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화 태학 안에 등장한 검은 우산과 콧대 위에서 반짝이는 빛 (2)
검은색 우산을 접어서 문 옆에 두자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바닥에 일(一)자를 그리고, 높은 나무 문 문턱을 적셨다. 범한이 교원이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젖은 머리를 대충 닦은 뒤 안으로 들어가서는 책상에 앉아 있는 대학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대인을 뵈러 왔습니다.”
코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은 대학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범한을 알아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 조용히 숨어서 쉬려고 하는데, 대인께서 방해하려고 오신 겁니까?”
지금 문하중서는 호 대학사를 수장으로 하고 있었다. 폐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서 정력도 한창때와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단념한 듯 이전처럼 자신이 일일이 다 살펴보려 하지 않고 정사 중 대부분은 문하중서에 넘겨 처리하게 했다. 이러한 연유로 문하중서는 권력이 더욱 커졌고, 더욱 바빠졌다. 이에 눈치가 빠른 관리들은 문하중서가 과거 재상처럼 변하고 있으니 곧 있으면 대학사들의 수장인 호 대학사의 권력이 전임 재상인 임약보처럼 커질 거라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범한이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황제 폐하는 천신만고 끝에 장인어른인 임약보를 강제로 물러나게 했으니 또 다른 임약보가 조정에 출현하는 모습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다만 범한은 호 대학사가 매일 정사에 시달려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허리를 굽혀 말했다.
“의논한 일이 없었다면 저도 대인을 귀찮게 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호 대학사와 범한은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문학 개선 운동에서 두 사람의 입장이 일치하는데다가 서로 성격도 맞아 자주 개인적으로 만났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호 대학사가 범한에게 큰 도움을 준데다가 범한이 나중에 앞장서서 호 대학사의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이었다.
“말해 보십시오.”
호 대학사가 손에 들고 있던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무언가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좋은 일은 아니겠군요.”
멋쩍게 웃은 범한이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책상에 놓인 안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정 안경은 사용하기 편하십니까?”
호 대학사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은 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범한은 문관의 수장인 그의 눈에 작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2년 전에 호 대학사가 우연히 한번 언급한 일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범한은 황실 금고에서 오랜 시간 연구를 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이성에서 서양에서 만든 수정을 구해 유일무이한 안경을 만들어 호 대학사에게 주었다.
안경을 받은 호 대학사는 이 일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눈이 좋지 않아서 매일 밤낮으로 정무에 시달리며 상주문을 검토해야 하는 일이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수공업으로만 만들어야 하는데다가 시력을 측정하는 기계도 없는 탓에 범한은 안경이 노안이 온 호 대학사의 눈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좋습니다. 아주 편해요.”
호 대학사가 웃으며 말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안경을 받았으니 무슨 일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소공야께서 제게 폐하의 뜻을 거역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말문이 막힌 범한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범한은 겉보기에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호 대학사가 이처럼 신중하고 교활한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호 대학사는 능력을 갖춘 범한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면 분명 조정 내부의 문제일 거라고 짐작했고, 그래서 범한의 허점을 파고드는 교활한 말을 한 거였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문을 막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호 대학사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자 범한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경도 부윤 손경수는 썩 괜찮은 벼슬아치 입니다······.”
호 대학사는 순간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쓰다듬던 턱수염을 몽땅 뽑을 뻔했다. 범한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줄 몰랐던 호 대학사가 마른기침을 했다. 문관들의 수장인 호 대학사는 당연히 경도 부윤이 현재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하종위를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대학사인 그도 어쩔 수 없이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 대학사가 탐색하듯이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 대인은······ 과거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믿고 소공야를 직접 잡으려 한 사람이 아닙니까?”
호 대학사와 탐색전을 벌일 여유가 없는 범한이 그의 옆에 앉아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는 그 집 아가씨와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그래도 손 대인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폐하의 뜻입니다.”
호 대학사가 거리낌 없이 직접적으로 폐하를 거론했다.
범한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종위가 혼자 날뛰는 것일 뿐 폐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그 말에 호 대학사가 웃었다. 범한은 뻔뻔스럽게도 경도부 일이 폐하의 뜻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폐하와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고 있었다.
범한이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하나만 묻겠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손경수의 근무 성적이 어떠합니까?”
“그 사람은······.”
호 대학사가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3년 중 2년은 중상급 정도였고, 남은 1년은 그냥저냥 평범했습니다.”
경도부는 무척이나 중요한 곳인 만큼 3년 동안의 근무 성적을 호 대학사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이에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범한이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저냥 평범했다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대학사께서도 경도 부윤이라는 자리가 쉽게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 저택에 미움을 사지 않으면 저 관아에 미움을 사야 하는 자리이니 근무 성적이 좋을 수가 없지요.”
범한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넌지시 말했다.
“매집례 대인도 과거 경도 부윤에 계실 때 평범하다는 평가만 받으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목을 문지르며 계속 설명했다.
“그러니 손경수 대인이 2년 동안 근무 평가가 중상급이라는 건 상당히 유능한 관리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손경수 대인은 사사로이 당파를 만들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니 정말이지 얻기 힘든 인재라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잠자코 있던 호 대학사가 결국 자기 양심의 외침을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경도 부윤이 있기가 어려운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손경수는 정말이지 얻기 힘든 관리였다. 그러니 손경수가 만약 계속 경도부를 책임져준다면 호 대학사가 일을 처리하는 것도 훨씬 수월할 거였다.
“만약 그를 쫓아내면 누굴 대신 앉힐 생각이십니까?”
범한이 정색하며 물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온 건 사사로운 정이나 투기 때문이 아니라 이걸 묻기 위해서입니다. 대학사는 이후에 경도부에서 3년 동안 부윤에 다섯 번 바뀌는 모습을 또 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다가는 나라 상황이 어지러울 때 나서려 하는 사람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호 대학사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도 손 대인이 물러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사실 황궁에서 무슨 이유로 손 대인을 압박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투덜거리던 호 대학사가 범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분에게 또 맞서려 하시는 겁니까?”
지금 천하에서 황제 폐하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범한 밖에는 없었다.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서려는 게 아닙니다. 대학사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이번 일을 이용해 하종위 대인의 권위를 세워주려 하시지만, 손경수 대인은 제 사람인데다가 너무 바보처럼 행동하셔서 보호해 주려는 것뿐입니다.”
“방금 전에 사사로운 정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하시고는 이제는 대인의 사람이라 말씀하시는군요.”
호 대학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만약 제가 이 일에 나선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대인이 등을 떠밀었다고 추측하실 겁니다······. 게다가 하 대인은 상당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까. 대인께서는 어째서 그와 싸우려 하시는 겁니까?”
범한이 한참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싸움이니까요. 동풍은 서풍을 압도하지 못합니다. 항상 서풍이 동풍을 압도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지요. 저는 하종위에게 조금의 희망이나 가능성, 행운도 갖게 하고 싶지 않으며, 단 한 차례의 성공도 쥐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호 대학사가 범한의 단호한 말에 한기를 느끼며 물었다.
범한이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일은 황제의 압박을 받는 그가 자신의 권력을 조금 더 지키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오늘 밤에 입궁해서 폐하께서 뜻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게 할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경도부 문제는 문하중서의 압박에서 비롯된 것이니 대학사께서 저를 도와 함께 맞서 주셔야 합니다.”
호 대학사는 범한의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경수처럼 능력 있는 관리가 불필요한 권력 싸움 때문에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유지요.”
호 대학사가 입을 열기 전에 범한이 천천히 다시 말했다.
“태학은 훌륭한 교육기관입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훗날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되겠지요. 그러니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 말고도 조정의 진짜 상황을 이용해 학생들이 올바른 신념을 세우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관리는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범한이 호 대학사를 빤히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만약 손경수 대인이 이렇게 쓰러져 버린다면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대학사가 책에서 한 말이 얼마나 와 닿을 수 있겠습니까?”
범한의 말에 궁지에 몰린 호 대학사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소공야가 하겠다고 말하면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아마 소공야는 태학에서의 위세를 이용해 학생들을 선동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이에 고민을 거듭하던 호 대학사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말했다.
“좋습니다. 폐하께서 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신다면 제가 손 대인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범한은 비로소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잡고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호 대학사가 책상에 놓인 수정 안경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안경에도 많은 정이 담겨 있지만······ 제가 돌려드린 정이 더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원하는 대답을 얻어 기분이 좋은 범한이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까짓 거 황실 금고에서 몇 개 더 만들게 해서 대인 집안 분들에게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범한의 은은하게 조롱이 담긴 후안무치한 말에 호 대학사가 웃으며 버럭 화를 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학정 대인이 며칠 전에 제게 소공야께서 언제쯤 동이성 일을 마치고 태학으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실 수 있냐고 묻더군요.”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돌아올 생각입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사실 오늘 태학을 방문해 학생들을 보니 범한은 이전 세계에서 자신이 학교에 다녔던 때가 떠올라 기분이 정말 좋았다. 게다가 여기 학생들은 분명 훗날 경국의 근간이 될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만약 미리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목숨을 지킬 무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