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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912화 (912/1,108)

912화 십가촌(十家村) (1)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범한이 차갑게 식은 차를 들이켜고는 자신도 모르게 두 다리를 모으고 무릎을 팔로 끌어 앉았다. 이 자세는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안정감을 주었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에 2 황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검은 옷을 자객을 바라보자 자연스레 고달이 떠오르면서 황제 폐하의 계획 때문에 피를 흘리고 희생당한 무고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는 진평평과 경도 황궁 앞에서 진항의 목을 벤 형과도 떠올렸다.

며칠 동안 형과를 보지 못했다. 범한의 눈동자를 밝게 빛나더니 진평평이 어둠 속에서 한 많은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도 몇 년 동안 암암리에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오랜 전우인 두 사람을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선택하는 방식이 상당히 유사했다. 아마도 그들은 진정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어본 사람들이었기에 비로소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향해 쏟아지는 압력에 반항할 수 있는 거였다. 생사의 고난을 넘어본 사람만이 휘황찬란한 황권의 압력 아래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다 못해 거만해 보일 정도로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설 수 있는 거였다.

아마도 이것이 사고검이 말한 의지의 문제일 거였다. 자신의 수련 경지와 관련 없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큰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범한의 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검객이나 은색 가면을 쓴 형과처럼 말이다.

“돌아가서 은전 문제는 내가 최대한 빨리 해결할 거라고 전하게. 하지만 전장 안에 있는 종이를 어장에 필요한 양분으로 바꾸는 일이 워낙에 힘든 일이라서 말이야.”

범한인 검은 옷을 입은 검객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내 주변에 황궁의 시선이 있을까 걱정되네. 그래서 이번에 직접 위주에 와서 관무미를 만난 거네. 만약 궁정이나 형부, 도찰원에서 무언가를 조사한다면 이 점을 의심할 거니 자네도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게.”

“문제는 도련님이 관무미를 만나러 온 게 어장을 대신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검은 옷을 입은 검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만약 상대방이 여기를 조사하면 어떡합니까?”

“자네와 나는 각각 맞은편 절벽 위에 선 사람처럼 단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설사 누군가가 조사를 하더라도 기껏해야 나 말고는 아무것도 조사해 내지 못할 거네. 그리고 은전이 흘러간 방향도 앞에 일부분의 장부 위에 과정은 아버지가 강남에 남겨둔 호부 관리가 처리했고, 뒤에 일부 은전을 바꾸는 건······.”

범한이 약간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이런 일이 약간은 어렵게 느껴지는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일부는 내가 처리할 수 있네. 그런 뒤 동이성 쪽이 어떠한지 봐야겠지. 만약 외국에서 화물이 구입한다면 속도를 훨씬 높일 수 있을 거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검객은 범한이 해야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걸 알았지만 가야만 했기에 양손을 잡고 인사하며 말했다.

“3년 동안 제가 항상 궁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뭐가 궁금한 것인가?”

“어장이라 부르는 이유가 뭡니까?”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범한이 담담히 설명했다.

“어장은 검의 이름이네. 전제(專諸)라는 사람이 사용했던 검인데, 물고기 배 속에 숨긴 검이라고 해서 어장이라 부르는 거지. 이 검은 물고기 배 속에 숨어서 영원히 세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일단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나오면 반드시 누군가의 가슴을 찌른다네.”

“그런 면에서 자네는 어장이라 할 수 있고 형과도 과거에 어장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내 곁을 따르는 그림자도 어장이라 할 수 있지.”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만 자네들의 어장 안에 숨겨진 검은 이미 세상에 드러났지만, 내 어장 안에 숨겨진 검은 아직도 그 안에 숨어 있네.”

* * *

범한은 위주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관무미와 함께 은전을 마련하는 일에 대해서 상의를 했다. 현재 소주에 있는 하서비는 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범한은 할 수 없이 관무미의 입을 통해서 새로운 명씨 집안 주인에게 이 일의 중요성을 알렸다. 다음 날 영남 웅씨 집안과 천주 손씨 집안에서 보낸 대표들이 위주로 달려왔다. 범한은 어두운 곳에 숨어서 두 집안 거상들의 태도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안심했다.

새로운 명씨 집안의 이유는 정말 확실했다. 비록 북쪽에서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지만, 손씨 집안과 웅씨 집안은 하서비가 이 일로 자신들을 속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속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인들 사이에서 서로 돈을 빌려줄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건 상대방에게 갚을 능력이 있는지였다. 손씨 집안과 웅씨 집안이 보기에 설사 북제 조정에서 동이성 일로 앙심을 품고 명씨 집안의 북쪽 밀수 사업을 대대적으로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명씨 집안 뒤에는 작은 범 대인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황실 금고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물들을 보증으로 한다면 아무리 큰돈을 빌려줘도 되돌려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리 없으니 말이다.

은전이 장부에 들어온 걸 확인한 범한은 은밀하게 관무미를 불러 하서비에게 화원에서 연회를 열어 양계미를 초청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지시했다. 강남에서 제일 큰 소금 상인인 만큼 집안에 숨겨둔 은전도 많을 거였다. 그러니 하서비가 그에게 은전을 빌리는 건 아마도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양계미는 혼자서 은전을 다 마련할 수 없다면 아마도 강남 소금 상인들을 동원해서라도 도와주려 할 거였다. 범한은 강남에서 2,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단단한 기반을 세울 수 있었고, 이에 겉으로는 조정의 근간을 건들지 않으면서 강남 상업계의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능력을 통해서 그는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거액의 은전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범한은 단 하루를 들여 거액의 은전을 마련했다. 저녁 무렵 위주성을 떠난 그는 피처럼 붉은 석양 속에서 사라졌다. 강남에 있는 부하들은 범한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 감찰원과 계년조 심복들도 그의 종적을 놓쳐 버렸다.

평생 감찰원에서 몸 담가온 젊은 9품 고수는 일부러 변장하고 길을 떠나 모든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범한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며칠이 지났을까 대륙의 봄기운이 더할 나위 없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진 고생을 한 것처럼 후줄근한 차림을 한 사내가 북제와 동이성의 경계 부분에 있는 대산(大山) 밖에 위치한 평야에 나타났다.

이곳은 아주 외진 곳이었지만 아주 오래전에 장삿길의 교착점 역할을 했기에 교통이 낙후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이 장삿길은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돼서 지도에는 이미 사라진 상태이었고,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도 사라진 상태이었다.

대산 밖 평야는 이따금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걸 제외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따금씩 농부들이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는데, 농부들은 깊은 밤이었음에도 등불도 없이 약간 질퍽거리는 밭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줄근한 차림을 한 사람이 소리 없이 농부를 스쳐 산 안으로 들어갔다.

대산에 난 길은 구불구불해서 마치 물고기 내장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행색이 초라한 사내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산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의 겉옷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낡은 헝겊신이 땅을 디딜 때면 마른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산 중턱에까지 올라온 그의 눈앞에는 황량한 산촌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리자 이내 등불이 밝혀진 산장이 보였다.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은 마치 기적처럼 산골짜기에서 나타났다.

행색이 초라한 사람이 손에 든 대나무 막대기를 버리고 발아래 밝게 등불이 켜진 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 감동이 일면서 두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는 이처럼 감동하는 이유는 거대한 산장 뒤에 자신의 정력과 은전, 그리고 많은 사람의 노력을 동원해 세운 무릉도원이 펼쳐져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대산 밖에서 보았던 농부들처럼 말이다.

* * *

경력 10년 깊은 봄, 범한은 처음으로 십가촌을 찾았다. 이곳은 그가 어장이라 불렀던 외진 산촌 마을에 있었다. 이 산촌은 대산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외지고 조용한 곳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검은 밤에도 하늘 위 별빛을 모두 가려버릴 정도로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지는 곳이었다.

이름은 십가촌이었지만 그렇다고 열 개의 집안의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큰 도로가 대산 주변 평야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곳 샘가에 있는 농가 수 만해도 10집이 훨씬 넘었다. 다만 그곳 농부들은 진짜 농부가 아니었다. 대산 안과 밖의 길을 막아 산 안에 숨겨진 비밀을 지키는 순찰자들이었다.

범한은 쉽게 방어선을 넘어 십가촌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세밀하게 계획된 방어선을 만든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감찰원 2처와 6처의 관리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세운 방어선의 위력은 대단했다. 물론 범한이 계획을 세웠을 때 단편적인 부분만 알았던 감찰원 관리들은 자신들이 만든 방어선이 대륙 동북쪽에 위치한 작은 산촌 마을을 지키는 데 사용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산속 좁은 길을 따라 걷고 못을 지난 끝에 남자의 눈앞에 들쭉날쭉하면서 제법 운치가 있는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드러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남자의 얼굴에 별빛이 비췄다. 감동한 얼굴로 산장을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외부 사람이 실수로 이곳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바깥 건물만 보일 테니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산속에 거대한 장원을 지었다고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멈춘 그의 몸이 별빛에 드러나자 십여 개의 쇠뇌의 화살이 어둠 속에서 그를 조준했다.

범한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을 어둠 속에 숨기고는 연의에 달린 모자를 머리를 썼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작은 패를 꺼내 맞은편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쇠뇌의 화살을 향해 보여주었다.

그러자 머슴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더니 조심스럽게 범한 곁으로 다가가서는 그가 내민 패를 한참 동안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내 머슴이 손을 저어 어둠 속에서 살기를 내뿜는 쇠뇌의 석궁들을 흩어지게 했다.

앞장서서 범한을 안내하던 머슴은 산장 청색 돌길을 돌아 외진 곳으로 걸어가더니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두 무릎을 꿇고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사 대인을 뵙니다.”

범한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계년조 첫 번째 요원 중 한 명인 그는 과거 왕계년이 범한을 대신해서 모집한 능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이 밀정은 2년이 넘도록 보지 못한 작은 범 대인이 갑자기 십가촌에 나타나자 너무나도 감격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몇 년 동안 고생했네.”

범한이 머슴 행색을 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은 잠시 알리지 말고 일단은 대행수들을 봤으면 하는군.”

“알겠습니다.”

머슴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도 며칠 전에 오셨습니다.”

범한이 속으로 놀라며 물었다.

“언제 오셨는가?”

“8일 전입니다.”

“얼른 뵈러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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