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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95화 (895/1,108)

895화 별궁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들

경력 5년 여름날, 성 밖에 있는 범씨 집안 장원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범한은 누이를 데리고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태평 별궁을 향해 두 번 절을 하고 상념에 잠겼을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황제 폐하가 이곳에 특별한 감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후 범한은 태평 별궁 안으로 들어왔었다. 오죽 아저씨와 함께 태평 별궁의 밀실로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저격총 탄알을 찾고 황가의 시위의 눈에 띄지 않고 한가롭게 안을 거닐었었다.

가늘게 뜬 범한의 눈동자에 강의 넘실거리는 물결이 비쳤다. 마치 태평 별궁의 청회색 담장 너머 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에는 무덤이 없었다.

이것은 범한이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의 아버지 범건은 이전에 그에게 섭경미를 구석진 곳에 묻었다고 했고, 나중에는 태평 별궁 안이라고 했지만, 안에는 없었다. 이에 범한은 훗날 무덤이 황궁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황궁 안에도 없었다. 그곳에는 그저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의 초상화만 있을 뿐이었다.

섭경미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중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면 범한은 황제 폐하가 지하에 혼백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이 강가에 앉아서는 두루마기 옷자락을 무릎 위로 올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여기서 생각할 일이 있으니 아무도 방해하지 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대인.”

목풍아와 옆에서 수행하던 계년조 요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지키고 있는 호위들을 데리고 대나무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사라지는 부하들을 바라보지 않았고, 그들도 강변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말은 자신의 부하들까지 포함한 거였다. 목풍아는 범한의 뜻은 명확하게 이해했지만 지금 범한의 심정은 이해하지 못했다. 멀찌감치 물러난 부하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 도로의 동정을 살피며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추측했다.

강 맞은편에 있는 태평 별궁은 이전에 섭가 여주인이 살던 곳이라는 걸 경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섭가 여주인이 작은 범 대인의 친어머니라는 사실도 천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작은 범 대인이 오늘 이곳에서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다는 건 아주 까다롭고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 * *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강 맞은편에 있는 청회색 별궁과 푸른 대나무 숲과 고요히 흐르는 강물과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등 모든 풍경이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범한은 비로소 너무 오래 앉아 있어 몸이 굳은 걸 느꼈다. 엉덩이는 돌처럼 굳어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떠나지 않고 강가를 천천히 걷다가 몸을 숙이고 차가운 강물을 손에 담아 얼굴에 끼얹었다. 마치 자신의 후끈거리는 얼굴을 차갑게 식히려는 듯이 말이다. 이때 옆에서 불쑥 옆에서 누군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범한은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손수건을 받아든 그가 얼굴에 물기를 아무렇게나 대충 닦은 뒤 강물에 손수건을 담가 적셨다. 두 손으로 손수건의 물기를 꼭 짠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옆에 사람에게 건넸다.

“너는 더위에 약하잖아. 이걸로 얼굴 좀 식혀.”

새하얀 홑옷을 입은 범약약이 웃으면서 범한이 건네준 젖은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귀와 뺨을 닦았다. 평소 얼음처럼 창백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게 급하게 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왔어?”

범한이 몸을 돌려 강가를 걸어가며 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뻗어 잡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범약약이 오라버니가 건네는 손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자기 힘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하가 빈말을 한 건 아닌가 보네. 거기서 오래 배우더니 몸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범약약이 아무 말 없이 웃다가 말했다.

“오라버니는 어젯밤에 경도로 돌아왔잖아. 좀 쉬지 않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경도 안에서 오라버니는 급하게 찾는 사람이 있어. 형수가 공교롭게 입궁해서 손님을 상대할 사람이 집안에 없으니까 등 대가가 하는 수 없이 의관을 찾아왔더라고. 이후 내가 1처를 통해서 오라버니가 성을 나가 진원에 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진원에 가는 데 갈림길에 목풍아가 있더라고. 그래서 오라버니가 분명 여기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차를 세우고 찾으라 거야.”

범한이 오늘 진원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감찰원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질구레한 의문을 알아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나를 찾는 급한 일이 뭔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5년 전처럼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야. 다만 오라버니를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보고 싶었던 거지.”

범약약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집안에서 의관에 있는 범씨 집안 아가씨를 귀찮게 했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눈치도 빠르고 영리한 범약약은 오늘 오라버니가 태평 별궁 근처에 와서 생각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고는 단박에 큰 고민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관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범한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범한이 속으로 오늘 경국 조정에 급하게 처리할 큰일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랑 같이 이렇게 앉아 있자. 혼자서 외롭게 있는 게 싫었거든.”

두 사람은 그렇게 반 시진 동안 앉아 있었다. 고민해야 할 일이 있는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완전히 믿는 누이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평안해졌다. 반면 범약약은 이렇게 조용히 오라버니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태양은 이미 대나무 숲 위를 지나 서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옅은 석양이 여러 가지 빛깔을 반짝이며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햇볕이 눈을 찌르자 범한이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범약약은 오라버니의 한숨에 고뇌, 원망, 답답함, 무기력함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한참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마음속에 있는 일을 털어놓기만 해도 편해질 수 있어.”

범한이 한참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 친어머니의 성은 섭이고 이름은 경미야.”

범약약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천하 전체를 통틀어서 이 비밀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인 자신에게 오라버니가 왜 갑자기 다시 이 말을 꺼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범한이 뒤에 할 말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의문을 드러내지 않고 나지막이 ‘응’이라고만 대답했다.

“이전에 내가 여기에 너를 데리고 와서 멀리 강 맞은편에 절을 올렸을 때 나는 어머니께 내게 육신을 줘서 이 세상에 살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드렸어.”

범한이 차분한 표정으로 강물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오늘 다시 이곳에 오니까 과거 어머니가 했던 일들이 감탄스러워. 어머니는 아들인 나를 위해 좋은 걸 많이 물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백성들에게도 다른 가능성과 더 많은 선택을 주셨잖아.”

범약약이 가만히 앉아서 범한의 말을 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가 어떠한지 모르지만, 어머니가 남긴 흔적을 많이 보면서 자라왔어.”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한 뒤에 계속 말했다.

“이번에 동이성에 갔을 때도 어머니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었지. 그래서 내 마음속에 어머니의 모습은 갈수록 더 분명해지고, 갈수록 정말 나의 어머니처럼 느껴져.”

범한의 뒤에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설사 그분의 나이가 나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말이지.’

“만약 당시에 그분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면 아들인 내가 뭘 해야 할까?”

범한이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고뇌와 슬픔이 가득했다.

순간 마음이 긴장된 범약약이 손에 들고 있던 젖은 손수건을 꽉 쥐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잖아? 황태후 마마도 이미 돌아가셨고.”

“물론 황태후 마마도 돌아가셨지.”

범한은 누이에게 황태후가 사실은 자신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채 옅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았어.”

범약약은 차마 그게 누구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물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황제 폐하가 내 친아버지일 거라고 추측했었어.”

범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다만 처음 2년 동안은 황제 폐하가 내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황제 폐하뿐만 아니라 섭경미라는 분도 내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무척 힘들었어. 이건 과거 그 일이나 내가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

범한이 두 사람을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잖아. 이건 혈연관계나 친밀함과는 무관한 거지.”

고개를 살짝 숙인 범한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시절 같이 성장한 너를 누이로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지. 시간은 아주 많은 걸 바꿀 수 있어. 황제 폐하와 오랜 시간 함께 하다 보니 황제 폐하가 나를 다른 아들들과는 다르게 대하시다는 걸 알아챘어. 더욱이 몇 년 동안 황제 폐하의 성정이 아주 많이 변했지.”

말을 하던 범한이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네가 만약에 그때 내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황제 폐하라면 어쩔 거냐고 물었었지?”

범약약은 순간 마음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을 쥐고 있는 양손을 꽉 쥐자 물이 몇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오늘 경도 하늘은 시시각각 흐려졌다 맑아졌다고 하는 게 웃는 얼굴을 했다가 근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범약약의 모습과 비슷했다. 범약약의 안색이 푸르스름해졌다가 다시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방금 붉게 상기되어 땀을 흘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경천동지할 만한 말을 들은 범약약은 이 말을 들은 경국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드러낼 온갖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분명 따스한 봄날인데도 범약약의 몸은 얼음 창고에 들어간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했다.

“나는 몰랐어.”

가장 당연하면서도 쓸모없는 대답이었다. 어두운 동굴 안에 빠진 범한은 스스로 벗어나기 힘들어 누이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기껏해야 갈가리 찢어진 사람만 더 많아질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마음이 뭉클해진 범한이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 말할 데가 없어서 너한테 말한 것뿐이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범약약이 겁에 질린 눈으로 오라버니를 바라보다가 모기 날갯짓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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