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908화 (908/1,108)

908화 구멍 (2)

“대인, 이 일은 저희에게만 맡겨서는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대동산의 시체들을 모두 철저한 검증을 끝냈습니다. 감찰원에서 무슨 방법을 쓴 건지 시체 숫자와 명부가 딱 맞아떨어집니다. 물론 당시 산길에 불이 나서 얼굴이 탄 시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걸 가지고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백 살이 넘은 학자 행색의 남자는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 대화는 여전히 하종위의 먼 친척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몇 년 전에 하종위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행동거지가 무척이나 신중해서 이미 하종위의 심복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큰일의 조사도 계획하고 말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대동산을 포위한 정북 진영 병력 중 최소한 몇 천 명이 죽었네. 그러니 감찰원에서 시체 두 구 정도 옮겨서 신분을 위장한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야.”

하종위가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산길에는 불이 났다고 하지만 산 정상은? 대종사들의 싸움이 격렬하기는 했지만, 당시 정경과 예부에 있었던 대인들은 모두 무사히 살아서 내려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왕계년만 죽었단 말인가? 왕계년은 산 정상에서 죽은 건가? 아니면 산을 내려오는 길에서 죽은 건가? 그의 시체가 불에 타지 않았다면 의심스러운 부분은 조사해 볼 수 있을 거네.”

“하지만 이미 3년도 지난 일이라서 시체도 이미 백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이게 왕계년의 무덤이라고 말하면 왕계년의 무덤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자 행색을 한 남자가 비로소 입을 열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짚어줬다.

“그래서 몇 년 전의 일을 다시 조사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고, 영원히 문제를 밝혀낼 수 없는 법입니다. 만약 대인께서 정말 이 일의 진상을 밝히고 싶으시다면 제가 보기에 살아 있는 왕계년과 고달을 찾는 게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하종위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는 자기 모사의 의견이 정확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만일 고달과 왕계년이 동이성이나 북제에서 성과 이름을 숨기고 숨어 있다면 두 사람을 찾아낼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일단이 진행해 보게,”

하종위가 고개를 들고 자신의 먼 친척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정의 체면이 걸린 일이니 조심해야 하네.”

하종위는 조정의 중추로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3년이 되었기에 제법 힘을 모은데다가 더욱이 황제 폐하가 암암리에 그를 돕고 있었다. 물론 범한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먼 친척은 하종위를 대신해서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내밀한 일들을 앞장서서 처리해주고 있었다.

하씨 집안이 청렴하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종위는 조정에서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은전이 필요했고,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는 부하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먼 친척은 이런 방면의 일을 처리하는 데 제격인 사람이었다.

서재 안에는 하종위와 반백 살이 넘은 모사만 남아서 조용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종위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 살아 있는 왕계년과 고달을 찾아서 경도로 잡아 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작은 범 대인께서는 분명 그 두 사람을 보호하려 하실 겁니다.”

모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그럼 황제 폐하의 성정을 봤을 때 이 일이 시끄러워지지만 않는다면 작은 범 대인의 체면을 생각해 없던 일로 묻으실 수 있습니다.”

“대인의 말은······ 그러니까······ 황제를 기만하는 대죄를 저지른 두 사람을 폐하께서 놓아줄 수 있다는 겁니까?”

마음이 복잡해진 하종위가 차가운 눈빛으로 모사를 노려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폐하께서 정말 관용을 베풀어 두 사람을 놓아준다면 자신이 지금껏 한 노력을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중요한 건 작은 범 대인이 두 부하를 위해서 무슨 대가를 지급하느냐는 것이지요.”

모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은 범 대인이 부하들을 끔찍이 아낀다는 건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면서까지 두 사람을 지키려 한다면 폐하께서 뭘 어쩌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을 죽이려 하시겠습니까? 대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작은 범 대인은 폐하의 친아들입니다.”

“친아들이니 어찌하지 못할 거라는 겁니까?”

하종위가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황태자와 2 황자도 폐하의 친아들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두 분도 폐하의 친아들이었지요. 하지만······ 황태자와 2 황자는 병력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황제 폐하에게 동이성을 안겨 드리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모사는 2 황자라는 세 글자를 말할 때 목소리를 살짝 떨다가 재빨리 다시 작고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 영토를 두 부하의 목숨과 바꾸는 거라면 폐하께서도 용인하실 겁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종위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을 본 모사가 다시 차분히 설명했다.

“폐하와 작은 범 대인의 사이가 틀어지게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폐하의 마음속에 가시를 박아 넣을 수는 있습니다.”

고개를 저은 하종위가 눈을 뜨고 앞에 있는 모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범무구 대인은 원래 2 황자의 여덟 가문의 장수 중 한 명이셨지요. 2 황자가 저세상 사람이 되는 바람에 제 밑으로 들어오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저희 두 사람의 목적은 일치합니다. 범한이 죽지 않으면 저는 죽을 테고, 대인은 2 황자의 복수를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되실 테니까요.”

이 반백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늙어 보이는 모사는 과거 2 황자의 여덟 가문의 장수 중 한 명인 범무구였다. 당시 2 황자와 범한이 경도에서 싸움을 벌였을 때 여덟 가문의 장수들은 모두 죽었지만, 범무구는 예외였다. 그는 오래전에 범한의 세력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2 황자에게 소용없다고 충고한 뒤 멀리 떠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뒤 2 황자가 독을 먹고 자살하자 범무구는 경도로 돌아와 하종위 밑으로 들어가 복수를 위한 칼날을 갈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범무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 일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싶다면 남몰래 진행하지 말고 조정과 민간이 모두 알도록 떠들어야 합니다. 폐하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하는 분이시니 상황이 그렇게 되면 작은 범 대인이 어떻게 나오든 폐하의 손에 검이 쥐어지게 될 겁니다.”

“폐하가 정말 왕계년과 고달을 죽인다면 범한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하군요.”

하종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와 궁정 말고는 감찰원이 숨긴 두 사람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범무구가 평온한 눈빛으로 하종위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인이 만약 암암리에 황제 폐하께 이 일을 알릴 생각이시라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네? 왜 그래야 합니까?”

하종위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하면 대인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추측과 분석뿐이니까요. 물론 이런 추측과 분석으로 황제 폐하가 의심하게 할 수는 있겠지요.”

범무구가 다시 하종위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작은 범 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시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인을 의심하실 겁니다.”

“저는 조정과 폐하에게 일념 단심으로 충성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하종위가 입술을 힘껏 오므리자 범무구가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폐하께서는 대인이 일부러 폐하와 작은 범 대인의 부자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다고 의심하실 겁니다.”

그 말에 하종위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침묵하다가 가볍게 말했다.

“만약 폐하께서 정말 저를 의심하게 되신다면 더는 저를 두둔해주지 않으시겠지요. 대인이 보기에 그러면 제가 어찌 될 거라 생각되십니까?”

“폐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봤을 때 아마도 3년쯤 뒤에 적당한 이유를 찾아 대인을 경도 조정에서 쫓아낸 뒤 어디 외진 지방으로 발령을 내실 겁니다. 그런 뒤 평생을 아무런 포부도 없는 평범한 관리로 살아가게 하시겠지요.”

범무구가 담담하게 설명하자 하종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침착함과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만일 나서면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고, 나서지 않으면 온몸이 부서져 죽을 수 있다면 대인께서는 뭘 선택하시겠습니까?”

그가 범무구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전자를 선택할 겁니다. 최소한 살아남을 수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범한의 경우 정말 폐하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면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범무구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두운 서재 안에서 백발인 그의 머리가 불빛이 비쳐 눈을 자극했다.

“대인은 꼭 황제 폐하에게 원한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범무구의 지적에 하종위는 겉으로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온갖 감정이 용솟음쳤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황제의 성은에 감사해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만약 황제가 자신에게 범한에 대항하는 역할을 맡기지 않았으면 자신이 조정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져 비참한 말로를 맞이할까 걱정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해 2 황자 저하께서 처하신 상황은 대인의 지금 상황과 다르지 않았었습니다.”

범무구가 살짝 실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2 황자 저하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 폐하에게 오로지 충성하는 마음만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왕계년과 고달 일을 폭로했을 때 황제 폐하께서 대인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 범한에게만 화를 입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항상 일편단심으로 폐하께 충성을 해왔습니다.”

하종위가 침착하게 대답하며 범무구의 눈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하종위는 범무구가 뭘 떠보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죽은 2 황자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한 범무구에게 범한은 복수를 해야 하는 목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무정하고 냉혈한 황제 폐하 역시 범무구에게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하종위가 살짝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범한을 건드는 것도 저와 대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지요. 그러니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을 건들겠다는 건, 심지어 그 사람을······ 죽이겠다는 건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종위의 한기 서린 말을 들은 범무구는 천천히 고개를 숙일 뿐 격렬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아무 말 없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 보고하기 전에 더 확실하게 조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지요. 좋습니다. 이제 밤이 깊었으니 먼저 들어가 쉬십시오.”

하종위가 가벼운 말투로 말하며 나가라고 손을 휘젓고는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런 하종위를 바라보는 범무구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인사한 뒤 나갔다. 범무구가 서재를 나가자마자 하종위가 손에 든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서재 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2 황자의 심복이었던 여덟 가문의 장수 중 한 명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하종위는 무척이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경도에서는 범무구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많으니 나중에 이 일을 누군가가 알고 황궁에 전한다면 황제 폐하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인물 중 한 명인 2 황자의 심복을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인 건 하종위가 확실히 모험한 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