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화 차 한잔에 담긴 뜨거움과 차가움 (3)
다만 관리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너무 노골적으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집사들을 시켜 선물을 보낸 뒤 손씨 집안 주변에 머물면서 지켜보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지 못해 답답해했고, 무엇보다도 근 2년 동안 잠잠했던 소문이 혹시나 사실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담박공 범한이 직접 이곳을 찾아올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범한의 신분상 경도부와 거리를 두는 게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교활한 관리들은 이 점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 * *
“저거 어느 집 가마지?”
아무 의미 없는 한담을 늘어놓던 집사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손씨 집안 대문을 향하는 큰 가마를 바라보았다. 사람 수나 문약을 보았을 때 품계가 높아 보여 저절로 호기심이 생겼다.
경도 부윤이 바뀌게 될 거란 일은 아직 소문에 불과했지만, 관리들은 이번 일이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하종위 대인이 처음으로 황제 폐하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진행하는 인사이동은 영향력도 상당할 것이었다. 이에 눈치가 빠른 각 부의 관리들은 재빨리 하종위의 옆에 섰고, 아무도 하 대인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지 않았다.
오늘 열리는 생일잔치는 편을 정할 가장 좋은 시기였다. 게다가 모두들 젊고 온화한 하 대학사와 친해지고 싶어 했기에 손씨 집안 대문은 찾는 사람이 없어 적막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눈길을 끄는 가마 한 대가 손씨 집안 대문에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본 이부 시랑 집안 집사가 비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정사에 참여하지 않는 집안에서 눈치 없이 왔나 보군.”
이부 시랑과 하종위는 관계가 무척이나 돈독해서 이 일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생일잔치에 참석하지 않았고, 심지어 집사의 말투에도 옅게 조롱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자 어느 집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상한데, 유씨 국공가의 가마인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국공가 거리에서 온 집사들이 재빨리 난간 옆으로 달려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손씨 집안 대문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점점 안색이 변하던 국공가 집사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다른 집사들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몰래 찻집을 떠났다.
찻집 안에 남아 있는 다른 집사들은 이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손씨 집안 대문을 바라봤다. 모두들 정사에 참여하지 않는 유씨 국공가가 어째서 굳이 몸을 낮춰 손씨 집안 체면을 세워주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신분이 아주 높은 고관대작들이 타는 팔인교 가마가 천천히 북성 방향에서 오더니 손씨 집안 대문 앞에 멈춰서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방금 도착한 유씨 국공을 집안으로 안내하던 경도 부윤 손경수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찻집에 있는 집사들이 토끼 눈을 하고는 소리쳤다.
“정왕야께서 오셨어!”
이 말이 나오기 무섭게 왁자지껄하던 찻집이 조용해지면서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풍겼고, 집사들은 아무 말 없이 눈만 데구루루 굴리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눈앞에 펼쳐진 이 놀라운 광경이 의미하게 무엇인지 추측하고 있었다.
총명한 사람들은 이미 신분이 존귀한 유씨 국공과 정왕야가 단순히 경도부를 위해서 이곳에 나타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어서 머릿속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다른 인물이 떠오른 집사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소리 없이 찻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집사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손씨 집안 대문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자신의 눈을 믿을 수도 없었고, 손경수가 저 두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건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색 마차 두 대가 남성 대로를 따라 천천히 들어오더니 찻집을 지나 손씨 집안 대문 앞에 멈췄다.
검은색 마차는 눈에 띄는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찻집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젊은 공야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들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은 화려한 옷을 입은 군주가 공야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모습이었다······.
순간 찻집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모든 집사들이 쏜살같이 찻집을 나와서는 자신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본 상황을 빨리 주인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작은 범 대인이 왔고, 신 군주도 왔고, 심지어 정왕야와 유씨 국공도 왔는데······ 집에서 가만히 있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당장 빨리 손씨 집안을 찾아가라고 주인께 알려야 했다. 설사 담박공이 하종위의 체면을 깎으려고 꾸민 일일지라도 선물을 들고 눈도장을 찍어야 훗날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
일순간에 경도 남성에 있는 관리 저택들이 시끌벅적해졌다. 모두들 옷을 찾아 입고 몰래 정보를 주고받으며 새로 선물을 준비했다. 모든 관리들의 목적지는 단 하나 손씨 집안이었다.
이번 일과 아무 관련 없는 관리들은 소공야가 손씨 집안에 찾아간 이유가 무엇일지 추측하면서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어했다. 경도가 너무 오랫동안 조용했던 탓에 모두들 이번 일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작은 범 대인이 어떻게 대학사와 각 부 대인들을 어떻게 우롱하는지 보고 싶어 했다.
* * *
경국은 효를 중시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영민하고 무예도 뛰어난 황제 폐하는 국고의 은전을 대량 동원해 죽은 황태후의 능묘를 세우는 데 사용했다. 당시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는 형식적으로라도 나랏돈을 많이 동원하는 데 우려를 표시했지만, 범한은 이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손경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생일잔치를 마련한 날인만큼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더구나 그는 생일잔치를 핑계로 마침내 용기를 내어 범한을 초청했다. 다만 정말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작은 범 대인이 신 군주의 손을 잡고 저택 대문으로 들어왔을 때 손경수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기가 어려웠다.
사실 몇 달 동안 그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마냥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조정의 모든 관리들과 관아들이 자신이 몰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고심하던 그는 범한을 떠올렸지만, 손씨 집안과 범씨 집안이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기에 자신을 도와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범한이 돕겠다 나선 것이다. 손경수는 딸에게 죄책감이 들어 입 안이 쓰고 마음이 우울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범한을 향해 웃으며 공손하게 두 부부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저택 안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여자 손님들은 후원으로 가 있었고, 앞채에는 경도부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앉아 있었다. 다만 조정 고위 인사들을 위해 일부로 비워둔 자리가 텅텅 비어 있는 게 눈에 거슬렸다.
손경수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온 범한은 텅 빈 탁자를 바라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임완아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몇 마디 말을 하고는 유모들을 데리고 손씨 집안 부녀자들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후원으로 갔다.
범한은 서쪽 사랑채를 돌아 손경수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이때 이미 정왕야와 유씨 국공이 도착해 있다는 걸 알았다. 존귀한 신분인 두 사람은 지금 손 대인의 모친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연장자의 체면을 생각해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주 조용한 서재 안에서 범한이 손경수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손 대인은 아무래도 영리하신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아직 생일잔치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작은 범 대인을 푸대접할 수 없기에 손경수는 직접 그를 데리고 서재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종들이 아직 차를 준비해 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범한이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하자 손경수는 마음이 움찔해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제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범한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은 원래 성심을 추측해 이용하려는 분이 아니셨으면서, 올해는 어째서 반대로 행동하시려는 겁니까? 제 세력을 이용해 관료 사회의 동정을 보려는 이유가 뭡니까? 대인은 권력과 부귀에 집착하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이번 일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손경수가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말했다.
“경도 부윤으로서 스스로에게 어찌할지를 물어 결정한 일이니, 대인께서도 가엽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범한은 마치 그 안에 담긴 분수를 가늠하는 것처럼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 역시 손경수가 직접 요청해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담판을 짓는 걸 좋아하는 범한이 잠시 뒤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대인을 대신해서 황궁에 말을 해보겠습니다.”
“하 대인 쪽에 대해 말씀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손경수는 매우 기쁜 마음을 애써 숨기며 겉으로는 차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목소리를 살짝 떨리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살며시 감으며 말했다.
“그는 도찰원 좌도어사가 아닙니까. 저도 그를 건들 능력은 없습니다.”
손경수가 마음이 살짝 떨렸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살며시 웃으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문하중서 사람이지요. 만약 호 대학사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가 경도 부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서재 안의 대화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범한은 손경수에게 자신 앞에서 목숨을 바치겠다느니 하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손경수를 돕기로 한 이상 손경수의 목숨은 이제 범한의 것이었다. 경도 부윤은 한가로운 자리가 아니었지만, 이제 손경수는 관료 사회에서 범한의 뒤통수만 바라봐야 했다. 그에게 이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었다.
범한과 손경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손씨 집안 집사와 종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린 채 저택 밖에서 줄을 지어 들어오는 가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정에서 명망이 높은 관리들이 하나 같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생일을 축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은 속으로 대인들이 모두 어디를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종이 재빨리 서재로 달려가 사실을 알리자 손경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관리들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이유가 모두 작은 범 대인과 정왕야, 그리고 유씨 국공이 친히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손경수가 속으로 씁쓸해하고 있다는 걸 아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관료 사회라는 것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곳입니다. 경도 부에서 오래 계셨으니 이런 일도 덤덤히 넘길 줄 아셔야지요. 이런 일에 속을 끓이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손경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범한의 훈계를 받아들였다.
* * *
대청에 탁자 세 개가 놓이고 모든 부녀자들은 후원에서 자유롭게 있었다. 후원에 간 범한이 임완아를 따라 손씨 집안 노부인과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돌아왔다.
상석 중앙 주인 자리가 잠시 비자 정왕야가 자연스럽게 가장 존귀한 자리에 가서 앉았고, 유씨 국공은 두 번째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평생 알고 지낸 두 사람이 약간 먼 자리에 띄어 앉아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자 꼭 말싸움하는 것처럼 들렸다.
정왕야가 평소처럼 ×××하며 상스러운 말들을 섞어서 말하자 대청 안 세 가지 탁자에 앉아 있는 관리들은 살짝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유씨 국공은 과거 군대에서 있었던 사람답게 익숙하게 정왕야의 말을 받아쳤다.
손경수는 이때 나머지 관리들을 접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범한은 정왕야와 유씨 국공 사이에 앉아서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정왕야와 범씨 집안은 2대에 걸쳐 교류를 이어온 사이였기에 무척이나 친했고, 유씨 국공의 경우 유씨의 친아버지였으므로 엄연히 말해서 범한의 외할아버지였다. 이에 범한도 깍듯하게 상대방을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