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화 아까운 노력
서재 안에서 잠시 기다리자 목풍아가 자신의 당숙인 목철을 데리고 들어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범약약이 재빨리 후실로 몸을 피했다.
범한이 땀으로 범벅이 된 1처 수령 목철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동이성에 있더라도 경도 안에 큰 변동이 있으면 재빨리 보고를 해서 알려야 할 게 아닌가.”
이미 조카의 입을 통해서 자초지종을 들은 목철은 작은 범 대인이 경도 부윤 일을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는 길에 보고할 내용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은은하게 불쾌한 기색이 담긴 작은 범 대인의 목소리를 듣자 목이 메서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직접 정리한 보고서를 범한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보고서를 읽는 범한의 미간이 점점 주름이 지어지고 나중에는 한숨까지 쉬었다.
범한이 동이성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몇 개월 동안 경도 안에서는 변화가 일었고, 손경수뿐만 아니라 다른 관리들까지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호부, 이부가 암암리에 관리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구체적으로 조사한 사항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감찰원에서 오래 일한 범한은 어떤 관아든 청옥처럼 완벽하게 깨끗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먹고 조사를 시작한다면 어떤 혐의든 찾아낼 수 있었다. 경도 관아들은 몇 부가 연합해서 암암리에 하는 조사에 견디기 힘든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면 당장 버티지 못하게 될 거였다. 이런 상황은 변화가 민감한 관리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조정 문무 대신들은 힘들어 하는 관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냉정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경수가 갑자기 생일잔치를 열 생각을 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마도 손경수는 황궁의 뜻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규정대로 차근차근 진행되는 조사가 실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사전 준비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그는 생일잔치를 열어서 황궁의 뜻을 분명하게 확인하려 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부윤 대인이 그동안 엄숙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오셨는데. 물론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줄을 잘못 서기는 했지만, 그건 일종의 착오에서 비롯된 일이었잖아. 그걸 아니까 폐하께서도 3년을 참고 봐주신 게 아닌가?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건 여전한 것 같군. 황궁의 뜻이 뭔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경도 부윤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범한은 관료 사회에 이런 풍파가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을 한눈에 파악했다. 손경수를 포함해서 관련 관리들은 사실 꼬리가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손경수가 마지막에 큰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황제 폐하의 유지를 거스르는 쪽에 섰듯이 이번에 풍파에 휩싸인 관리들은 모두 경도 반란에서 떳떳하지 못한 행태를 보여 기회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줄곧 눈엣가시처럼 이들을 바라보던 폐하는 반란 뒤 3년이 지나 상황이 안정된 지금 비로소 이들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거였다.
경도 조정이 안정되었으니 처리할 건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황제 폐하로서는 과거 충성스럽지 못했던 괘씸한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범한의 안색을 살피던 목철이 마른침을 삼켜 목을 가다듬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겉으로는 호부와 이부가 조사를 시작한 걸로 보이지만, 분명 문하중서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목철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경도 부윤이 교체하는 것은 황궁의 뜻이라는 점과 손씨 집안 아가씨를 도우려 하다가 황제 폐하와 갈등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지금 상황에서 황제 폐하와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경도 부윤을 지켜주기 위해서 갈등을 빚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는 단지 손경수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할 뿐 죽일 생각은 없으니 이만하면 폐하가 그동안 쌓아온 분노를 전부 발산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범한의 머릿속에 과거 황제 폐하가 손경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그와 약속했던 게 떠올랐다. 물론 그 약속을 하자마자 황제 폐하는 바로 마음을 바꿨겠지만, 그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문하중서가 직접 나서게 할 수는 없을 거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상황을 가늠하던 범한이 물었다.
“호 대학사께서 이 일로 무슨 말씀을 하신 게 있는가?”
지금 문하중서는 호 대학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정말 문하중서를 통해 이 일을 진행하려 한다면 호 대학사의 말을 통해서 문하중서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목철이 범한을 바라보며 계속 설명했다.
“다만 하종위가 술자리에서 경도부가 받을 압박이 더 커질 거라는 말을 하긴 했답니다.”
범씨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감찰원 사람들은 모두 범한이 문하중서에 있는 하종위 대인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범한의 앞에서는 하종위를 칭찬하거나 존경하는 등의 긍정적인 평가는 일절 하지 않았다.
범한이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서 대놓고 경도 부윤을 압박하다니, 하 대인의 위세가 정말 대단하구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범한 역시 최근 황제 폐하에게 총애를 받는 하종위가 자신의 입을 통해서 황제 폐하의 뜻을 전달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일 손경수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말뜻을 알아듣고 알아서 관직에서 물러났을 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민하지 못한 경도 부윤은 하종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한참 고민하던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일은 알겠네.”
범한의 눈치를 살피던 목철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가져가지 않고 말했다.
“대인께서는 손씨 집안에 가서 넌지시 상황을 일깨워주는 것 말고 다른 일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쓸데없이 말이 많구먼.”
짜증이 난 범한이 손을 휘휘 저으며 목풍아와 목철을 내쫓았다.
그러자 범약약이 나오기 전에 다른 부하가 잽싸게 다가오더니 양만리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범한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양만리, 이놈. 요즘 공부 관아에서 아주 잘하고 있던데. 온 정신을 정사에만 쏟느라 오랫동안 문안 인사도 오지 않더니 오늘은 어째 시간이 났나 보지.’
오랜만에 제자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아진 범한이 재빨리 양만리를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서재로 들어온 양만리의 검은 얼굴에 억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공부 하도사(河都司) 원외랑(員外郞)이 된 양만리는 이제 명실상부 조정의 핵심 관리가 되어 있었고, 이런 속도라면 10년 안에는 순조롭게 상서에 오르게 될 거였다. 게다가 양만리가 이처럼 승승장구하는 건 범한이 뒤에서 그를 밀어줬기 때문도 아니었다.
과거 강남에서 제방을 수리하기 위해 폭염과 싸우며 갖은 고생을 한 양만리는 이미 과거 청렴하게 살며 나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실히 일하는 유능한 관리로 탈바꿈한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공부에서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오늘 양만리가 억울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양만리의 말에 갈수록 안색이 어두워지던 범한이 마지막에 작은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네고는 보냈다. 양만리가 인사하러 저택에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음에도 범한은 매일 관아 업무를 처리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시간을 절약해주고 싶어 했다.
양만리가 떠난 뒤 후실에서 나온 범약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또 무슨 일이야?”
범한이 어두운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손경수 일이 진행되었을 때와 시기가 같아······.하종위 이놈이 갈수록 오만방자해져서는 내가 지키려 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건들고 있어.”
가만히 범한의 말을 듣던 범약약은 비로소 겉보기와는 다르게 양만리가 최근에 공부 관아에서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호부는 지금도 공부 관아의 장부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핵심은 양만리가 관리하는 하도사에 집중되어 있었고, 뒤에는 심지어 대리사와 이부의 영향도 있었다.
양만리는 매년 범한에게 은전을 제공 받았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부패한 관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외부적 이유와 내면의 성격 때문에 그의 손을 거쳐 간 장부는 무척이나 깨끗하고 명확해서 호부에서 아무리 조사해도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다.
또 이부가 사적으로 양만리에게 그의 저택과 안에서 일하는 종들의 숫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도 양만리가 스승님께서 주신 거라 대답하면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부의 관리들은 감히 범한의 저택에 찾아가 그에게 직접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할 배짱은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조사에 양만리 쪽에서 결국 작은 꼬리가 잡히고 말았는데, 범한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강 제방 사업 뒤 2년 동안 범한은 자신의 방법과 아버지 범건의 도움 및 하명기와 범사철이 운영하는 북쪽 노선을 이용해 황실 금고의 상당양의 은전을 여러 경로를 거쳐 하운 총독 관아에 보냈다.
당시 하운 총독 관아에서 일하고 있던 양만리는 경악할 만큼 많은 은전을 관리하면서 약간의 실수를 하게 되었고, 이게 결국 꼬투리로 잡히고 만 것이었다. 더욱이 이부 관리들은 이처럼 많은 은전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만약 이 문제를 정말 깊이 파고든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거금의 은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였다. 범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은전은 이 몸이 아끼고 아껴서 마련한 거란 말이야. 황제 폐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면서 조사를 하려 하시다니 그 은총이 참으로 높구나.”
그가 누이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심지어 호부까지 나섰어. 아무래도 우리 범씨 집안이 다시 호부를 통제하기는 힘들 것 같아.”
황제가 모든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신하인 범한이 호부를 통제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과거 아버지 범건이 호부 시랑이나 상서에 있었을 때 호부는 단단한 철판 덩어리처럼 똘똘 뭉쳐 있어서 황태자나 2 황자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심지어 황제 폐하가 호부를 건들었을 때도 범건은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공격을 막아내었다.
당시 호부는 전설 속 독립 왕국이었던 걸까? 만약 그때의 호부였더라도 경도부를 조사하거나 범문사자 중 한 명인 양만리를 건들 생각을 했을까? 설사 황제 폐하의 명령에 못 이겨 조사했더라도 최소한 비밀리에 범한에게 사실을 알렸을 거였다.
범건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자 황제 폐하는 서서히 호부의 관리들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호부는 이미 과거의 호부가 아니었다.
범한이 매번 이점을 떠올릴 때면 아버지가 그동안 호부에 쏟아부은 노력이 아까워 화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