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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85화 (885/1,108)

885화 점점 사그라지는 물보라 (1)

동시에 침묵에 빠진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뒷짐을 지고 바다를 바라봤다. 멀지 앞은 곳에서 옅은 황색 옷을 입은 사리리가 아름다운 작은 종이우산을 손에 쥔 채 쪼그리고 앉아 해변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범한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동이성 바다를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3년 전 담주 해변에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황제 폐하와 함께 나란히 나무판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고, 발아래로 하얀 파도들이 소리를 내며 밀려들어 왔었다.

북제 황제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던 범한은 세상의 상황이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시간도 유수처럼 빠르게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바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주 많은 문제를 설명했다.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그는 오랜 시간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 끝에 마침내 북제와 경국을 통틀어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게 뻗는 눈썹은 오늘따라 유독 담담해 보였고, 밝게 빛나는 눈동자는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위엄이 느껴졌다. 눈동자뿐만 아니라 길지 않은 속눈썹도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는 게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사신단이 이미 동이성에 왔으니 짐은 돌아가야겠네.”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도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으니 정말이지 실망스럽군.”

“실망으로 끝나 다행이지요. 최소한 저를 죽이지 않으신 덕분에 천하가 큰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범한은 왠지 모르게 희미하게 동정 같은 게 일었다. 그 광란의 밤에 미친 듯이 힘겨루기를 하다 눈물을 떨어뜨리던 모습을 봤었을 때처럼 말이다. 범한은 여자의 몸에 남자의 마음을 가진 황제가 평생토록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폐하가 북제의 군주라 해도 이미 정해진 일은 바꿀 수 없습니다.”

북제 황제가 살짝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쌀쌀맞게 말했다.

“예를 들면 짐이 여자라는 사실 같은 거 말인가?”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어쩌다 다시 이 주제가 나왔을까 하고 생각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한 사람의 힘만으로 세계 전체를 바꾸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북제 황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짐은 30년 동안 천하에서 가장 장렬하게 실패한 사람과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실패한 사람을 보았네. 이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용감히 일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낸 여자들이었지. 자네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두 여자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두 여자 중 한 명은 자신의 친어머니였고 다른 한 명은 장모였기 때문이다. 이에 범한은 두 사람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원망할 수는 있어도 평가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범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께서 실패하신 이유는 너무 인자했기 때문이고, 장 공주께서 실패하신 이유는 지나치게 정이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북제 황제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마 입 밖으로 말을 하지 못할 뿐 자네도 두 사람이 실패한 원인이 그보다 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걸 알지 않는가.”

‘장 공주가 실패한 원인뿐만 아니라 과거 섭가의 여주인 역시 실패한 원인이 설마 그 남자 때문이라는 건가?’

범한은 북제 황제 앞에서 계속 이 주제를 가지고 말을 할 수 없었기에 화제를 돌려 말했다.

“폐하께서는 오늘 돌아가시면 조정을 수습하고 민생은 안정시키는 데만 힘을 쏟으시며 가만히 지켜보시기를 바랍니다. 경거망동하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으실 테니까요.”

“자네가 경국 황제가 되기 전에는 짐이 자네에게 뭘 기대할 거란 지나친 바람은 가지지 말게나.”

북제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이건 믿음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말이 가진 힘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그날 사고검이 우리 두 사람을 데리고 동이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이유가 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범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가 저를 데리고 과거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동이성 곳곳을 보여준 건 친근감을 쌓고 싶어서이기 때문이지요.”

“동이성은 북제도 아니고 경국도 아니네. 이곳은 너무나도 특별한 곳이지. 사고검이 만약 자신이 죽은 뒤에도 동이성의 특별함을 계속 지키고 싶어 한다면······.”

북제 젊은 황제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자네가 경국 황제가 되기를 기대할 거네.”

범한이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이게 바로 짐이 자네를 낮게 평가하는 부분이네. 자네는 우유부단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할 뿐 자신이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네.”

북제 젊은 황제가 고개를 돌려 살짝 비난하는 말투로 말했다.

“만약 자네가 장 대가처럼 성인이라면 천하 백성들이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걸 원치 않을 테니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겠지. 지금 자네는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고 노력할 뿐 천하의 대세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는 결국 천하 사람들 모두에게 욕을 먹으며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거라는 걸 짐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북제 황제의 말에 범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폐하께서는 제가 성인이 될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시나 봅니다.”

범한의 말에 북제 젊은 황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자네를 성인이라고 믿게 하는 것 말고 자네를 움직이게 할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네.”

만약 범한이 지금 경국 신하의 본분만을 지키면서 경국의 천하 통일을 위해 노력하려 한다면 동이성을 굴복시켰고, 또 북제 황제의 큰 비밀을 알고 있는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더 강력하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해서 일을 추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걸 쥐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북제 황제가 지적한 것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상황을 수습하는 데만 힘을 쏟았고,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재난을 감찰원의 힘을 빌려 일어나지 못하게 억지로 막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저는 성인이 되고 싶지도 않고, 성인이 될 만한 그릇도 아닙니다.”

범한이 살짝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이전보다 용감해지기는 했지요. 그래서 제 생각대로 움직이며 제가 원치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황을 바꾸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북제 황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웃었다.

“설마 목숨이라도 대가로 내놓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범한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제게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제 목숨입니다. 그다음인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제 가족과 지인들의 목숨이고요.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은 세 번째로 중요하지요. 만약 그날이 정말 온다면 이 세상에서 저를 유일하게 죽일 수 있는 그 사람도 저를 죽일 수는 없을 겁니다.”

“어째서 그럴 거라고 자신하는 것인가? 그가 자네의 아버지라서 그렇게 믿는 것인가? 아니면 그도 자네의 뒤에 신묘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인가?”

북제 젊은 황제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반짝이며 천천히 묻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는 신묘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시군요.”

그런 뒤 범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더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범한은 경국 황제 폐하가 오죽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북제 사람에게 알려줘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네가 방금 했던 그 말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네.”

바닷바람이 북제 젊은 황제의 의젓한 얼굴을 향해 붙어왔다. 앞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북제 황제는 바닷바람에도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네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럼 자네의 목숨이 신 군주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인가?”

범한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북제 젊은 황제의 말을 들은 순간 그는 머릿속으로 경묘 탁자에 깔린 천과 그림, 고대 신화, 그리고 탁자 아래 숨어 닭다리를 먹고 있던 하얀 옷을 입은 낭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또 창산의 눈과 혼인을 했을 때 비개가 건네준 약과 마차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과 습관적으로 입을 앙 다무는 그녀의 표정을 떠올렸다. 순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낀 범한이 고개를 들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숨이 저보다 중요합니다.”

“범 상서는 어떤가?”

“당연히 중요하지요.”

“자네의 자식들은?”

“잘 모르겠군요.”

“범씨 집안 아가씨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

······

“진평평은 어떤가?”

북제 황제의 질문에 한동안 말이 없던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북제 황제가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자네는 정말 이상한 사람일세. 절름발이 노인은 자기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친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는 없다니 말이야.”

“제 자식들은 아직 너무 어리니까요.”

이 말을 하는 범한의 눈동자는 텅 비어 보였다.

“애정이라는 건 혈연관계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에 따라 생겨나기도 합니다.”

북제 젊은 황제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다면 짐이 자네 사이에서 낳은 자식으로 자네를 통제하려 해도 먹히지 않겠군.”

범한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사실 폐하와 저는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냉혈하고 무정한 사람이니까요. 폐하와 저의 차이점은 폐하는 여자이고 저는 남자라는 것뿐입니다.”

“무정하다고? 이전에 자네가 한 말에 짐은 하마터면 자네가 천하 백성들을 모두 품은 성인이라 생각할 뻔했네.”

“사고검이 성인이 무정한 사람이라 말했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네.”

“저는 이걸로 폐하와 입씨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북제 황제가 갑자기 범한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짐의 첫 번째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이네. 비록 짐이 이런 감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짐은 자네의 자식을 낳아도 이 점에 연연하지 않을 거네.”

“저도 연연하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이번 생에 하고 싶은 일이 세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식을 되도록 많이 낳는 겁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남자라는 허튼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폐하이시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장담한 건데 훗날 폐하께서 더 성장하시어 북제 조정을 확실히 통제하게 된다면 상경성 후궁 안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넘치게 될 겁니다.”

북제 황제는 범한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하게 알아챘다. 순간 발끈한 북제 황제가 살짝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지금 짐이 훗날 색귀가 될 거라고 말하는 건가?”

범한이 그건 모르는 거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누가 알겠습니까? 남녀 사이의 즐거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낳을 거라 말씀하셨지만, 그해 여름날 작은 사당 안에서 그 일이 있는 뒤에 임신을 하지 않으셨으니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짐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북제 젊은 황제가 범한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줄곧 해변에서 있던 사리리가 생긋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두 사람 옆에 섰다.

북제 젊은 황제가 사리리의 허리를 감싸며 범한을 향해 말했다.

“짐은 여자를 좋아하네. 그리고 여기 이 사람이 바로 짐의 여자이지.”

“그런 말로 저를 놀라게 할 생각이라면 틀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르는 과거에 제가 가장 좋아한 남자였던 장(張)씨와 채(蔡)씨도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기질이나 용모가 완전히 다른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든 듯 손을 들어 아주 빠르게 두 여자의 아래턱을 차례대로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제 여자라고 하는 게 맞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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