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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88화 (888/1,108)

888화 경도로 돌아가 관직을 청해야지 (2)

검은색 마차가 어두운 밤길을 소리 없이 내달렸다. 마차 안에 등불은 바람을 막아주는 장치가 되어 있었음에도 마차 안을 비추는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범한이 피곤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어 담담히 말했다.

“풍아, 목철의 먼 조카지.”

난데없는 말에 목풍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목철의 조카라는 사실은 제사 대인도 이미 아는 일이었기에 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 당숙이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목철을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화들짝 놀란 목풍아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만일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쩌겠냐는 말일세. 예를 들면 목철과 내가 원수지간이라고 해보세. 그런데 목철이 자기 죽음을 이용해 자네가 나를 원망하게 만든다면······ 자네는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목풍아가 마른침을 꿀떡 삼키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모습이 흥미를 잃은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왜 이렇게 황소고집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거야?’

* * *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내달린 범한이 경도로 돌아가 황제 폐하에게 동이성 일을 자세히 보고하고 있을 때 북제 황제는 이미 조용한 상경성 안에 돌아와 있었다. 검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황궁 담장은 북제 황제가 동이성으로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잠깐 황궁을 비웠지만, 황태후의 강력한 통제력과 조정에 있는 심복 관리들 덕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 경국 조정은 북제 황실 모자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하나의 힘으로 단결해 움직이는 면에서는 북제 황실은 경국 황실보다 훨씬 뛰어났다.

북제 황제가 궁전 밖에 펼쳐진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미모의 여자를 향해 물었다.

“너와 범한은 방안에 반 시진 정도밖에 머물지 않았잖아. 설마 그가 그 정도로까지 여색을 밝히는 거야 아니면 네가 춘정이 넘쳐서 참지 못했던 거야?”

황궁에 돌아온 뒤 사리리에 대한 북제 젊은 황제의 총애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말투가 자연스레 날카로워졌다. 어려서부터 황제와 함께 성장한 사리리는 당연히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기에 보름 동안 꾹 참고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북제 황제의 말을 들은 그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질투하신다는 건 저도 알고 있으니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시지는 마세요.”

그날 범한이 한 말에 우거지상이 되었던 북제 황제는 오늘 사리리의 말을 듣자 콧방귀를 뀌며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일어난 사리리가 그녀 등 뒤로 걸어가서는 뺨을 그녀의 마른 어깨에 대고는 양손으로 안았다. 사리리가 북제 황제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의 말뜻은 단순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가지게 되신다면 저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중 누가 가지게 되든 자신에게 아버지가 되었다는 걸 알려달라는 겁니다.”

북제 황제가 가만히 사리리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기생오라비가 동이성에서 아직도 즐거워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사리리는 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속으로 작은 범 대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남자이지만,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일들 사이에 껴서 치이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괴로워하는 남자가 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 *

세상에서 가장 괴로워하게 될 남자는 먼 길을 힘들게 달린 끝에 경도에 돌아왔다. 경도 수비와 13성문사의 검문을 빠르게 통과한 검은색 마차가 황궁 성문 아래 도착했다.

깊이 숨을 들이켜고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범한은 자신을 둘러싼 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관리들을 본체만체했다. 사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번에 입궁해서 황제 폐하에게 관직을 청해야지. 반드시 얻어 내야 해!’

* * *

경국 경도에서 3년 전에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황실 안 사람들이 많이 사망하자 황실의 관계는 오히려 단순하게 변하고 분위기도 소탈하고 솔직하게 변하게 되었다. 황후가 사망한 뒤 황제 폐하는 새로 황후를 들일 생각을 보이지 않는데다가 황태후까지 사망해서 황궁에는 후궁들을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친아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 숙 귀비의 경우 남은 건 차가운 냉궁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뿐이었지만, 황제 폐하는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숙 귀비를 냉궁에 보내지 않았다.

지금 황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여자는 당연하게도 3 황자의 생모인 의 귀빈과 1 황자의 생모인 영 귀비였다.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인질이 된 두 사람은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고, 이후 전투가 일어났을 때는 함께 고생하고 협력해서 황궁의 일을 처리했기에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다.

물론 이런 후궁의 분위기는 앞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거론될 경우 확 바뀔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황제 폐하가 공식적으로 황태자를 새로 세우겠다는 뜻은 보인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 모두 훗날 경국 용상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큰 황자가 3 황자 이승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3 황자는 아직 13, 4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남은 두 형제 중 그가 용상에 앉는 걸 위협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1 황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황위를 탐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황위를 물려받고 싶어 한다고 해도 동이성 포로의 자식인 이상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남은 형제이자 잠재적인 경쟁자는 바로 범한이었다.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은 어쨌거나 사생아였고, 3 황자의 스승인 만큼 용상을 두고 경쟁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이게도 작은 범 대인의 최근 몇 년 동안의 태도를 보면 그는 용상에 대해 조금의 흥미도 없어 보였다.

물론 대신들과 황궁 안 귀비들의 입장에서는 범한이 정말 용상이 흥미가 없는지 아닌지는 꼼꼼하게 따져 볼 문제였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당장 3 황자의 앞길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고, 옆에서 지켜줄 조력자도 있었다. 이처럼 경국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분명해지자 황궁 안의 분위기도 밝아졌고, 단결을 위한 소모임도 날마다 열렸으며 모든 사람의 눈빛에 더 발전하고 싶어 하는 의욕이 보였다.

* * *

범한이 길을 재촉한 끝에 경도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깊은 황궁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어서방 안에 앉아 꼬르륵거리는 배를 쓰다듬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먼저 신풍관에 가서 접당 왕만두를 먹은 뒤 입궁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폐하를 대신해 중요한 임무를 진행하던 차사가 경도에 보고를 하러 오면서 곧장 황궁으로 가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니,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배고픔에 짜증을 내고 있던 그의 눈에 어린 태감 두 명이 도시락을 들고 어서방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폐하는 지금 어딘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 궁정에서 범한이 경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렸다고 한들 당장 오지는 않을 거였다. 범한이 어리둥절해야 하는 표정으로 도시락 안에 담긴 음식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물었다.

“내가 식사를 못 한 걸 안 것인가?”

요 태감은 황제 폐하 옆에서 시중을 드느라 지금 어서방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어서방 밖에서 당직을 서는 태감도 범한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바로 황궁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엄청난 공을 세운 대 내관이었으니 말이다.

대 내관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소공야께서 국사일로 바쁘시니, 식사를 제때 챙겨 드시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려 했는데, 후궁에서 식사하고 계시던 폐하께서 생선 알밥을 소공야께 하사하고 싶다 하시어 얼른 가져온 겁니다.”

범한이 예의를 차리지 않고 재빨리 도시락 안에 담긴 음식을 먹기 사직했다. 사실 신하가 황제가 자리에 없을 때 어서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죄였다. 더구나 어서방 안에서 황제의 명도 없이 음식을 먹는다는 건 더더욱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미 특명을 받았으니 안심하고 식사를 했다.

대 내관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작은 범 대인은 일반 신하들과 확실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최근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을 떠올린 대 내관은 마음속에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다.

작은 범 대인이 경국을 위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공을 세웠으니 황제 폐하가 어떤 상을 내릴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든 대 내관은 순간 머리가 화끈해졌다. 왜냐하면 그의 앞날은 온전히 황제 폐하의 손에 달려 있었지만, 작은 범 대인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황궁에 들어온 뒤 순탄하게만 생활하던 대 내관은 범한이 나타난 뒤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경도 반란에서 상당한 공을 세운 그는 다시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미 부수령 태감이 되어 숙 귀비 궁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대 내관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만일 자신이 계속 숙 귀비의 궁에 당직을 서고 있었다면 지금 냉궁 안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거나 심지어는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대 내관은 자신도 모르게 곁눈질로 지금 자신을 따르고 있는 젊은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전에 어서방 안에서 가장 잘나가는 태감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동궁 주인을 섬기는 바람에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지위가 한순간에 몰락해 버렸다.

식사를 마친 범한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내 대관에게 따뜻한 말 몇 마디를 건네고는 눈길을 슬쩍 뒤에 있는 태감에게 던졌다. 갈수록 신중하고 어른스럽게 변해가면서도 얼굴 전체를 뒤덮은 여드름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젊은 태감을 바라보던 범한이 말했다.

“자네 아직 죽지 않았군. 참 의외군 그래.”

홍죽이 범한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이 노비 폐하의 은총으로 지난해 냉궁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폐하를 온 마음을 다해 섬기도록 하게.”

범한이 냉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범한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아챈 대 내관이 아부 몇 마디 하고는 잽싸게 홍죽을 데리고 어서방을 나오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작은 범 대인이 홍 내관을 싫어해서 일부러 동궁으로 보낸 거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대 내관이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

‘홍죽은 늙은 홍 태감이 비호를 해줄 때도 소공야를 이기지 못했잖아. 이제 늙은 홍 태감도 죽었으니 황궁 안에서 홍죽의 위치가 더없이 난처해지겠군.’

대 내관은 자신이 어서방을 나가려 할 때 범한과 홍죽이 뒤에서 서로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용한 어서방 안에서 범한이 생각에 잠겼다. 홍죽이 냉궁에서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홍죽을 좋아하는데다가 공개적으로 홍죽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내막도 모른 채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만 한 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로 홍죽이 한 행동으로 인해 범한이 상당한 애를 먹어야 했지만 말이다.

3년 전 일에 대해서 범한은 더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죽은 이미 그를 너무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자신이 그에게 빚을 졌으면 졌지, 상대방이 자신에게 빚을 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어서방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유리창에 어렴풋하게 밤길을 비추는 등불의 하늘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범한이 재빨리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일어나 폐하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어서방 문이 열리자 황색 홑옷을 입은 경국 황제 폐하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살짝 수척한 뺨과 양쪽 귀밑머리에 보이는 새치는 그의 진짜 나이를 되새겨주고, 최근 몇 년간 너무 많은 정신을 소모했음을 보여주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태감들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요 태감은 어서방 안에 황제 폐하와 범한만 남겨 둔 채 문을 꼭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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