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890화 (890/1,108)

890화 혼사를 논의하고 업무를 이야기하고 (2)

“천하에서 이제 이 부분만 남았구나.”

그 말에 범한은 다시 한번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황제가 아까 대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물었다.

“안지야, 짐이 네게 상으로 뭘 줬으면 좋겠느냐?”

역사를 보면 엄청난 공을 세운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불행한 말로는 맞는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했다. 바로 그동안 공을 많이 세운 이들은 봉지와 상을 너무 많이 받은 탓에 더는 상을 받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자신이 깔고 앉아 있는 용상을 넘겨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들은 예외 없이 죽음을 불사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뛰어들었다. 간혹 이런 반란이 성공한 사례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알면서도 범한은 황제의 질문에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그저 난처한 얼굴로 깊이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번에 세운 공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서 그가 말했듯이 동이성이 귀순을 결심한 건 어디까지나 경국의 국력이 강성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은 그저 보조 말에 불과했다고 자인하며 사고검을 설득했고, 또 자신을 설득했다.

그렇다면 범한이 과연 과거 엄청난 공을 세운 뒤 처참한 말로를 맞은 사람들처럼 될 가능성이 없는 걸까? 사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는 역사 이래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제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신하나 아들이 자신의 자리에 빼앗을 수 있을 거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강력한 제왕만이 용상 아래 사람들에게 드넓은 관용을 베풀 수 있었다.

물론 범한에게도 과거 역사에 등장하는 그들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상이 더는 상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문제였다. 그는 이미 1등공이었고, 황실 금고와 감찰원이라는 두 거대 기구를 가지고 천하 3분의 1은 차지할 수 있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황제가 무슨 상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사신단 관리들이 남몰래 생각했듯이 왕으로 봉해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하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경도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상을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범한이 공을 세우고도 아무런 상도 받지 않는다면 신하들이 황제 폐하에게 두려움을 느낄 테니 말이다.

오랜 고민을 한 끝에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지도 옆에 서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동이성 성주로 소신을 봉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말을 당연하게도 농담이었다. 범한이 설사 왕으로 봉해진다고 해도 기껏해야 담박한왕(澹泊閑王) 정도일 텐데, 감히 동이성을 떼어 왕후로 봉해달라고 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범한의 농담에 황제도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그의 웃음은 범한이 상상했던 것처럼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렴풋하게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사고검이 대동산에서 말했던 것처럼 네게 성주가 될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순간 덜컥 겁이 난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성주가 되는 일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다른 걸 말해 보아라.”

황제는 화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아 따뜻한 차를 천천히 마시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제 앞에 선 범한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어쨌거나 동이성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 관리해야 하니······ 친왕에게 성주를 맡기는 건 어떠합니까?”

지금 경국에는 친왕이 1 황자밖에 없었다. 그는 원래 동이성 핏줄이었고 신분도 존귀했다. 그러니 동이성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키는 데 1 황자가 동이성 성주가 되는 건 아주 절묘한 한 수가 될 거였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황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범한의 제안이 마음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소신은 문하중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범한이 갑자기 투덜거리며 말했다.

“연로한 분이 혼자서 고생하는 걸 보면 안타까워 죽을 지경입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 대인이 지금 문하중서에 있지 않으냐? 그도 젊은 사람이야.”

황제는 범한이 감찰원 권력을 버리고 문하중서에 들어가서 자신이 세운 미래의 계획을 망가뜨리는 걸 볼 수 없었다. 다만 황제의 이 말을 듣자 범한이 눈을 번뜩이며 담박의관 밖에서 매일 약약이를 지켜보는 가증스러운 대신의 얼굴이 떠올렸다.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정말 소신에게 상을 하사하고 싶으시다면 소신 폐하께 청하고 싶은 일이 두 개 있습니다.”

황제와 범한은 이미 반년 동안 혼사 문제로 냉전 중이었다. 그래서 범한에게 이 말을 듣자마자 황제는 그가 뭘 말하려 하는 건지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이 자신이 공을 세웠으니 은혜를 베풀어 달라 말하려는 건가?’

황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나는 약약이와 관련된 일이고, 또 하나는 유가 군주와 관련된 일이옵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말했다.

“황상께서 두 여인이 스스로 남편감을 고를 수 있게 윤허해 주십시오.”

황제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말했다.

“유가 군주가 직접 남편감을 고르는 일은 허락하마! 하지만 네 누이는 허락할 수 없다!”

범한은 황제가 버럭버럭하는 모습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황제 폐하가 이 일을 고집하는 이유가 자신의 고집을 꺾고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라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부자의 정이나 신하의 충성심으로 간청을 해도 황제 폐하는 절대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는 단순히 뜻을 굽히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황제 폐하는 이 일을 계기로 범한을 완벽하게 장악해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하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는 줄곧 범한이 다른 아들들과 다르게 친모의 흔적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아들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앞에서 공손하게 행동하면서 뒤로는 금수만도 못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반면 안지는 본래부터가 조금도 온순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비록 황제 폐하는 범한의 ‘성실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 성실한 모습을 ‘지고지순 충성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황제가 범한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무슨 일을 떠올리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가 군주의 혼사를 네가 오늘 세운 공에 대한 보답으로 해주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구나. 하지만······ 짐이 알고 있다시피 너는 아직도 감찰원의 제사가 아니냐?”

순간 마음이 섬뜩해진 범한이 난데없는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진평평은 감찰원 업무에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느냐. 네가 직접 원장직을 물려받으면 진평평도 편히 쉴 수 있을 거다.”

황제가 살짝 비웃는 눈초리로 범한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짐이 엄청난 성은을 베풀어 스무 살을 갓 넘은 네게 감찰원 원장직을 주겠다는데도 너는 감사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이냐?”

범한은 여전히 감찰원 제사였다. 하지만 수년 동안 진평평에게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권력을 이양받은 범한은 이미 감찰원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미 원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황제가 지금 갑자기 감찰원 원장직을 꺼내서 그가 동이성에서 세운 공로를 치하해 주겠다고 한 것은 범약약의 혼사를 무효화 하려는 의도를 막겠다는 것이었으니 정말이지 야박한 조치였다.

범한의 입 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대충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황궁을 떠났다. 황제 폐하는 어서방 안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를 바라볼 뿐 아들의 예의 없는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 * *

그날 밤 자신의 집에 돌아온 범한은 서둘러 두 번째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서방 안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황제 폐하도 천하의 세세한 동정까지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고, 심리전에서도 도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침대에 앉아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 완아가 졸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기대 말했다.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아서 집안에서 아무것도 준비를 못 했어요. 종들도 모두 자고 있으니까 부르지 말아요.”

“며칠 쉬고 다시 동이성 일을 처리하러 가야 해요.”

범한이 아내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름과 반대로 바빠서 어쩔 수가 없네요.”

“상공도 상공의 이름 누가 지었는지 모르잖아요.”

임완아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임완아는 아이를 낳았는데도 얼굴에 여전히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범한이 아내의 동그란 두 뺨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그분이 아니면 누가 이런 볼품없는 이름을 지을 수 있었겠어요?”

임완아가 ‘아야’ 소리를 내며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장난기가 넘치는 거죠?”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좋은 관직을 얻은 덕분에 내일 진원에 있는 사람을 내쫓을 계획이거든요!”

* * *

범한이 뒤채 침대에 앉아 피로를 풀고 있을 때 아이들은 유모들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으며 곤히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정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범한은 정말이지 피곤한 상태였다.

임완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심지어 뜨거운 물에 담겨 있는 발도 빼지 않은 채 말이다.

한숨을 쉰 임완아가 홑옷을 걸치고는 범한의 발을 정리해 주었다.

밤이 깊은 경도는 무척이나 조용했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미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부지런한 황제 폐하는 아직도 어사방에서 7로와 각 주와 군에서 보낸 상주문을 일고 있었다.

비록 문하중서에서 두 차례 검토를 끝낸 것이었지만, 황제 폐하는 천하 모든 일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 했기에 항상 엄청난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었다.

어서방 안에 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문 앞에서는 약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들어오겠다는 말도 없어 요 태감이 순박한 얼굴을 한 태감을 데리고 조용히 어서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조사하였는가?”

늙은 홍 태감이 대동산에서 죽고, 후 내관이 경도 황궁 습격 사건 중에 목숨을 잃어 지금 궁전의 태감들은 전부 요 태감이 관리하고 있었다. 궁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특수한 지위에 있는 만큼 가진 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궁정에서는 주로 황궁 내부 보안을 책임졌지만, 사실 맡고 있는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 폐하가 암암리에 감찰원을 통제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는 거였다.

사실 궁정은 이전에 감찰원 관리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드는 내무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다만 진평평이 감찰원을 진두지휘하던 시기에는 궁정도 감찰원을 관대하게 대하며 많은 역할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후 황제 폐하가 감찰원을 감독을 도찰원에 맡기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궁정의 원래 역할이 뭐였는지를 잊어 버렸다.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은 요 태감이 직접 순박한 얼굴을 한 태감의 손에서 보고서 두 개를 건네받아 황제 폐하 앞에 있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고서는 굉장히 얇았고, 안에 들어 있는 내용도 많지 않았다. 보고서를 훑어보던 황제 폐하의 안색은 살짝 변하다가 곧바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안색이 살짝 변하는 걸 본 요 태감은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제 폐하는 대동산에서 포위당했을 때도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두 대종사의 공격에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전혀 당황하지 않았었다. 그런 황제 폐하께서 얇디얇은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안색을 바꾸셨다는 건 안에 적힌 내용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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