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화 무덤 (1)
범한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강 맞은편에 있는 적막한 별궁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20여 년 전에 별궁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아마 20년 전에 별궁은 인간 세상에 펼쳐진 지옥과도 같았을 거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섭가 사람들이 죽었고,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여자는 인생에서 가장 약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낳은 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곁을 떠나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장소가 습격을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강렬하고 맹렬한 살기를 느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외롭고 슬프지는 않았을까?
‘씨를 받았다고?’
범한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친어머니이고 천하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섭경미라도 춘약을 사용해 씨를 받았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남자를 어떻게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다른 여자라면 사회나 가족의 강요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섭경미가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범한이 멍하니 맞은편 강변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 * *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과거 참혹한 장면을 떠올리던 범한이 정신을 차렸다. 범약약이 추운 듯 오라버니의 곁에 바짝 붙었다. 손에 있던 젖은 손수건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범한의 소매를 꽉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말했다.
“······ 나는······ 원래······ 친 오라버니가 있었어.”
범한은 순간 마음에 한기가 엄습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린 시절에 사남백작 저택에 진짜 큰 도련님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과 비슷한 해에 태어난 큰 도련님은 아버지 범건과 본처 부인 사이에 낳은 아이였는데, 몸이 너무 약해서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누이가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친 오라버니를 언급하자 범한은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순간 충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진평평이 이전부터 범한에게 끊임없이 범씨 집안이 그를 지키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으니 범건에게 잘해야 한다고 말해줬었다. 범씨 집안은 도대체 무슨 대가를 치렀던 것일까? 당시 태평 별궁에서 범한이 살아 나오기 위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 아닐까?
오죽이 태평 별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황태후와 진씨 집안, 황후 집안의 맹렬한 공격 속에서 갓난아기였던 범한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혹시 그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희생된 건 아닐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범한이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태평 별궁 습격 사건이 일어난 날 범한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황태후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사남 백작이 담주에서 사생아 아들을 기르는 걸 황궁에서는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설마 황제가 경도로 돌아와 상황을 진압하면서 소식을 봉쇄했던 걸까?
범한은 자신의 머릿속에 들끓는 온갖 의문을 해결해줄 자세한 내막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가능한 상황이 그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드려졌다. 그가 이 세상에서 맨 처음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건 피로 물든 백련처럼 하얀 갓난아이의 두 손이었다. 어쩌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가 자신을 대신해 죽으면서 남긴 흔적일 수 있었다.
자신의 하얀 손에 묻어 있던 피는 어쩌면 오죽 아저씨가 죽인 사람들의 피가 아니라 범씨 집안 큰 도련님의 피일지도 몰랐다.
범한의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범약약의 오라버니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감지하고는 비통해하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큰 오라버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 다만 나중에 저택의 늙은 유모가 울면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래서 진실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었어.”
범한이 누이의 손을 살며시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누이의 친어머니가 누이를 낳고 얼마 뒤에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으며, 이후 아버지 범건이 유씨를 집안에 들였다고 알고 있었다.
시랑의 부인은 무슨 일을 겪었기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던 걸까? 그녀의 친아들이 애꿎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을까?
범약약이 이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유모가 어머니와 섭가 여주인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그랬어.”
범한은 이미 진평평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했던 말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진평평이 만약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이처럼 큰 대가를 치른 걸 알았다면 어째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던 걸까?
사남백작 범건과 섭경미의 관계는 범한이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첫사랑의 모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아마도 지금 범한과 범약약처럼 오누이같이 서로를 믿고 의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섭경미가 태평 별궁에서 아들을 막 낳았을 때 사남백작 부인이 별궁으로 가서 도와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사건이 발생하자 아마도 범한이 속으로 추측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지만, 원래 현실을 소설보다 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법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 현실에서는 소설보다 더 기이한 일이 펼쳐지는 법이었다.
범한이 누이의 손을 꽉 쥐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온갖 복잡한 감정이 용솟음쳤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자신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마치 분노도 기쁨도 모른다는 듯이 항상 엄숙한 얼굴을 한 채 관료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하게 해나갔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다.
범한은 순간 마음이 아파져 오면서 자신이 정말로 범씨 집안에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순간 차갑게 식었다. 당시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범한이 일어나 강 맞은편에 있는 태평 별궁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비록 누이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이 비밀을 밖에 말하고 다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범한은 누이에게 주의를 시키어야 했다. 말을 멈췄던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아버지께 물어볼게.”
“담주로 내려가려고?”
범약약이 일어나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 담주에 계시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가 범건이 호부 상서 자리에서 물러난 뒤 담주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은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가 담주에 계시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아버지가 동북쪽에 있는 어느 지역에서 자신이 진행하는 큰일을 돕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찾아가 아버지에게 사실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이 일에 대해 자신의 발언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범약약은 아버지의 행방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멍하니 오라버니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는 오늘 범한이 말한 것들이 훗날 엄청난 파문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범한은 천하 이인자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힘을 쥐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그가 정말로 황제 폐하와 사이가 틀어져서 친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려 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천하 전체에 영향을 미칠 만큼 엄청난 싸움이 일어날 거였다.
“나와 함께 그곳에 가자.”
범한이 대나무 숲 사이에 난 길을 걸으면서 말하자 범약약이 ‘응’하고 대답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 * *
세 대의 검은색 마차가 태평 별궁이 있는 대나무 숲을 떠나 경도 교외에 위치한 나무가 우거진 조용한 장소에 도착했다. 적막하면서 서늘한 기운이 도는 이곳은 태평 별궁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무거운 분위기가 풍겼다. 왜냐하면 이곳은 묘지였기 때문이다.
태평 별궁에서 이전에 많은 사람이 매장되었듯이 이곳에도 아주 많은 사람이 매장되어 있었다. 오늘 자신이 태어난 곳을 방문한 범한은 이어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을 찾아왔다. 범한의 뒤를 따르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의 엄숙한 분위기에 서로 눈치만 볼 뿐 범한이 왜 이곳을 찾아온 건지 짐작하지 못했다.
청산 아래 위치해 풍수지리상 아주 좋은 명당인 이곳에는 경국 남쪽 정벌과 북쪽 전쟁에서 사망한 이름 없는 전사들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새것인 큰 묘역은 3년 전에 세워진 것이었다.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금군은 막심한 사상자가 생겼고, 감찰원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더욱이 정양문에서 진항이 이끄는 선봉 부대를 향해 매복 공격을 감행한 것과 이후 흑기가 광장 앞에서 한 급습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래서 새로 세워진 이곳 묘역에는 천여 명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었다.
전통의 사월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묘지 안에는 제사를 지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향불과 완벽하게 타지 않은 지전들이 산바람에 따라 묘지 안을 날아다녔다.
부하와 누이를 데리고 묘지를 찾아온 범한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이곳 묘지 안에 묻힌 무덤들은 모두 그의 부하들로, 그의 결정과 명령을 따르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에 제사 대인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비로소 알아챈 목풍아를 비롯한 부하들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감찰원 원장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사 대인은 당장 감찰원으로 가서 업무를 처리하지 않고, 맨 처음으로 이곳 묘지를 찾아 죽은 형제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고 있었다.
청산 묘지에서 한없이 엄숙한 모습으로 절을 하는 제사 대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십 명의 감찰원 관리들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이들이 범한을 따라서 절을 올렸다. 다만 급히 오는 바람에 제사할 도구를 갖추지는 못한 상태였다.
범한이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말했다.
“진심으로 예를 표하는 게 중요하지.”
옆에 있던 목풍아가 나지막이 옳은 말씀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범한이 다시 말했다.
“경도로 돌아가면 목철에게 조사를 하라고 전하게. 그동안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감찰원 관리들의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게.”
“네, 알겠습니다. 대인.”
목풍아가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감찰원 관리들의 후속 조치는 모두 1처에서 처리하고 있었다. 1처 수령은 목풍아의 당숙 목철이었지만, 조사해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작은 범 대인의 지시를 들으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첫째로 조정 전체를 통틀어서 감찰원의 위로금이 가장 높았고, 제사 대인은 부하들의 가족들을 살뜰히 보살폈다. 물론 범한이 황실 금고를 쥐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당숙인 목철이 이런 일을 잘못 처리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는 목풍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범약약을 데리고 청산 아래 묘지를 나왔다.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뿌리치고 직접 청산 산허리를 오른 그가 고개를 돌려 무덤에 빼곡하게 들어선 묘지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한 사람의 공을 위해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