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화 혼사를 논의하고 업무를 이야기하고 (1)
낮은 평상에 앉은 황제 폐하가 양손으로 무릎을 주무르며 범한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놀란 범한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황제가 그런 범한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단하구나. 잘했다.”
‘잘했다고 하면서 고개를 젓는 이유는 뭐지?’
이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범한이 감찰원에서 준비한 비밀 상주문이 들어 있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황제가 상자를 열고는 안에 내용을 꼼꼼히 살펴봤다. 상자 안에는 이번에 경국과 동이성이 진행한 협상의 결과가 모두 담겨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감찰원이 분석한 동이성의 밀정 상황과 동이성에서 제공한 국가 영토 지도, 그리고 동이성 인구와 재정 등 구체적인 내정 정보도 들어 있었다.
동이성과 천하 전체를 충격이 빠뜨린 협상을 이끌어낸 범한을 포함해서 경국 사신단은 경도 황실과 매일 한차례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세한 사항을 교류했다. 이에 황제 폐하도 협상의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두 곳의 거리가 멀다 보니 가장 중요한 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범한이 경도로 와서 직접 황제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황제 폐하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천천히 내려놓은 뒤 일어났다. 어서방 한쪽 벽으로 걸어간 그가 벽에 걸려 있는 장막을 열었다.
장막을 걷자 천하 전체가 그려진 지도가 드러났다. 지도에는 각 군과 로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심지어 동쪽과 남쪽 해안선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지도에는 경국 영토뿐만 아니라 북제와 동이성의 영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범한은 처음 어서방에 들어와 국사를 의논했을 때 상서와 대학사들과 함께 앉아 이 지도를 본 적이 있었기에 경국 황제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엄청난 열망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시 황제 폐하 곁에는 3 황자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두 명의 황자들도 있었다.
황제 폐하의 손이 지도 위에서 천천히 이동했다. 어서방 안은 불빛이 밝았지만, 수술실 무영등만큼 밝지는 않았다. 그의 손이 이동할 때마다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는 마치 무수히 많은 권위와 살기를 내뿜는 수십만 대군을 대표하는 검은색 화살처럼 보였다.
황제 폐하가 손으로 동이성과 주변 제후국을 가리키고는 손가락으로 그곳을 툭툭 쳤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
“단 하나의 병력도 사용하지 않고 짐은 이곳을 가지게 되었다. 범한, 짐이 뭘 상으로 줬으면 좋겠느냐?”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은데다가 검려 내부에 반감도 여전히 있고, 제후국 왕공 중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병력을 주둔하는 일인데, 이 일로 인해서 훗날 동이성에서 다시 들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웃으면서 대답하는 범한은 황제 폐하가 비록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생 동안 천하통일에 성공해 만대에 길이 남을 공적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황제 폐하는 마침내 수십 년을 공들여 고하와 사고검을 제거하고 긴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니 분명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하고 있을 거였다.
“사고검은 어떠한가?”
몸을 돌린 황제 폐하는 계속 상으로 뭘 내려줄지에 관해 묻지 않고 자신이 가장 관심이 있어 하는 일을 물어봤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3개월 안에 분명 죽을 겁니다.”
범한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긴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결국에는 죽는군. 사실 짐은 그 백치가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섭류운의 산수와 짐의 권법을 맞고도 이렇게 오랜 시간 목숨을 유지하다니. 육신의 힘은 우리 중에서 그가 가장 강했네.”
당연하게도 오죽을 제외한 말이었다.
그 말에 눈빛이 살짝 흔들리던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검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검려의 강자들을 제압해줘서 다행입니다. 만일 그의 승낙이 없었다면 이번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황제 폐하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범한에게 줄곧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째서 사고검을 좋게 평가하는 걸까? 곧 죽을 대종사를 좋게 평가하는 건 무슨 의미인 걸까?’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소신이 생각하기에 이번 협상은 내년까지 이어질 겁니다. 물론 그때가 되면 사고검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겠지만, 이번에 강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확실히 밝혔으니 검려 제자들도 감히 반역할 생각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왕 십삼랑이 앞으로 검려의 주인이 되는 것이냐?”
황제가 갑자기 물었다. 사실 황제는 범한과 왕 십삼랑이 개인적으로 무슨 교류를 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일은 앞으로 동이성 영토를 확실히 통제하려면 반드시 검려 주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왕 십삼랑은 경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그의 능력이 어떠하든 가장 통제하기 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말에 심장이 오그라든 범한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겸려를 개방하는 의식이 1개월 미뤄졌는데, 아무도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고검이 검려를 누구에게 물려줄지는 소신도 수소문해보지 못했습니다.”
“수소문해 볼 것도 없다.”
황제 폐하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동이성이 정말 귀순하게 된다면 검려의 주인도 짐이 임명하게 될 것이다. 사고검이 누구를 선택하든 짐이 옥새를 찍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거야.”
범한의 입가에 쓴 미소가 살짝 보였다. 원래 사고검이 그림자의 정체를 폭로해서 검려의 2대 주인으로 만들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인제 보니 걱정해야 할 건 다른 문제였다. 황제 폐하는 동이성 사람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주인으로 앉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도 맞았다. 경국은 앞으로 동이성에 상주할 관리를 파견할 것이고, 군대도 주둔하게 하겠지만 동이성 주민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동이성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검려 제자들일 거였다. 더구나 양국의 협의 안에는 경국이 15년 동안 동이성의 상황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경국이 명목상 임명권도 가지지 않는다면 동이성이 귀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점은 소신이 동이성에 돌아간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범한이 더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검려를 굴복시킬 수만 있다면 다른 소국들이나 상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사고검이 총명한 사람이라면 죽기 전까지 다른 속셈을 부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 정말 백치라면 짐이 그에게 호된 교훈을 줘야겠지.”
경제가 말하는 교훈이란 천자의 분노로 인한 유혈사태였다. 즉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라도 동이성을 정복하겠다는 의미였다.
범한이 주제를 바꿔 물었다.
“만일 이후 검려의 주인이 누가 될지 정해진다면 성주부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사고검이 성주부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도 옆에 서 있는 황제가 갑자기 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 일은 짐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조정 문무백관들도 기뻐하면서도 모두들 약간은 놀라 두려워했지. 아무래도 사고검이 너를 무척이나 아끼는 모양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의 광폭한 성격을 죽이고 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동이성 사신으로 가기 전에 범한과 황제는 이 일로 오랫동안 싸움을 벌였다. 황제는 사고검이 설사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검 하나로 오랫동안 지켜온 동이성을 병력 한번 일으키지 않고 순순히 경국에 넘겨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오랜 시간을 설득한 끝에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한 번의 시도만으로 범한은 협상에 성공했다. 이 사실로 경국 문무백관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황제 폐하도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생아 아들이 천하에 너무 많은 놀람과 기쁨을 준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의심하는 황제 폐하의 눈빛에도 범한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은 소신의 공이 아닙니다. 만약 경국의 국력이 이처럼 강성하지 않았다면 사고검은 절대 경국에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은 뒤 동이성에는 투항하거나 싸우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이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어떤 외교 협상이든 결과를 결정짓는 건 나라의 국력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면 북제는 경국과 오랜 시간 균형을 유지할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이성은 그렇지 못했다. 상업이 근간인 동이성은 기반이 공고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 위를 떠다니는 부평초나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처럼 센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흩어져 버리게 될 거였다.
경국이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으로 압박하고 있으니 동이성에는 선택지가 많이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번에 이룬 성공은 엄연히 경국 황제 폐하의 성공이라 해야 했다. 왜냐하면 경국이 지금처럼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통치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범한이 갑자기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머니께서 과거 동이성과 왕래를 한 인연으로 사고검이 저에게 정을 가지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요.”
그는 이 일을 황제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솔직하게 털어놨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 폐하는 과거 섭경미가 동이성과 왕래했다는 말을 듣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연 그러했군. 그래서 사고검이 네게 무슨 요구를 했느냐?”
범한이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동이성이 경국의 통치를 받더라도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라.”
단호하게 손을 저으며 말한 황제가 범한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짐이 원하는 동이성은 지금의 동이성이다. 만약 동이성이 강남처럼 변한다면 짐이 뭘 할 수 있겠느냐?”
범한은 마음속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자신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이자 사고검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문제가 황제 폐하에게는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 폐하는 지금의 동이성을 원하고 있었다. 바다 밖에서 거액의 무역을 진행하며 상인들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분위기로 충만한 동이성을 말이다.
순간 범한은 황제 폐하에게 무궁한 경외심을 느꼈다. 깊고 넓은 안목을 지닌 제왕만이 이런 상황을 용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넓고 깊은 의지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황제는 범한과 동이성의 상황의 자세한 부분을 토론하고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과 대응 조치들을 의논했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었지만, 어서방 안의 불빛은 계속 밝게 빛났다.
천하의 지도는 부자 두 사람이 자세히 연구하는 중에 점차 모습을 바꿔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황제 폐하가 피곤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지도를 주시했다. 천하의 지도는 이미 변했지만, 벽에 걸린 지도는 변한 게 없었다. 황제가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내일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야겠구나.”
“축하드립니다. 폐하.”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황제 폐하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바닥으로 지도 위를 세게 쳤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다른 나라의 영토가 그려진 부분을 치자 황제 폐하의 옅은 황색 옷에서 마치 막을 수 없는 강인한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