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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16화 (916/1,108)

916화 인간 세상에 흩뿌려진 별 (1)

아침 내내 범한은 아버지 수발을 들어 드렸다. 차를 내오고, 물을 가져다 드리고, 식사를 준비하고, 안마를 해드리고. 다시 태어난 지 어언 20년이나 되었건만, 범한은 대부분은 담주에서 생활하느라, 경도로 온 후로는 일이 많아, 또 최근 3년 동안은 만나 뵐 수 없다는 이유로 막상 제대로 된 아들 노릇은 하지 못했다. 이에 오늘 이국 산골짜기에서 달리 마음 졸이는 일도 없는 때가 우연히 찾아오자 범한은 진지하게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전직 범 상서는 처음에는 조금 놀라 낯설어했다. 하지만 이내 아들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웃으며 범한이 하는 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바쁜 가운데서도 여유롭게 아들의 시중을 받아주었다.

부자는 미음과 소가 안 든 만두로 대충 아침을 먹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후 십가촌에 들어선 넓고 쭉 뻗은 길을 따라 마을 옆에 있는 대산 쪽으로 향했다. 길 위에는 옅게 안개가 껴 있어 발아래 바닥석 사이의 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아버지를 부축하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면서 시종일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직선 도로는 횡으로 세 개, 종으로 한 개가 나 있었고 제대로 만들어서 넓이도 제법 넓고 산장 건축물과 완벽히 어우러져 있었다. 범한도 알다시피, 이는 모두 훗날 물건 수송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해둔 것이었다.

안개 속에서 복숭아꽃이 한 자락 모습을 드러냈다. 전직 범 상서가 그곳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몇 마디 했고, 범한은 옆에서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돌로 만들어진 우물 옆에 다다르자 전직 범 상서는 또 잠시 말을 했고, 이때도 범한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아침에 나선 출행 길에서 전직 범 상서는 범한에게 온화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바로 이 거리가 훗날 어찌 사용될 것이고, 이 집은 훗날 누가 살 것이며, 삼대 작업장을 만약 다시 세운다면 어찌 자리를 잡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부자는 돌길을 따라 청산까지 걸어갔고, 산허리에 있는 비래석(飛來石: 하늘에서 날아온 것처럼 생긴 바위) 옆에 다다른 후에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부자가 동시에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황금빛이 동쪽 만 리 길을 뚫고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사이 백색의 안개를 쓸어버리고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러자 대체 얼마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들쑥날쑥하기는 해도 운치 있게 들어선 가옥에 눈에 들어왔다.

집들은 큰길과 골목길이 난 방위를 따라 산골짜기에 늘어서 있었고, 푸른색 담벼락과 검은 지붕 사이에서는 고목들도 삐죽 솟아 있었다. 더 없이 맑고 깨끗하고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로 보아 일찍 기상한 누군가가 물을 긷고 밥을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산골짜기 사이를 바라보았다. 두 개의 산 사이에서 빽빽하게 들어선 가옥들은 동쪽 방향으로 멀리멀리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젯밤에는 발아래로 보이는 별빛 같았는데. 오늘 진면목을 보니, 지금 십가촌은 이미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있던 거였다. 범한은 2년여간 들인 고생과 십가촌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미간과 눈, 입가에서 기쁜 마음이 넘실댔다.

“자기 능력 이상의 보물을 숨기고 있는 건 죄니라.”

계속 허리 쪽을 부축 받고 있던 전직 범 상서는 허리가 아팠다. 이에 숨을 계속 헐떡이면서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기 보이는 건 단지 껍데기일 뿐이란다. 하나 네가 정말로 저 안에 정말로 보석을 집어넣으려하고, 또 그 소식이 새나가게 된다면, 천하 사람들이 너를 물어뜯으려 달려들게다.”

“저를 물어뜯을 만한 능력자는 몇 안 됩니다.”

범한이 웃으며 응대했다.

그러자 전직 범 상서가 찬성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산골짜기가 지키기는 쉬운 반면 공략은 어렵다고 한다만, 그래도 고작 수천 명으로 어찌 일국 병사들의 습격을 막을 수 있겠느냐?”

“어젯밤 아버님께서 제게 지도를 보여주셨지요. 황제 폐하께서 만약 토벌 군대를 보내신다면, 중간에 있는 동이성과 북제도 분명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이성이 이제 곧 경국으로 들어온다지만…….”

“그건 단지 명의상일 뿐입니다. 십 년은 더 노력하지 않는다면, 경국이 동이성을 평화롭게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면 동이성은 안전한 게냐? 아니면 북제인은?”

전직 범 상서가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네 어머니가 남겨둔 유산들은 너무 유혹적이라서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단다. 이곳은 북제와도 가까운데 어찌 북제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범한이 잠시 웃었다. 그리고 산허리에 놓여 있는 푸른 바위 위에 아버지를 부축해 앉히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북제 쪽과 관련해서는 제게 북제 젊은 황제를 견제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아무리 금강석과 같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제게는 그분의 생각을 불식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두 번째 황실 금고가 탄생하는 것이다. 한데 일국의 군왕에게 싫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게 바로 먹히는 줄 아느냐?”

전직 범 상서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속마음을 가늠해 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북제 황제를 향한 너의 믿음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이 세상에 새어나간다면, 북제의 문무백관이 크게 군침을 흘릴 것이다. 그 젊은 황제가 너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가 어찌 온 나라의 의지까지 꺾을 수 있겠느냐?”

범한이 아버지 앞에 섰다. 그리고 산 아래쪽을 바라보던 눈빛을 거두어들이고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면 어찌해야 할까요? 그건 원래 뜨거운 감자 같은 일입니다. 하여 일단 황제 폐하 쪽은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설령 수년 후 장래가 될 지라도, 제가 이곳을 지키려면 제 스스로가 먼저 충분히 강대해져야 하니까요.”

“그러렴. 네 말대로 일단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말자꾸나.”

전직 범 상서가 웃기 시작했다. 부자인 두 사람 모두 알다시피, 십가촌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은 바로 경도에 있는 황제 폐하이기 때문이다.

“너는 천하 3국 사이를 오가야 하는데, 지금 힘이 얼마만큼 있는 것이냐? 이곳을 지켜낼 정도는 되는 것이야?”

“천하에서 제 밑에 있는 9등급 강자의 수가 제일 많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데리고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지요.”

“사고검이 그들을 너에게 준 게 확실한 것이냐?”

전직 범 상서가 말을 이어 갔다.

“설령 너에게 주었다 하더라도, 사고검 사후에 검려의 그들을 너는 어찌 통제할 생각이냐?”

“그거야 사고검이 어찌 처리할지 두고 봐야겠지요.”

범한이 대답을 이어 갔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을 주고 말고는 사고검이 고려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일은 동이성 입장에서는 가장 이익이거든요.”

“이익에 대해 언급해서 말인데, 나는 진심으로 경국 백성들이 좀 걱정되는구나.”

범건이 갑자기 침울하게 변했다.

“이곳은 보충지로, 일종의 예비 차원에서 만든 곳이자, 협박용입니다.”

범한이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는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여 동원하지 않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제일 좋은 결말을 맞는 것이고요.”

산골짜기의 안개는 이미 흩어지고 없었다. 점점 올라가는 지면 온도 때문에 안개는 형체를 잃고 위로 붕 떠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산허리 쪽 평지를 뚫고 온 살짝 차가운 산바람 때문에 다시 허연 아지랑이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푸른색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범씨 부자는 흰 구름에 둘러싸여 옷자락을 가벼이 펄럭이게 되어 신선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 입구 길목 근처에서 농부 하나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호기심을 강하게 억누른 채 구름 속에 있는 두 개의 사람 형체 쪽은 절대 바라보지 않았다. 이보다 더 멀리 떨어진 어둠 속에는 십가촌을 호위하는 자들이 숨어 있었다. 이 마을의 건물과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범한은 당연히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직 범 상서도 이들의 존재를 눈치 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주변에서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구름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침묵이 제법 이어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전임 범 상서가 차분하게 입을 뗐다.

“이 아비가 천 년의 역사를 돌아봤지만 한 사람이 세상을 뼛속까지 바꾼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더구나.”

범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들어서였다.

“네 어머니는 재주가 뛰어났었다. 천인의 자태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어.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이 세계를 바꾸려 했을 게야. 하나 그렇다 해도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단다.”

전임 범 상서의 표정이 냉랭하고 무뚝뚝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냉랭함과 무뚝뚝함 속에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 탄식이 숨어 있었다.

그가 팔을 들어 옅은 안개에 싸인 소매를 휘익 휘둘렀다. 그리고 산골짜기 쪽에 있는 건축물을 가리키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해 전에 민북의 황무지에서 오늘처럼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풍경을 보았단다. 황무지가 새롭게 태어난 광경이었지. 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기묘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건 세인들을 납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우리에게 한계를 주었다는 사실까지도 납득하게 만들 정도였으니…… 사람인 이상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아버지의 말에 범한은 살짝 감동했다.

“그때 네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면, 황실 금고는 분명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을 게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섭가는 천하로 뻗어나가서 장사를 하고 있어야 했어.”

범건이 탄식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십가촌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나는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단다. 하나 네 어머니의 과거 바람이 생각나 네가 하고 싶은 데로 하도록 내버려둔 거였다.”

“과거 여러 해 동안, 아니지, 최근 몇 년 동안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건 바로 네 어머니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을까, 또한…… 그녀가 왜 떠났을까가 궁금해서였다.”

범한이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에게 바짝 붙어 앉은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파리하게 마른 전직 범 상서는 산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유난히 차분했다.

“우리 늙은이들은 모두 여러 해 전에 그 일을 겪었단다. 하여 네 어머니가 하늘을 떠도는 신묘에서 왔다고 추측했다. 오죽은 그녀의 호위 무사이고 말이지……. 한데 인간 세상일에는 간섭하지 않던 신묘가 왜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런 꿈같은 일을 한 걸까?”

범한이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고는 무릎에 얼굴을 살포시 가져다 댔다. 그런 후 고개를 돌려 다른 생각 중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범한이 알기로 과거 아버지는 경도에서 알아주던 방탕한 인물이었고, 시문과 서화 그 어느 것에서도 빠지지 않는 인재였다. 하지만 동료들과 천하를 도모하는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그러한 정신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은 버리고 장부 처리 같은 무미건조하지만 중요한 일에만 투신한 거였다.

그런 범건이 오늘 십가촌 근처 산허리에서, 그것도 경국 호부 상서 직에서 물러난 지 3년 만에 드디어 문예를 사랑하던 과거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물론 그 청년이 이제는 거의 노년기에 들어서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 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커다란 망을 치신 거라면, 오죽은 왜 다른 데 가 있도록 하신 걸까?”

전임 범 상서의 음성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가 범한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세상에서 오죽을 네 어머니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일이라면, 위협 거리는 딱 하나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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