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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94화 (894/1,108)

894화 길고 긴 밤 (2)

진평평이 차분히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진업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거야.”

이런 일들에 대해서 진평평은 줄곧 범한에게 설명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까지 줄곧 말을 하지 않고 숨겨 왔던 이유는 범한을 과거에 벌어진 더러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굳이 계속 숨길 필요가 없었다.

“과연 그런 이유였군요.”

범한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봄날 따뜻한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고, 그의 마음을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고 쓰라렸다. 비록 이러한 사실을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오늘 진평평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마음속에서 치솟는 불길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3년 전에 진씨 집안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

진평평이 갑자기 흥미진진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 식견은 그 일의 진실을 추측할 수 있을 만큼 깊지 않아. 누가 너에게 지적을 해준 것이냐? 범건이 말해준 거냐?”

“아버지는 제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장 공주가 알려줬습니다.”

장 공주란 이름이 범한의 입에서 나오자 진평평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창밖 푸른 나무를 바라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 미친 여자도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어. 당시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으면서도 자잘한 일들을 종합해 진상을 파악해 내다니 정말 대단해.”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장 공주와 연락을 주고받으셨습니까?”

범한이 오랜 시간 숨겨왔던 의문을 드러냈다. 사실 당시 감찰원의 반응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황제 폐하가 계획을 정하면서 진평평에게 경도 안에 불안정한 요인들을 유인해 내라 명령을 하셨다고 해도 진평평이 당시 한 방법 중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더욱이 장 공주 쪽에서 감찰원의 움직임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부분도 수상했다.

“없었다.”

진평평이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서로가 원하는 바를 추측하고 서로의 목적을 알아챘으니 굳이 연락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계획은 머리만을 이용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서로가 원하는 바를 일치시키는 거야······.일단 종이에 적는 순간 그 계획은 완벽해질 수 없는 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도 고인이 된 네 장모에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어.”

진평평이 눈을 뜨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범한이 떫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평평이 갑자기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뭘 할 생각이냐?”

범한이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진평평이 살짝 실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증거가 있습니까?”

범한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사소한 증거라도 있다면······.”

“세상에는 증거가 필요 없는 일들이 많아. 그저 진심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나도 몇 년 전에야 비로소 그 사람이 과거 어떤 마음을 품었고, 그 마음을 어떻게 실현했는지는 확인했어.”

진평평의 이 말은 사고검의 검도와 꽤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때는 대군을 이끌고 서쪽 정벌에 나섰을 때라 폐하는 정주 부근에 계셨고, 네 부친도 그곳에서 폐하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북제의 군대가 갑자기 남쪽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나는 감찰원을 이끌고 연경으로 갔었지······.”

“섭중도 서정군 후속 부대에 있었다.”

진평평이 차분하게 그때의 진실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건 네 어머니가 너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몸이 약해져 있었다는 거야.”

범한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오죽 아저씨는요? 저는 오죽 아저씨가 그때 어머니 곁을 떠난 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묘에서 사람이 왔거든.”

진평평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신묘 사람이 대륙에 출현한 거다······ 나는 네 어머니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네 어머니와 오죽이 신묘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어. 게다가 오죽은 어떤 일이든 신묘와 관련된 건 무조건 꺼렸지.”

“신묘 사람이 온 건 한 번이 아니야. 최소한 두 번은 왔었다. 내가 아는 게 두 번이니까.”

진평평이 한숨을 쉬며 계속 설명했다.

“올 때마다 오죽이 죽였지. 당시 세상에서 네 어머니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신묘 사람밖에는 없는 것 같았어. 그래서 오죽은 신묘 사람이 네 어머니 주변 백 리 안에 접근하는 걸 허락할 수 없었지.”

“그래서 오죽 아저씨가 어머니 곁은 떠나신 거군요.”

“하지만 네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그것도······ 자기 사람의 손에서 죽었어.”

진평평이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특히 자기 사람의 손에서 죽었다고 말할 때 말투가 유독 무거웠다.

범한도 웃었다. 마찬가지로 기괴한 웃음이었다. 그가 일어나 진평평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저도 이 일들을 이미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비로소 진실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군요. 좋습니다. 이런 일은 더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평평이 웃으며 물었다.

“상자는 아직 네가 가지고 있느냐? 오죽은 어디에 있지?”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상자는 이제 없고, 오죽 아저씨는 일이 있어 떠났습니다.”

진평평이 알겠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범한에게 실망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상자를 가지고 있는 걸 아셨습니까?”

“네 아버지도 알고 계신다.”

진평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덕분에 그분이 모를 수 있었던 거지.”

감동한 범한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을지 생각하던 그는 순간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범한이 다시 진평평의 마른 어깨를 토닥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대인께서 저에게 이미 세상을 떠난 장 공주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대인께서도 아직 살아계시는 제 아버지에게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내려놓아야 할 건 미련 없이 내려놓고 물러나야 할 때는 지체 없이 물러나야 하는 법을 아시거든요”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을 진평평의 양쪽 어깨에 올려놓고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진평평이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이 성격상 아마도 계속 지켜보면서 참고 견디려 하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지켜보고 참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바로 범한과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이야.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비참한 운명에 처한 사람이지.’

이런 생각이 들자 진평평은 갑자기 자신이 범한을 위해 20년간 한 노력과 고민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범한이 건강하게 자랐고, 게다가 이처럼 빠르게 성장을 했으니 말이다······. 마치 하룻밤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세월이었다.

* * *

날씨가 갑자기 흐려졌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범한은 어두운 얼굴로 마차 창가에 기대 경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산과 숲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어 있지만, 표면이 약간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가던 검은색 마차가 관도로 진입하면서 진원의 범위를 벗어났다. 하지만 범한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마차 주변을 따르는 감찰원 관리들은 창가에 비친 잘생긴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오늘따라 굳어 있는 제사 대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왠지 모르게 서늘해졌다. 그들은 진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 원장 대인과 제사 대인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오늘 제사 대인의 얼굴이 어두운 이유가 뭔지 알지 못했다.

관도에 진입한 마차는 묵묵히 경도를 향해 달렸다. 길에는 가끔 성에 들어가려는 백성들이나 봄놀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귀족 집안 자제들이 보였다. 이들은 검은색 마차가 무슨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경고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자마자 황급히 길을 비켜주었다.

백성들이야 항상 관리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기에 비켜주는 것이었고, 무서울 게 없는 젊은 귀족 자제들은 검은색 마차가 상징하는 신분과 권위를 알기에 비켜주는 것이었다.

소문에 민감한 경도 안에 귀족들은 작은 범 대인이 어젯밤에 동이성에서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 범한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기고만장한 귀족 자제들이라 해도 검은색 마차 앞에서는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제멋대로 행동하기로 유명한 작은 범 대인에게 감히 큰소리를 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범한은 귀족 집 자제들의 어느 집안의 사람이고, 누구의 비호를 받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가 국공가 자제들이라 할지라도 범한은 겁내지 않았다. 게다가 범한은 이미 4년 전에 포월루 밖에서 십여 명의 귀족 집 불량배들을 혼쭐내 줘서 경도 안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불량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전력이 있었다.

범한은 관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지 않았고, 잔뜩 움츠린 채 길을 비켜 서 있는 소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무거운 마음으로 아무 말 없이 관도 옆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날 추측은 그저 추측일 뿐이었고 생각도 그저 생각일 뿐이었다. 어른들이 그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그도 그동안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암암리에 준비해온 것도 무의식적인 행동일 뿐 내면에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고민해서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진실이 자신의 앞에 드러난 이상 그 당시 일을 똑바로 마주하고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때 검은색 마차는 어느덧 관도가 갈라지는 길목에 이르렀다. 앞으로 쭉 가면 경도의 웅장한 성곽에 이르게 되었고, 왼쪽의 조용한 길을 따라가면 빼곡하게 들어선 푸른 대나무 숲이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까?

“왼쪽으로 가게.”

마차 창가에 기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나지막이 지시했다. 목풍아가 대인의 안색을 살피고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검은색 마차 세 대가 왼쪽으로 돌아 푸른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더니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도로를 얼마간 들어가자 빼곡하던 대나무가 듬성듬성해지더니 어느덧 옥처럼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드넓은 강이 나타났다. 강물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호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바로 성을 가로질러 성벽을 돌아가면 마침내 등장하는 창산의 유정강이었다. 이 강의 상류에는 기생집이 밀집해 있어 항상 강 위에는 화려한 등불을 밝힌 꽃 놀잇배가 즐비했다. 범한의 포월루가 경도 최고의 기생집이 되었어도 유정강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경도 교외까지 이어져 있는 유정강은 푸른 대나무 숲이 있는 곳까지 이르면 조용하게 흘러갔다. 더욱이 강 맞은편 작은 반도 위에 세워진 저택은 아름다운 봄날 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듯 홀로 참신하고 아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태평 별궁은 과거 섭가 여주인이 살았던 저택으로 나중에는 황실의 별궁이 되었다. 장 공주가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곳에서 이틀 머무르기도 했다. 장 공주가 머문 이틀을 빼면 줄곧 비어 있는 이 별궁은 지금껏 누구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차에서 내린 그가 태평 별궁을 가만히 바라보며 과거 저곳에서 살았던 사람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눈에 어떤 상실의 빛이 비쳤다.

경도의 반란이 평정된 뒤 황제 폐하는 두 차례 은근슬쩍 태평 별궁은 범한에게 하사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범한은 이런 일에서는 자신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알았기에 줄곧 잠자코 기다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까지도 이 일은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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