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화 태학 안에 등장한 검은 우산과 콧대 위에서 반짝이는 빛 (1)
범한이 술잔을 들어 자리에 있는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경도부를 좀 내버려 두십시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범한이 공개적으로 이 일에 나섰다는 걸 알아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사람들이 천천히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쭈뼛쭈뼛하며 마지못해 든 것이기는 했지만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술잔을 들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위행동은 정말이지 난처했다. 그는 범한이 한번 미움을 산 사람은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범한이 겉으로는 온화하게 말했지만, 마음속에는 상당한 분노를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오늘 자신이 용서를 구하고 뒤로 물러난다고 해서 범한이 자신을 정말 용서해 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호부 상서로서 체면과 지위가 있는데 함부로 고개를 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황제 폐하와 하종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와중에 뒤로 물러나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범한이 곁눈질로 위 상서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모두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기는 하지만 사실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자손과 가족을 위해서 좋은 미래를 준비할 생각조차 할 수 없지요.”
“폐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약간의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요.”
그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격려하는 말투로 말했다.
“본관은 항상 마음속에 두 가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예부 상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가장 먼저 술잔을 든 사람으로 위동행과는 달리 범씨 집안이 미움을 산 일이 없었기에 범한과 가까워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남몰래 위동행이 작은 범 대인이 어떤 성정을 가진 인물이고, 또 어떤 수단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인지 모른다고 비웃고 있었다.
예부 상서는 위동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감찰원은 원칙적으로 3품 이상의 관리는 건들 수 없었으니, 위동행은 폐하가 직접 지시하지 않은 이상 작은 범 대인이 호부 상서인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부 상서의 눈에는 위 상서가 지난 역사를 잊은 사람처럼 보였다.
범한은 지금보다 가진 권력이 없었을 때도 과거 예부 상서였던 곽유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었고, 이후에 많은 상서들을 쓰러뜨렸었다. 게다가 심지어는 황태자까지 사지로 몰아넣은 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서인 위동행이 고집을 부리며 범한과 반대편에 서려 하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예부 상서가 범한을 향해 간드러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공야께서는 무슨 두려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폐하와 부모님께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한이 손가락을 움직여 들고 있는 술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경솔하게 행동하기 쉽지요······. 제가 지난날에 경솔하게 행동했던 점에 대해 대인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자리에서 또다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모두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하게 이해했다. 갑자기 두려움을 말하는 이유가 뭘까?
소공야는 모두에게 부모와 폐하 외에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도 잊지 말라고 경고하려 하는 거였다. 그리고 과거 소공야의 행동은 경솔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의 행동은 경솔하다 못해서 그야말로 음험하고 악랄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말 자체는 수준 낮은 위협이었지만, 위협을 한 인물을 상당한 권력을 가진데다가 능력과 명성도 겸비하고 있었다. 더욱이 범한이 두려움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자손과 가족을 언급한 이유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설사 감찰원이 상서와 시랑은 건들지 못하더라도 그들 집안의 사람들은 아주 손쉽게 지옥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만하고 방자하고 난폭한 발언이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범한을 누가 건들 수 있겠는가. 안색이 점점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위동행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억지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밉다고 죄 없는 내 가족들을 건들겠다는 건가?’
하지만 사람들 모두 범한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 범 대인은 시선이라 칭송을 받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줄곧 도리를 따지지 않고 치졸하고 포악한 짓을 해왔으니 말이다.
위동행이 결국 술잔을 천천히 들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술맛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술잔을 들고 말했다.
“모두를 먹고 마십시다.”
* * *
자리에 남은 대신들, 특히 범한에게 적나라한 위협을 받고 무시를 당한 호부 상서가 신나게 먹고 마실 기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범한은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예정보다 일찍 손씨 집안을 떠난 범한은 임완아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탄 검은 마차는 북성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태학으로 가자.”
범한이 목풍아에게 지시했다.
“호 대학사는 오늘 당직이 아니니 태학에서 강연을 하고 있을 거야.”
목풍아는 알겠다고 대답할 뿐 작은 범 대인이 급히 호 대학사를 만나려는 이유를 고민하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범한이 골치가 아픈 듯 주름 잡힌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손씨 집안에서 한 행동은 적절하지 못했지만, 그는 반드시 그런 태도를 보여야만 했다. 게다가 손씨 집안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곧 경도 전체에 퍼질 테니 그 이전에 서둘러서 후속 조치를 처리해야만 했다.
그는 오늘 밤에 입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입궁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호 대학사를 만나야 했다. 만약 수령 대학사인 그를 설득해서 폐하와 정면으로 맞서게 할 수 있다면 범한은 든든한 뒷심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 * *
검은색 마차가 동천로 입구를 지나자 범한이 자신의 집안이 운영하는 서국과 의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태학의 고풍스러운 대문이 나타났다.
안에 건물들이 듬성듬성 세워진 태학은 거리와 인접한 부근에 관아나 명당과 같은 건물도 없었고, 높은 담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것처럼 활짝 열려 있는 대문 위에는 푸른 나무의 가지가 드리워 있고, 각 건물에 있는 서생들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한마디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태학은 추밀원처럼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추밀원은 과거 옛 군부가 군사원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추밀원으로 바뀐 탓에 아직도 6부 안의 병부와 뒤섞여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다. 경국은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 신정을 펼쳐왔고, 그 과정에서 태학도 동문관이나 교육원 등 여러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아무도 황제 폐하에게 왜 이렇게 자주 명칭을 바꾸는 거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다만 태학이 이름을 뭐라고 바꾸든 천하의 서생들에게 이곳은 항상 태학이었고, 조정의 공문에서도 이 점을 인정했다. 각 주와 군에서 선발된 뛰어난 인재들과 경도 권문귀족 집안의 우수한 자제들이 이곳 건물들이 즐비한 이곳에 모여 경사와 치세의 도를 배웠다.
태학은 경국의 학문의 보고인 만큼 가장 뛰어난 인물들만 이곳 선생으로 뽑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천하제일 명필가라 불리는 대서예가 반령 선생이라던가 현재 문하중서 대학사로 있는 하 종위의 스승 증문상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또 몇 년 전까지 서 대학사도 태학 선생직을 겸임하고 있었고, 지금 조정 문관들의 우두머리인 호 대학사도 자주 태학에 와서 학생들에게 강연했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데다가 태학이라는 특수한 지위 덕분에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앞날이 무척이나 밝았다. 그래서 그런지 태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품행이 약간 건방졌고, 일반 관아들은 태학과 되도록 접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경국이 약간 개방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는 탓에 일반 대신들은 태학 학생들이 자신에게 다가와 질문을 할까 봐 두려워 죽어도 태학에는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로 태학에 들어오면 항상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다니다가 학생들을 보면 무슨 귀신을 본 것처럼 뿔뿔이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범한은 단 한 번도 이런 걱정은 한 적 없었다. 그는 태학 학생들과 항상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특히 경력 4년 그가 태학에서 학정의 조수로 재직하게 된 뒤로 관계는 더욱 좋아졌다. 이후 시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북제에서 장 대가에게 증여받은 책을 태학에 보내면서 그는 태학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지위가 높아졌고, 학생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마차가 태학 정문에서 천천히 멈추자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학관이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린 범한이 고개를 들고 반년 동안 오지 않았던 대문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 예스럽고 수수한 대문은 사실 나중에 다시 세운 것으로 일부러 예스러운 맛을 내기 위해 상당한 양의 은전을 들여야 했었다. 그 이유는 경국이 학문 분야에서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함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산산이 내리는 빗방울이 색이 짙은 태학 대문에 흐르면서 얼룩덜룩한 문양을 만들어내고 바닥에 깔린 돌판에 고이기 시작했다.
계년조 조직원이 아무 말 없이 마차 안에서 연의를 꺼내 어깨에 걸쳐주려 하자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범한은 비록 검은색 연의를 입을 걸 무척 좋아했고, 특히 가장 믿는 심복들과 함께 연의를 입고 어두운 밤거리에 귀신처럼 음산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 태학에서 굳이 연의를 입어 열정적이고 순박한 학생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목풍아가 우산을 들고 그와 함께 태학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이미 오후 시간이라서 태양이 서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는데다가 먹구름이 끼어 하늘색이 어둡게 변해 있었다. 넓은 정원 안에는 맑고 그윽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푸른 나무 아래를 걸어가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아 넓은 정원 안이 무척이나 조용했다.
천여 명의 태학 학생들은 지금 수업하고 있다는 걸 아는 태학 교수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책을 읽는 소리가 왜 들리지 않는 거지?’
바로 그때 꿀벌이 갑자기 집단행동을 하거나 산바람이 좁은 동굴에 갑자기 들어오는 것처럼 조용하던 태학 정원에 ‘웅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커졌는데, 알고 보니 무수히 많은 사람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서 난 소리였다.
수업이 끝나자 수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동시에 태학 각 건물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이 정중앙에 놓인 길을 따라 빼곡하게 모여서 함께 걸어가자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정원 안에 활기가 가득해졌다.
몇몇 우산을 가져오는 걸 잊은 학생들은 내리는 비에 아우성을 치며 젖은 청색 돌판 위를 껑충껑충 뛰어서 자신이 생활하는 학사로 뛰어갔다. 물론 학생들 대부분은 조용히 미소 지은 얼굴로 우산을 쓴 채 천천히 걸어갔다. 일순간에 정원 안에 무수히 많은 각양각색의 색깔을 지닌 우산들이 펼쳐졌는데, 밝은 색은 없고 대부분 옅은 푸른색이나 회색과 같이 눈에 띄지 않은 색들이었다.
눈에 띄길 원치 않았던 범한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쓴 검은색 우산은 옅은 색 우산의 물결 속에서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검은색 우산에 쏠렸다.
“작은 범 대인!”
“스승님!”
“선생님!”
학생들이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는 서둘러 인사를 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멀리서 범한을 지켜봤지만, 운이 좋게 장 대가의 경사를 편집하는 일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일부러 큰 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다행히도 학생들이 몰려들어서 길이 막히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학생들도 평소 조정일로 바쁜 범한이 특히 최근에 동이성의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애써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고는 문안 인사를 올린 뒤 길을 열어주었다.
범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화답한 뒤 일면식이 있는 학생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그가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하고는 태학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범한과 뒤를 따르는 감찰원 관리를 본 태학 학생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며 작은 범 대인이 오늘 태학을 방문한 이유를 추측했다.
‘설마 동이성 일 때문에 이곳에 오신 건가? 혹시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에게 태학을 주시려 하는 건 아닐까? 계속 강의하러 오실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