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화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바다에서 왔다 (3)
사고검의 가슴에서 헉헉 하며 갑자기 불길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저승길에 놓인 황천이 그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대종사의 낯빛이 이상하리만치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운지란은 순간 마음이 울컥했지만 서둘러 비쩍 마른 스승의 팔을 부축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왕 십삼랑도 사고검의 반대쪽 팔을 부축했다. 사형과 사제가 서로 시선을 나누고는 사고검을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으켰다.
바닥 맨 앞쪽에 꿇어앉아 있던 검려 두 번째 제자가 무릎으로 기어와 잽싸게 사고검의 두 발을 잡고 낡은 짚신을 신겼다. 사고검은 침대에 한 달여가량 누워 있던 터였다. 독이며 상처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그의 두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서 짚신을 신자 끈 사이사이로 그의 부은 살이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사고검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지 오히려 편안히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제자는 스승님의 발에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의 발을 잠시 가볍게 주물러 주고는 침대 앞쪽 석판 바닥에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 * *
달은 갈고리 모양으로, 점점 희끄무레해지고 있는 하늘가로 숨어들어가는 중이었다. 동이성의 하늘 대부분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유일하게 동쪽만 생선 배처럼 하얀색을 하고 있었다.
석문이 있는 곳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던 범한은 피곤했다. 그래서 태양혈을 문지르며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범한이 갑자기 두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두막 깊은 곳에 있는 등불이 갑자기 꺼지는 걸 보아서였다. 사고검 사후 동이성에서 해야 할 지침사항이 모두 전달된 것이었다. 그런데, 곧이어 범한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게 될 장면을 보게 되었다.
저 멀리 삼베옷을 입고 있는 사고검이, 마르고 왜소한 사고검이 운지란과 왕 십삼랑의 부축을 받으며, 그리고 검려 모든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두막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후 오두막 산길을 따라 조용히 힘겹게, 심지어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검려 뒤쪽에 있는 산으로 향했다.
범한 뒤에 있는 그림자도 이 장면을 보았으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일 듯 말 듯 하기는 했지만, 기름이 다 떨어진 등잔 같은 사고검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가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산으로 올라가면서 고개를 잠시 돌렸다. 그런 그의 눈은 산속 거처의 석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본 사람이 동이성의 장래를 맡긴 범한인지, 아니면 동이성에서의 어린 시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어린 동생 그림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범한과 그림자는 조용히 산속 거처 문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사고검과 제자들의 행렬이 산 정상까지 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건 어쩌면 대종사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한 행동일 수도 있었다. 배웅을 할 때는 서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눈은 차분하니 다른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대종사는 작고 비쩍 말라 있었다. 그래서 운지란과 왕 십삼랑의 부축을 받은 그는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입고 있는 삼베옷만큼은 새벽바람을 맞아 휘날리고 있었다. 짚신이 신겨진 그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지 않았다.
오두막 뒤쪽에 위치한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범한과 그림자는 같은 산 위에 있던 터라 양측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잠깐 사이 검려 일행은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있었다.
동해에서 뜨는 아침 해는 지금 조용한 해안선을 넘어 기어 올라오는 중이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인간 세상의 첫 번째 광선은 해면을 뚫고 올라온 후 다시 동이성 민가를 뚫고 올라왔다. 그런 후 사람들의 숨결과 푸른 나무의 빈틈을 뚫고 오두막 뒤쪽에 있는 작은 산을, 동이성 검려 제자들을, 최전방에 있는 작고 마른 대종사의 얼굴을 비추었다.
대종사의 얼굴에서 순간 옅은 황금빛이 반짝였다. 비록 생명의 끝자락에서 쇠약하고 쪼그라든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순식간에 중생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이건 검의의 기세가 아닌 이 사람이 지닌 존재감이었다.
범한이 잠시 산꼭대기 쪽을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들 속에서 사고검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 * *
사고검이 차분한 표정으로 야트막한 산 절벽 가장자리에 섰다. 그는 살짝 따스하고 익숙한 햇살이 해변 쪽에서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사고검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동이성의 공기를, 그리고 이곳의 기운을 들이마셨다.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죽기 바로 직전에 과거 역사와 과거의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화면이 되어 아침 금빛 햇살과 함께 눈앞에서 쉼 없이 스쳐지나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무 아래에 있던 개미, 검은색 천을 둘러쓴 친구, 형제, 비, 죽은 사람, 성주부 불태우기, 검, 검갱. 검갱 안에 있는 낡은 천과 쓰레기, 제자, 제자, 그리고 제자. 또 검, 큰검, 천검. 검으로 천하를 쓸고 다니고, 이 웅장한 성을 보호한 일. 그런데 성은 아직 무너지지도 않고, 검도 두 동강이 나지 않았는데, 사람은 죽어야 하다니.
사고검이 기력이 없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이로써 아침 햇살과 합쳐진 환상을 깨끗이 걷어내고는 억지로 몸을 조금 더 높이 올려 더 멀리 더 진실한 것을 보려 했다. 하지만 발에는 힘이 없고 시야도 흐릿하기만 했다.
운지란과 왕 십삼랑이 스승님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그를 위쪽으로 부축해 올렸다.
사고검은 갑자기 시야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지켜본 동이성, 성 안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새벽에 장을 여는 바쁜 상인들, 무형으로 성내 시정 곳곳을 흘러 다니는 재화와 금은, 사람들의 행복에 찬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죽기 직전, 사고검은 자신이 보고 싶었던 게 이런 게 아님을 문득 알아차렸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는 오랫동안 자신이 기거한 오두막을, 누런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여러 해 전, 그것은 실은 낡고 쓰러져가는 초옥(草屋)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지내며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이에게 무공을 가르치며 득의양양하게 지냈다.
마지막으로 사고검은 동이성 밖에 있는 크고 푸른 나무로 시선을 보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는 동해에서 불어오는 무수히 많은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건강하게, 미친 듯이 자라나 그 아래를 지나가는 행인, 여행객, 상인, 세상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거대한 나무인 것이다.
아침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자 검려 근처의 언덕도 살짝 따스한 새벽빛에 휩싸였다. 그러자 검려 사제 십여 명은 따스한 햇살을 맞고 서 있게 되었고,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언덕 아래에서는 검려 3대(代)인 제자들, 검동 및 사고검을 오랫동안 시중들었던 하인들, 관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종사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안 이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꿇어앉아 언덕 방향을 향해 계속 고개를 조아렸다.
산허리 산속 거처에 있던 범한과 그림자도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별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범한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오랫동안 그와 동이성은 줄곧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나 사고검이라는 대종사에 대해서 그는 깊이 아는 게 없었다. 단순히 상대방이 절대 강자이며 손에 쥔 검 한 자리로 천하대세를 바꿀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뿐이었다. 그런데 과거 여러 해 동안 사고검은 범한에게 가장 큰 적이었음에도 세월이 변화하면서 두 사람 간의 관계에도 이렇게나 큰 변화가 인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어젯밤에도 그랬듯이 사고검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와 사고검의 담판은 모종의 이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양측의 협력일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여러 부하들을 죽이고 또 경국 사람을 많이 죽인 대종사를 향해 범한은 과한 감탄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햇살이 나오자 범한은 씁쓸하게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 위에 있는 마르고 쇠약한 형체를 바라보며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 대종사가 세상을 수호하고, 백성을 아끼는 혁명가처럼 보이다니.
그림자가 산문 바깥쪽으로 한 걸음 나와 말없이 멍하니 산꼭대기에 있는 사고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과 생명이 얽혀 있는 상처 입은 형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을 함께 나누었다.
범한이 산문 그림자 진 곳으로 돌아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가 살짝 끓어오르며 체내에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정기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특히나 뒤쪽 설산 있는 곳에 있는 강대한 패도의 정기가 양팔을 따라 흘러나와 손바닥 밖 주변에서 돌아 들어가며 지극히 원만한 정기의 귀로가 만들어졌다. 손바닥으로부터 반 치(寸)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래도 지극히 민감하게 정기가 외부로 방출되었다.
범한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에 곁눈질로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드넓은 바다 쪽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변가로, 그곳에는 붉게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맞으며 호흡하고 있는 물보라가 있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사고검의 시선도 물보라가 이는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는 살짝 습한 빗방울이 섞여 있었다. 아침 해가 위로 떠오르고 있는데 약간 무거워 보이는 먹구름이, 그리고 비바람이 몰려온 거였다. 마치 사고검에게 선물을 주듯, 그에게 세례를 해주려는 듯 나타났다.
* * *
범한과 임종을 앞둔 사고검 말고는 그 사람이 일부러 방출한 기운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범한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산속 거처를 떠났다.
범한은 검려 주변에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 뒤쪽으로 나가 동이성 방향으로 비스듬히 들어갔다. 이후 범한은 최고 속도로 최단 시간을 들여 민가와 점포를 밟으며 항구와 선박을 지나 동이성 밖에 있는 동해 바닷가의 어느 외진 모래사장으로 갔다.
바닷가로 밀려온 빗방울은 점점 밀집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해안가 모래사장에는 만 개의 자그마한 구멍이 생겨났다.
회색 그림자 같은 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후 모래사장 옆쪽에 있는 푸른색 돌 위에서 사납게 멈추어 섰다. 범한이었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모래사장 위에 만들어진 빗물 방울 구멍을 바라보았다. 문득 여러 해 전 일이 생각났다. 담주 해안가 절벽 아래에서 작은 배가 침몰하고 있을 때 모래사장에 남은 흔적이 이와 같았는데.
비바람은 강해지 않고 부드러웠지만, 그래도 살을 에는 듯했다. 아침 햇살이 더 높이 떠올랐다. 하지만 비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동이성을 비추는 빛은 어두컴컴해지고 말았다. 특히나 바닷물이 돌을 쳐 물보라를 일으킨 때문에 무수히 많은 물안개가 일었다. 여기에 비스듬히 나부끼는 바람과 빗방울까지 섞이자 공중에 살짝 몽롱한 안개가 깔렸다.
몽롱한 물안개 뒤에서 서서히 거대한 선박이 드러났다. 만 리 해로를 헤치고 거센 파도도 이겨낼 수 있는 거대한 선체의 원양 상선이었다. 상선은 암초 때문에 해안 근처로 다가올 수 없어 먼 바다에 떠 있느라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비록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영문 모를 압박감 때문에 범한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
대양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비바람이 계속 불기는 했지만 빗방울은 바다로, 모래사장으로 소리 없이 떨어지며 세상을 조용히 윤택하게 만들었다. 파도도 더는 거칠게 해안가를 때리지 않았고, 천천히 일렁이며 대륙과 함께 호흡할 뿐이었다.
흰 안개 속에서 조각배 한 척이 보일 듯 말 듯 다가왔다.
범한이 한 차례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런 후 살짝 축축하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밟으며 해변으로 걸어가 조각배를 맞았다.
뱃머리에는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양손을 뒷짐 진 자세를 하고 있었고, 희끗 희끗한 긴 머리카락을 천으로 질끈 묶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맑고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였고,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있었다. 삿갓의 크기가 작기는 했지만 하늘에서 차분하지만 빽빽하게 내리고 있는 빗방울을 작은 배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주고 있었다.
선미에 앉아 있는 사람도 삿갓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눈빛과 입가에 드리워진 괴이하고 무서운 웃음을 모자챙은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섭류운이 온 거였다. 사고검이 곧 죽을 때가 되자 드디어 배웅을 해주러 온 거였다.
이에 범한은 심장이 덜컹하며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선미에 앉아 있는 사람 때문에 온화하게 웃을 수 있었다. 비개 스승이 온 거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지쳐 있을 때 절친한 사람이 보이자 섭류운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받았던 충격이 많이 상쇄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