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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19화 (919/1,108)

919화 의지가 바로 왕도 (2)

앞서 사고검의 말에서 조금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직접 듣게 되자 범한은 순간 머리를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이에 머리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리고, 너무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벙했다. 황제 아버지의 체내에 경맥이 없다고? 그런데 경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는 거야?!

“하권에서도 여전히 패도의 세를 다루고 있어. 만약 자네가 계속 연마했다면, 경맥이 폭발해 죽게 되었을 거다. 한데 운이 좋다면 평생 불구자로 살았을 테고 말이다.”

사고검이 범한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경맥을 파괴하지 않으면 하권의 운기 법문은 아예 연마할 수가 없는 거다. 그 법문이 추구하는 건 전혀 정상적인 길이 아니야. 자네가 50년을 더 연마한다고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란 뜻이지.”

범한이 연달아 심호흡하며 놀란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그는 사고검의 분석이 맞는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년 전에 패도의 정기를 정점까지 연마한 터였다. 그때 범한은 9등급의 문턱을 넘어서서 한창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런데 경도부 밖에서 사필안의 공격을 깨뜨린 것으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체내에서 정기가 급격히 요동치면서 폭발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경맥이 충격을 받아 여기저기 심하게 손상되었다.

그 후 범한은 힘겹게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현공 사당 일로 그림자와 목숨을 건 추격전을 벌이다가 숨은 우환이 재발해 버렸고, 이에 그림자의 실수로 범한은 중상을 입게 되었다.

패도의 공결을 연마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범한은 두 번이나 생각지도 못했던 큰 화를 맞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그가 아직 아이였을 때 비개 스승이 그에게 훗날 큰 위험이 있을 걸 감지하고 건네준 커다란 붉은 환약 때문이었다.

그 커다란 붉은 환약은 최종적으로는 황태후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범한도 알다시피, 그건 순전히 자신의 운이 좋아서 피해간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정기가 한계를 넘어서면서 경맥이 크게 손상되었음에도 그는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였다.

범한이 기댄 건 해당타타의 구조의 손길, 그리고 북제 천일도에서 밖으로 절대 유출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무공 공결이었다. 범한은 강남에서 천일도의 자연스러운 정기를 이용해 오랫동안 치료를 한 끝에 손상 된 경맥을 완전히 복원할 수 있었다.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정기를 동시에 쓸 수 있었던 건 체내에 있는 두 개의 각기 다른 운행의 길이 상부상조해서였다. 이렇듯 범한은 정기가 몸 안에서 폭발하는 위험에서 벗어났고 어려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어둠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오늘 사고검 입을 통해 증명된 건, 하권을 연마하고 싶다면 반드시 정기가 몸 안에서 폭발하도록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체내 모든 경맥을 산산조각 내야 하는 거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의 낯빛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침대에 뻣뻣하게 누워,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로 사는 건 사람의 삶이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체내 경맥이 모두 산산조각 났는데, 사람이 어찌 살수 있단 말인지.

“경맥이 모두 깨진 후에도 살아남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사고검이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경국 황제는 분명 운이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곧 죽을 목숨이었지만, 사고검 역시 경국 황제가 하늘이 정한 사람이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던 거였다.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이란 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제 운 역시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처음 경맥이 손상되었을 때 안 죽었거든요. 하나 만약 경맥이 산산조각 났다면, 폐인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터이니, 사람으로서 도무지 참을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경국 황제는 참아냈고, 또 살아남았다.”

사고검이 살짝 눈꺼풀을 내리고는 알아차리기 힘들게 아주 작은 소리로 탄식을 했다.

범한은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가 평생 품은 몽상 내지는 이상에는 일단 아내, 아이, 돈처럼 세속적인 걸 제외하면, 두 번째 생에서 만난 무명의 공결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은연중에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던 거였다. 범한이 대놓고 밝힌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이 공결의 두 번째 권을 연마하고 싶은 갈망이 컸다.

그건 지금의 경지를 극복하고 대종사가 되는 것과는 무관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갈망은 너무나도 요원한 사치스러운 바람이었다. 왜냐하면 경맥이 산산조각 난 상태에서도 살아야 하고,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내야 해서였다. 그리고 체내에서 별빛처럼 점점이 흩어져버린 정기를 강제로 응집시키고, 전신이 뻣뻣하게 굳는 가운데서 번민을 견뎌내고, 심지를 강하게 지켜내고, 재건하고…….

범한은 문득 진평평 및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경국이 대(大)북위를 행헤 첫 번째 북벌을 진행했을 때였다. 황제 아버지는 전천풍 총독에게 참패했다. 그리고 그때 중상까지 입어 전신이 굳어버려 움직이지 못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다.

이제 보니, 황제 폐하께서 대종사의 경지로 들어가게 된 돌파구는 순간순간 급박하게 변화하는, 그 어느 곳보다 험악한 전쟁터였던 거다!

범한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황제 아버지를 향한 그의 감정과 느낌이 어떤지를 떠나 그 당시 전쟁터에서의 상황, 그 중년 남자의 체내에서 일어났을 시련 그리고 그때의 기묘한 변화들을 생각하니 경탄밖에 나올 게 없던 거였다.

“그게 하늘의 뜻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범한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의지라 해도 평범한 의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과 사를 오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거고, 암흑 속에서 미지의 것과 싸울 때의 공포감도 떨쳐내지 못했을 게다.”

사고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고검은 무명의 공결을 수행해본 적은 없었지만, 의지가 필요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즉, 경국 황제가 하권을 연마하기 위해 과거에 어떤 혹독한 수련을 했는지 그는 알 수 있었던 거다.

“경국 황제는 그때 분명 고통스러워했을 거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웠을 테지……. 하여 나는 아까 기분이 좀 좋았구나.”

범한이 대꾸할 때도 기다려주지 않고 사고검이 웃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나 그 정도의 관문을 버텨내다니, 그의 의지와 끈기에는 탄복했다.”

“나라면 못 할 일이거든. 자네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사고검이 말을 이어 갔다.

“세상에 그러한 의지를 지닌 사람, 아울러 본인을 그리 모질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딱 한 사람밖에 없을 게야. 그러니 자네는 그 생각을 접도록 해.”

범한은 뭐라 대꾸하면 좋을지 몰라 고개나 푹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서 울리는 사고검의 대로한 음성만 듣고 있었다.

“이런 염병할…… 그건 애당초 사람이 연마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애당초 사람이 연마할 수 없는 거라고 해도 그걸 연마했다는 이유로…… 사람이 아닐 리는 없는 거였다. 그러니 이건 경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가 마음속 갈망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끈기와 초탈한 의지를 연마한 거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고검 침대 옆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범한은 저도 모르게 살짝 오싹했다. 그리고 순간 높은 산을 추앙하듯 바라보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산이 수려해 친근하게 다가왔다기보다는 범접하기 힘들게 구름 위로 쭉 뻗어 있어 보는 순간 절로 감탄하게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범한이 심호흡을 하고 살짝 따끔한 눈가를 문질렀다. 그런 후 차분한 음성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천부적 재능을 놓고 따진다면, 해당타타 정도면 충분합니다. 심지를 놓고 따진다면, 십삼랑이면 충분하지요. 근면함을 놓고 따진다면, 제가 다른 이보다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봤을 때, 우리 셋 중 그 기회에 다가설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대체 왜일까요?”

“내게 묻지 말게.”

귀찮아하며 화를 낸 사고검이 피곤했던 눈꺼풀을 천천히 감으며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보기엔, 우리 늙은이가 전부 죽고 자네 황제 아비만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는 것이니, 그는 분명 적적해 할 게야.”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사고검이 느닷없이 다시 조롱조로 말을 이어 갔다.

“이미 대동산에서부터 적적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군.”

그의 입가에 옅게 조롱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게 경국 황제를 향한 것인지 그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범한이 불쑥 끼어들어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섭류운은…… 그분은 정말로 대륙을 떠났을까요?”

사고검이 한동안 생각을 해본 후 힘겹게 아래턱을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그러면 됐습니다.”

사고검이 양 눈을 감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보니, 이번에 경도로 돌아갔을 때 뭔가를 알게 되어 어떤 결정을 내린 게로군.”

범한은 대종사가 자신의 언행과 감정만을 가지고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데도 전혀 의외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짜 백치가 아니란 걸 그도 알고 있어서였다. 이에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우산은 챙겨야 하니까요. 유비무환이 제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오죽은?”

사고검이 문제의 본질을 단번에 콕 집어내버렸다.

이에 범한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회피하고 오히려 반문했다.

“신묘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범한의 물음에 사고검은 오죽 행방에 대해 눈치 챘다. 이에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묘? 단순한 사물일 뿐이지 않은가. 하여 자네는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 자네 황제 아비가 수련한 무공이 신묘에서 나온 거라 한들 그게 뭐 어쨌다고? 신묘가 직접 나서서 도와줄 리도 없고 말이야.”

그 점과 관련해 범한은 확신이 없었다. 여러 해 전에 신묘가 경국 황제의 기도 소리를 듣고 모 사자를 보내어 오죽 아저씨를 경도에서 떠나도록 한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지금 저 멀리 신묘로 떠나 있는 오죽 아저씨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가 천하대세에 가장 근본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다.

사고검이 두 눈을 감았다. 그가 범한의 내면 깊은 곳에 짙게 드리워진 근심과 옅게 깔린 공포를 느꼈는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신묘는…… 사실 그냥 사당일 뿐이다. 진짜 신이 사는 곳도 아니고 말이다.”

범한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이에 그가 추궁하듯 물었다.

“신묘에 가보셨습니까?”

“나는 고하나 소은 같은 변태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새가 똥 누러 가지도 않을 곳에 가겠느냐?”

사고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본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다시 말해…… 나도 신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하나…….”

사고검이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분명히 알아둬야 할 건 있느니라. 만약 신묘에서 정말로 누군가가 왔다면, 네 어머니가 이 세상에 남긴 흔적을 제거하려 들었을 것이다. 하면 황실 금고도 일찌감치 사라졌을 테고, 자네도 분명 죽고 없었겠지.”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신묘에서 인간 세상에 사자를 파견한다고 확신 할 수는 있겠군.”

사고검이 느닷없이 눈을 떴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하나 명심하거라. 오죽 그 나무토막도 신묘의 사자 중 하나다. 하여 그가 자네와 자네 어머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는 건 신묘에서 온 사자가 자네가 상상한 것만큼 강하지는 않다는 뜻이지.”

범한이 미간을 들었다 놨다. 그런 후 오죽 아저씨가 여러 해 전 해준 말을 떠올렸다.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습니다.”

설마 신묘가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쇄락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나? 그렇다면 오죽 아저씨는 왜 그곳으로 돌아가신 거지? 물론 모든 게 범한이 추측한 대로라면, 범한은 그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산처럼 우뚝 솟은 황제 아버지를 상대하는 데 있어 범한은 충분히 과중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가늠하기도 힘든 하늘 밖 우주 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면, 그의 믿음은 최저점까지 떨어질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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