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화 감찰원을 빼앗고 권력을 탈취하다 (1)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현공 사당 암살 사건과는 관련 없는 것이었다. 설사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후 상황에 대한 것일 뿐이었다. 궁정에서 2년 동안 조사한 내용은 그해 겨울 황실 금고 병 작업장에서 생산한 수성용 쇠뇌의 행방이었다.
그때 생산된 수성용 쇠뇌로 인해서 범한은 하마터면 경도 교외 산골짜기에서 처참하게 죽을 뻔했다. 이후 황제와 범한은 조사를 통해서 산골짜기 습격 사건이 진씨 집안의 소행이라 결론을 내렸지만, 당시 쓰인 수성용 쇠뇌에는 정주군의 군용품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보고서를 다 읽은 황제 폐하는 마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범한이 교외에서 공격을 받은 일로 인해 황제 폐하는 한 나라의 군주이자 아비로서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조사를 아무리 해도 구체적인 사항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궁정에서 지금까지 힘들게 조사한 끝에 비로소 그 사건의 배후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사람의 흔적이 있다는 걸 밝혀낸 것이었다.
몹시 놀란 황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국 황제와 같은 인물도 늙은 개가 무슨 이유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되지는 않는 거였다.
게다가 안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에 빙빙 돌려서 늙은 개가 광명정대하고 편안하게 물러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뜻을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황제 폐하가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쓰다듬으며 마른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남은 보고서를 집어 들고 한두 번 훑어보다가 물었다.
“북제 그 사람이 동이성에 왔다고?”
“그렇습니다.”
순박한 얼굴을 한 궁정 조사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담박공께서 북제 황제가 검려 일에 끼어들려 하는 걸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이 해변에서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구체적으로 의논한 일이 뭔지는 소신들도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범한이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황제가 보고서를 다시 보았다. 거기에는 동이성에서 범한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었었다. 보고서를 보는 황제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다른 보고할 사항이 있느냐?”
“청주성 안에서 검이 발견되었는데, 황실 금고 병 작업장에서 생산된 게 확실합니다. 하지만 시험용이라서 군대 쪽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닙니다.”
순박한 얼굴을 한 태감이 계속 설명했다.
“그런 종류의 검은 총 세 자루가 출현했는데, 저희가 한 자루밖에 찾지를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그 검을 작은 범 대인의 손에 전해줘 경고해 주었습니다.”
“분명 초원에 있는 그 사람이 나머지 두 자루도 가져간 것일 거다. 담박공을 대신해 뭘 숨기려는 것이겠지.”
“하명기와 범씨 집안 둘째 아들이 국경을 넘어 장사하는 일을 줄곧 감시하였는데, 대부분 생활용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검들은 거기서 나온 게 아닙니다.”
요 태감은 비록 궁정의 수령 태감이었지만, 궁정의 외부 조사는 황제 폐하가 직접 책임을 지고 있었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요 태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천지가 경악할 만한 소식에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요 태감은 만일 황제 폐하가 정말 궁정이 조사해 보고한 내용을 믿으신다면 작은 범 대인은 화를 당할 것이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도 결코 앞날이 좋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 태감의 예상과 달리 황제 폐하는 오히려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작 검 세 자루 가지고 짐과 범한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인가? 짐과 안지의 부자의 정을 소원하게 만들려는 게야?”
이 말에 요 태감과 순박한 얼굴을 한 태감이 몰래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눈에서 깊은 두려움을 보았다. 천하의 사람은 모두 작은 범 대인이 황제 폐하의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이 일을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황제 폐하가 두 태감 앞에서 직접 사실이라 밝힌 것이었다.
“상경성 안에 있는 젊은 놈이 하는 짓이 재미있군.”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지의 약한 마음을 이용해서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게지.”
순박한 얼굴을 한 태감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계속 조사할지 말아야 할지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산골짜기 습격 사건은 계속 조사하고, 현공 사당 일도······ 계속 조사하여라.”
황제가 피곤함에 두 눈을 감으며 계속 지시했다.
“다만 안지 쪽과 관련된 일은 조사하지 마라. 앞으로 어떤 일이든 안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게 나오면 조사를 그만두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 폐하가 이후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진평평이 그동안 자신에게 어떤 모습을 숨겨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마음이 움찔한 그는 아마도 자신의 아들 범한 역시 진평평의 숨겨진 모습에 대해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감찰원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리라.
경국 황제는 범한의 충성심을 믿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처럼 이익, 도덕, 심성 면에서 봤을 때 범한은 그를 배반할 수 없었다. 경국 황제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이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의 진상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자신에게 울분을 토해낼 뿐 경국을 배반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 * *
다음날 경국에는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검은색 연의를 입은 범한이 빗속을 걸어갔다. 그의 뒤에는 계년조 요원 세 명과 6처 검수들 한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좁은 골목에 들어간 범한은 골목을 한 바퀴 돌며 넓지 않은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가 매번 언씨 집안을 찾아올 때마다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황제 폐하도 이 저택에 사는 두 부자가 세상에서 가장 소탈한 인물 중 한 명이라는 걸 아시기에 어둠과 빛 사이에서 세속 사회와 거리를 유지하는 그들을 동정하는 것일 거였다.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저택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언씨 집안은 여전히 이렇게 자신들을 낮추며 황제 폐하의 하사품과 조정의 총애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문간방에서 흠뻑 젖은 비옷을 벗은 범한은 종들이 사실을 알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후원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원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가짜 산이 나타났다.
처음 언씨 집안에 방문했을 때 범한은 이 커다란 가짜 산을 눈여겨보았었다. 집안 내부의 모습을 감추는 것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이 가짜 산은 솔직히 지나칠 정도로 크고 노골적으로 가짜처럼 보이는데다가 뜬금없는 장소에 위치해 있어 보기가 싫었다.
평상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작은 언 공자는 오늘은 모처럼 휴가를 얻어 아내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심씨 집안 아가씨와 혼인하지 좀 되었지만 심씨 집안 아가씨의 배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지만 언빙운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를 보니 언씨 집안 전체가 조급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범한을 본 언빙운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범한이 어젯밤에 경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제사 대인은 게으르니 오늘은 집안에서 쉬거나 친왕부나 1 황자와 술을 마시러 가리라 생각했지, 자신의 집에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있었다.
작은 언 공자는 소년 시절 경도에 있었을 때나 이후 상경성에서 신분을 숨기고 있었을 때나 인재로 명성을 떨쳤었다. 바둑이나 서화에도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범한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재능이나 정취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작은 언 공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굴며 상하 관계를 분명히 지키려고만 하는 탓에 범한은 재미없는 그와는 공사에 대해 의논할 뿐 같이 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범한이 언씨 집안에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감찰원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아주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남편 상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심씨 집안 아가씨가 허둥지둥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북제에서 도망자 신분인 심중의 딸은 몇 년 전 범씨 집안 안에서 지내면서 범씨 집안 부녀자들과 돈돈한 친문을 맺었지만, 범한 앞에서만 서면 마음이 복잡해져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비록 어느 사람도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심씨 집안 아가씨는 자기 아버지가 죽고 가문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공개적으로는 북제 황실의 용인과 상삼호의 살의 때문으로 알려졌지만, 그 뒤에는 경국 감찰원의 젊은 지도자가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다닥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일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대인만 원한다면 제가 부인의 도망자 신분을 벗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언빙운이 일어나 처마 끝에 서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인이 북제인과 한 짓을 천하 사람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전에야 상관없었지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계십니까? 양측에서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대인은 이적행위를 하신 겁니다······.그런데도 관계를 빨리 정리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관계를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 하시다니. 본인의 특수한 신분 덕분에 아무도 대인이 나라를 배신했다고 의심하지 않을 거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배반은 무슨 배반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범한이 자신은 무고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멋쩍게 웃었다.
“제가 급하게 은전을 벌어야 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은전은 대부분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대인도 은전들이 항주회와 치수 공사 관아 장부로 들어간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그 은전은 어차피 조정에 흘러 들어갈 거였는데, 어째서 중간에 그렇게 여러 경로를 거쳐야 했던 겁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중간에 세금을 피해서 조정에 들어간 은전이 더 적어졌다는 것입니다.”
“절차를 줄여서 관리들에게 착취되는 걸 줄인 겁니다.”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던 범한이 씨익 웃었다.
“게다가 저는 스스로 이런 일을 장악하는 걸 좋아합니다.”
“황궁에서 이 일을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하고 참고 있다는 걸 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면서 어째서 머리를 굽히려 하지 않는 겁니까.”
언빙운이 참지 못하고 경고했다.
“장 공주가 가진 걸 저는 가지면 안 되는 겁니까?”
범한이 물었다.
“승려가 추측할 수 있는 건 저도 할 수 있습니다······.화제를 바꿔서 이전에 제가 말한 일은 할 생각이 있는 겁니까? 원한다면 제가 상경성에 얼른 서신을 보내야 해서요.”
“그녀의 집안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 북제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해서 뭣하겠습니까?”
언빙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향에 돌아갈 날은 언제든 생길 수 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언빙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조용한 곳에서 중요한 일을 의논했으면 합니다.”
범한의 말에 언빙운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여기서 말씀하십시오. 우리 집에는 엿들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언빙운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인정하기에 범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언약해는 감찰원에서 군대 쪽에 수십 년간 심어둔 밀정이었고, 언빙운도 경국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밀정 중 한 명이었다. 이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식견을 가진 두 부자가 집안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곧 원장직을 물려받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처마를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진평평은 이미 감찰원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 않아서 범한은 이미 원장이나 다름없었기에 언빙운은 범한의 말을 듣고도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범한이 원장이 되면 자신이 당장 제사직을 넘겨받는 건지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언빙운이 조용히 말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