검성이 재가 되어 손 옆에 놓인 작은 단지 속에 있다니.
범한이 항아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사고검 유골에 남아 있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범한의 손가락 동작을 따라 집사 같은 둘째 사형의 눈빛이 변하더니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가 손을 휘 내젓자 검려 3대째인 제자 몇몇이 상자 몇 개를 들고 들어왔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은 얼굴로 물었다.
“설마 검성 대인의 유산입니까?”
그러자 둘째 사형은 잠시 웃기만 할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 방에 상자들이 모두 들어오자 둘째 사형이 그제야 부드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검려의 자산이니, 당연히 고작 이 정도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안에는 잠시 동원하는 사업 자금만 있을 뿐입니다. 스승님께서 대인이 은전이 필요할 거라 하셔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장부들이 좀 있는데, 대인께서 분명 흥미를 가지실 것 같아 제 멋대로 가져와 봤습니다.”
살짝 놀한 범한은 집사처럼 보이는 검려 고수를 차분히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그가 이 둘째 사형을 무시해서 그럴 리는 없었다. 오히려 검려 13제자 중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운지란과 왕 십삼랑 간의 내홍이 일었을 때 말고도 이 둘째 사형은 직접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며 상황에 휩쓸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사고검은 줄곧 그에게 검려 밖을 지키도록 했었으니, 이 점만 봐도 그는 사고검에게 깊이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은자와 장부라고?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사고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데 이 장부들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검려 둘째 제자가 온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태평 전장과 관련 있습니다.”
그의 말에 범한은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낮고 긴 푹신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둘째 제자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참다못해 자조적으로 웃으며 경탄의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건 누구도 생각 못한 일이군요……. 천하 최대 전장의 주인이 뜻밖에도…… 검려에 숨어 계신 강자셨다니 말입니다.”
태평 전장은 천하제일 전장이었다! 과거 경국 명씨 가문의 방대한 자산도 어느 정도는 태평 전장의 자금 지원에 의조하고 있었다. 이 전장은 세상에 나온 이후 줄곧 세계 최대, 신용도 최고를 유지했다. 더군다나 몇 십 년 동안 그 어떤 전장도 태평 전장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했다.
몇 년 전 범한은 북제 젊은 황제와 암암리에 연합할 때 아버지가 보내 준 호부의 나이든 관원을 통해 기형적이면서 거대한 초상 전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태평 전장 앞에서 초상 전장은 여전히 발육부진 상태에 있는 꼬맹이에 불과했다.
황실 금고의 생산 및 판매권과 두 개의 밀무역 통로를 쥐고 있고, 연쇄점으로 차린 기생집들과 거대한 전장을 갖고 있는 범한은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은전이 제아무리 많다 해도 태평 전장과 비교하는 순간 별 것 아닌 게 된다는 걸 범한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왜냐하면 태평 전장은 대륙 상업계에 깊이 파고들어 모든 거상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평전장이 정말로 힘을 발휘하면,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은전의 양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평범한 귀족 권력자 관원이 아니었다. 전생의 상업 사회 경제를 경험했었고, 이번 생에서는 상업가들과 많이 교류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태평 전장의 무시무시한 실력과 그곳이 발휘할 수 있는 효력에 대해 훨씬 더 잘 알았다.
과거 범한은 감찰원에게 태평 전장에 대해 암암리에 알아보도록 했었다. 그런데 일정 정도에 도달하면 단서가 툭 끊기는 게 일이었다. 물론, 이 천하제일 전장은 동이성에서 시작되었으니 자연스레 검려와 관련이 있을 것이고, 적어도 사고검이 배후에서 지원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천하제일의 태평 전장이 아예 검려의 자산이란 건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검려의 둘째 제자가 태평 전장의 주인이었다니!
멍하니 태평 전장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범한의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기분이 복잡하게 오갔다. 이제야 사고검이 죽기 직전에 이 거대 도박에 얼마나 많은 판돈을 걸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실력을 얼마나 증강시켜 주었는지 알게 되어서였다.
12개의 검도, 동이성의 통제권도 무시무시한 거였다. 그런데 진짜 무시무시한 건 어쩌면 지금 방안으로 들어온 이 몇 상자의 장부일 수 있었다.
태평 전장의 장부 말이다.
범한이 깊이 심호흡하고는 검려 둘째 제자를 향해 경탄의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아직 선생의 존함을 모릅니다.”
범한이 그에게 존경을 표한 건 상대방이 검려 제자이자 9등급 강자여서가 아니었다. 태평 전장의 주인이기에 존경심을 표한 거였다. 이 세계에서 존경을 받으려면 당연히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천하 은전의 절반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존경할 만한 대상인 거였다.
적어도 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